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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디 Jul 28. 2023

작은 색종이

[단편] 불안도 걱정도 작은 색종이처럼 접어둘 수 있다면

도서관의 조용한 분위기가 좋았다. 나는 생각보다 조용한 사람이 아닌데, 그곳에 있으면 나도 얌전한 고양이가 되었다. 어떤 도파민보다 책이 좋았고, 더 이상 시간을 쫒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했을 무렵 무얼 기대했던 걸일까, 생각보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손가락은 처음 피아노를 어루만진 듯 딱딱히 굳어 있었다. 그때 마치 뭉크의 절규처럼 마음속 깊이 비명을 외쳤다.


화연이는 물었다.

"정말로 좋아하는 게 맞아?"


차마 입술을 벌리지 못한 채 혀끝을 씹었다. 분명 좋아하지만 불안감이 어린 자신을 갉아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을 보면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그러면 다시 글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는데, 어쩌면 자신은 작가가 되기엔 너무나 손끝이 깨끗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떤 작가는 글을 쓰기 위해 음악도 빛도 없이 하루를 지낸다고 한다. 또 어떤 작가는 세계를 여행하며 직접 경험하고 글을 써본다고 했다. 나는 그들이 부러웠고 존경했다. 선망의 대상이 생겼을 때 나의 꿈은 더 커졌다.


반대로 화연이에게 물었다.

"너는 그림 그리는 게 행복해?"


나는 그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화연이는 여기저기 미술관을 다니며 늘 신기한 듯 미소 지었다. 그런 화연이를 보며 똑같이 웃었던 기억이 난다. 행복했다. 서로 분야는 달라도 좋아할 수 있는 것이 있어서 안심했다.


"행복하지. 너랑 이렇게 그림 보는 것도 좋고"


화연이의 눈동자엔 흔들림이 없었다. 빛보다 선명한 색채가 아름답게 춤추고 있는 게 보일 정도로 말이다. 나는 또 불안했다. 그녀는 고흐처럼 예술을 사랑했고,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이라는 걸 다른 이도 아닌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눈부셨다.


우린 그렇게 한참을 그림을 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화연이는 입버릇처럼 '영원히'라는 말을 자주 썼었다. 열아홉이었던, 스물이었던, 스물하나 인 지금까지도 말이다. 그 말을 들을 때면 영원이란 말에 잠식되지 않도록 화연이의 손을 꼭 잡았다. 언젠간 돌연 화연이가 멋대로 사라질까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보다 빛나고 마음이 따뜻해서 누군가 그런 너를 데리고 갈까 봐, 그런 네가 언젠가는 내가 필요 없어질까 봐 두려웠다. 화연이는 변치 않았음 했다. 너의 말처럼 '영원히'말이다.


저녁을 먹자고 발을 바쁘게 움직인 곳엔, 어렸을 적 자주 갔었던 컵 떡볶이 사장님 가게였다. 이곳의 추억은 다양한데, 화연이와 처음 만난 장소이기도 하며, 겨우 오백 원으로 계란튀김과 떡볶이 국물까지 사 먹을 수 있었던 행복한 장소였다. 화연이도 싱글벙글 웃으며 눈짓했다.


"여기 너무 오랜만이지!"

"그러네, 어떻게 여길 올 생각을 했어?"

"그거야 네가 좋아할 것 같으니까"


오랜만에 돌아온 장소엔 여전한 향기가 남아있었다. 어렸을 적 컵 떡볶이를 담아주시던 할머니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손주로 보이는 분이 할머니와 똑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린 떡볶이만 먹기 아쉬운 나머지 계란튀김과 순대도 추가로 주문해서 먹었다. 우리는 웃고 또 웃었다. 처음 만난 날을 회상하며, 바보 같은 나날들 보냈던 일들 추억하며 말이다. 추억은 좋다. 떠올리면 웃고, 또 웃고, 마음속 어딘가 따뜻해지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과거는 싫다. 과거 속 어린애는 너무 작고 연약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늘 돈이 부족해서 부모님 곁을 떠나지 못한다. 분명 화영이한테 말하면 혼나겠지만 이대로가 좋다. 지금은 네가 있으니까 이걸로 충분하다.


"남은 건 포장해 드릴까요?"


많이 주문했던 탓인지 생각보다 음식들이 남았다. 나는 화영이를 흘끗 쳐다보며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사장님은 테이플 위에 있는 음식을 휙 휙 가져가며 빠른 속도로 포장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천천히, 사장님이 조금만 천천히 움직이길 바랐다. 포장한 음식을 받으면 우린 또 헤어져야 하니까. 이것도 집에 돌아오면 추억으로 바뀌니까 나는 마음속 깊이 '천천히'라는 말을 새기며 시계를 바라봤다. 똑딱똑딱 나의 바람과 다르게 시계는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면 나중에 보자!"

"우리 또 언제 만날 수 있는 거야?"

금세 떠날 것 같은 얼굴로 화영이가 말하자 나도 모르게 성급히 물었다.


"음.. 그러게.. 근데 진아. 이제 괜찮아. 나는 영원히 너 옆에 있을 거야. 그러니까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


지난겨울. 그날은 유독 눈이 많이 내린 던 날이었다. 서울 전체에 폭설주의보가 울렸고 학교에서도 곧장 집으로 가라고 할 정도로 하얀 눈이 도화지를 만들었다. 나랑 화영이는 하얀 도화지 위에 작은 발자국을 새겼고 마치 드뷔시의 음악처럼 서로 사랑에 빠진 듯 얼굴은 붉은 홍조로 가득했다. 그게 추위 때문인지 화영이 때문인지 잘 몰랐지만, 그저 빨리 끝난 학교가 좋았고 화영이랑 있을 수 있던 순간들이 행복했다.


하늘에서 눈이 서서히 멈추자 고개는 천천히 다시 화영이로 향했다. 이름을 부를 때 입술 끝이 떨린다는 걸 알았다. 모든 일은 한순간에 벌어졌고 너도 그랬다. 화영이를 향한 시선 끝엔 머지않은 우리의 시간이 흘렀다. 눈이 쌓인 한쪽에서 화영이는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나는 그대로 화영이가 있는 곳에 쓰러졌다. 아무리 이름을 불러봐도 머리를 받친 한 손 끝에 따듯하고 묽은 피만 느껴질 뿐이었다. 처음으로 무언가를 잃는다는 감정을 알았을 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다는 어린 무력함이었다. 크게 소리 질러 화영이를 도와줄 사람을 찾았다. 애원하며 울며 손끝에 더 이상 화영이의 온도가 느껴지지 않을 때 장례식은 이뤄졌다.


"화영아.. 나는 너를 지키지 못했던 그 과거가 너무 미워"


열아홉의 나이에 겨울이 끝나자 거짓말처럼 꽃이 피기 시작했다. 화영이가 좋아하는 파란색, 핑크색, 노란색, 초록색 아주 많이 말이다. 그러나 내게 보이는 색깔은 검은 무채색이었다. 어떻게 그날 과거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 가능하면 그날만큼은 검게 칠하고 싶다. 눈에 보이지 않도록 어둡게. 너와 있던 추억을 사랑해도 너를 잃은 과거까진 사랑할 순 없어. 화영아.


"너를 사랑해. 그러니 날 믿어. 우린 영원히 함께야"


그렇게 세상이 어두워질 무렵 스무 살 화영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화영이는 열아홉의 모습이었다. 밝고 따듯한 어린 빛의 아이. 처음엔 내가 만든 허상이라는 걸 단 번에 알아챘다. 그리고 두 번째엔 화영이와 인사를 나눴다. 세 번째부터는 화영이를 놓치기 싫어했던 것 같다. 어떤 허상이든 화영이가 보고 싶었다. 너의 영원이 보고 싶었다.


"날 떠나는 거야?"

"떠나는 게 아니야. 난 항상 너의 곁에 머물 거야"


좀처럼 화영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네가 없는 세상은 그 무얼로도 채울 수 없다. 그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떠나지 마. 떠나지 마. 날 혼자 두지 마. 만약 나의 불안과 걱정이 작은 색종이처럼 접어둘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너에게 들키지 않게 빨간 초록 노랑 여러 색깔의 작은 색종이로 접어둘 것이다. 한 동안 어떤 불안도 걱정도 느끼지 않도록 말이다. 나는 화영이 품에 달려들어 신음했다. 그런 화영이도 나를 꽈악 끌어안는 게 느껴졌다. 우린 한 동안은 서로를 끌어안은 채 울부짖었다.


마지막 그날로 돌아가 모든 걸 버리고 너와 함께 눈으로 변하는 걸 상상했다. 녹은 눈은 싹이 트어 너란 봄의 꽃을 만들고, 나는 바람이 되어 항상 곁을 지키는 4월을 꿈꾸며 말이다. 나는 그러길 바랐다.


"진아. 나는 그날 너랑 있어서 따듯했었어. 너는 따듯한 아이야"

"나는 그날이 싫어.. 널 잃었어"

"추억도 과거도 다르지 않아. 나는 모든 날 좋았어, 다음 겨울엔 또 눈을 밟자"


화영이의 모습은 희미해져 갔다. 나의 색종이 조각도 하나둘씩 불꽃처럼 터져나가는 것 같았다. 별이 진다. 하늘 위로 위로 위로. 눈에 보이지 않는 오전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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