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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디 Aug 20. 2023

너의 이름은, 메리

[단편] 

그 아이를 만난 건, 도쿄의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거리가 일루미네이션으로 빛이 났고, 사람들의 얼굴은 한없이 밝았으며 또 한없이 차가웠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몸을 작게 움츠린 채 거리를 나닐었다. 시부야의 스크램블, 도쿄타워, 도쿄 국립 박물관, 이시노카라 공원.. 모두 혼자 돌아다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본어라곤 '곤니치와' '아리가또고자이마스'등 간단한 인사말이 전부였는데, 곧 잘 길을 잃어서 지도를 보여주며 '여기' '여기' 가리킨 기억이 난다. 


그날은 도쿄에 있는 나카메구로를 마지막으로 방문하기로 했었다. 그곳에 분위기 좋은 이자카야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날과 어울리게 하얀 눈이 내렸는데, 그 눈은 가게로 향하는 길까지 이어졌다. 겨울이구나,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가게 안은 생각보다 고요했다. 크리스마스라는 화려한 분위기와 달리 조용하고 아늑히 손님을 마주하는 점원이 눈에 띄었다. 나는 가게 안에서 가장 끝에 자리를 안내받았다. 그리고 나의 자리와 한 뼘 가까운 곳에 자신보다 먼저 도착한 검고 긴 머리카락을 가진 한 소녀가 보였다. 그녀는 누가 봐도 손질이 잘 된 머릿결을 지니고 있었다. 


"차부터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점원은 조용히 차와 메뉴판을 건넸다. 다행히 메뉴판엔 작게 영어로 적힌 글씨가 있었다. 나는 한눈에 메뉴를 훑으면서 '연어스테이크'와 '레드와인' 한 잔을 주문했다. 나는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그녀와 조금씩 눈이 마주쳤다. 아마 영어로 주문한 손님이 신기해서 쳐다보는 거겠지.. 계속 눈이 마주치는 그녀를 보며 혼자 착각하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그녀는 내게로 다가왔다.


"저랑 같이 마시지 않을래요?"

나는 놀란 마음에 잠시 그녀의 물음에 입을 다물었다.

"아, 혹시 영어가 안되나.. 아까는 영어를 했던 것 같은데"

"아.. 아니요. 잠시 놀라서.."

"일본인이 영어 잘해서 놀랐나요?"

"아뇨, 그게 아니라 갑자기 말씀하셔서.."


그녀는 짓궂은 농담을 던지면서 입가에 작은 미소를 건넸다. 자신의 와인잔을 나의 테이블 위에 두 곤 계속해서 그녀는 말을 이어나갔다. 


"혼자 와서, 크리스마스인데"

무심한 말투였다. 그러나, 그녀의 말투엔 여러 감정이 섞여있는 것 같았다. 잘은 알지 못하겠지만 미세하고 예민한 감정들이 그녀에게 보였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도 묻지 않은 채 크리스마스인데 왜 혼자인지, 내가 왜 도쿄로 왔는지, 그녀가 캐나다에서 영어를 배웠다는 그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중학생 때부터 캐나다로 유학을 떠나 일본엔 친구가 별로 없다는 얘기를 해줬다. 그래서 일본으로 돌아와 대학생이 되는 스무 살의 나이에 함께 성인식을 축하해 줄 친구가 없어 유타카를 입고 도쿄 근방을 혼자 돌아다녔다고 했다. 그녀는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나와 처지가 닮았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내가 일본으로 온 건 사실 단순했다. 그녀처럼 고향으로 내려온 것도 아니었고, 그녀처럼 가족을 보러 온 것도 아니었으며, 그녀처럼 혼자 있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한국에 있는 시간들이 외롭다고 느껴졌다. 가족을 만나도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도 새로운 연인이 생겨도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이 존재했다. 그건 내가 막을 수 없는 감정의 파도였다. 나는 그냥 파도에 몸을 맡기고 떠밀리고 있었다. 그리고 도착했던 곳이 일본이었다. 혼자 떠돌고 돌아다니며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끌어다닌 채 그녀를 만났다. 아마 그녀만큼 나도 외로워 보였던 건 아닐까,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우린 서로의 와인 잔을 비웠다. 


"여기, 봄이 되면 벚꽃이 많이 피여서 예뻐요"

"한국에도 그런 곳이 있어요"

"그런가요, 그럼 봄이 되면 꽃놀이를 보러 가나요?"

"음.. 아무래도 일이 바빠서요"

"아쉽네요, 저는 혼자여도 꽃을 보러 가요"


우리의 대화는 계속 이런 식이었다. 그녀가 물으면 나는 '어요-'라고 식으로 말의 어미를 끝냈다. 우린 서로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를 나눈 뒤 가게 안을 나왔다. 더 이상 눈은 내리지 않았다. 사람들로 붐볐던 거리도 발자국 위에 하얀 눈이 쌓인 그대로였다.


"잠시 걸을래요?"

그녀는 또 내게 물었다. 여전히 무심한 말투였지만, 표정은 아까 전보다 애절해 보였다. 그녀의 표정에 나도 무심히 같이 걸을까요? 하며 손을 건넸다. 그제야 그녀는 조금 안심한 듯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서로가 아무 말 없이 손을 붙잡았다. 그녀도 나도 분명히 손이 차갑다는 걸 알았지만 누가 먼저 손을 놓치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의 거리를 좁히려고 마음을 유지하고 있던 것 같다. 역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녀가 손을 살며시 놓기 시작했다. 내일 돌아갈 나를 위해서 말이다. 내가 그녀의 이름을 물으려고 하자 입술을 깨물며 입을 다무는 그녀가 보였다. 그 모습에 나는 어눌한 일본어 실력으로 짧은 인사를 남기며 얼른 뒤로 돌아섰다. 역시 바보같이 혼자 착각을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본어 억양이 전혀 들리지 않는 그녀의 목소리였다. 나는 다시 그녀를 향해 바라왔다. 멀리 서 있던 나를 위해 그녀는 다시 입모양으로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하고 있었다. 괜스레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나도 그녀를 따라 메리 크리스마스하고 입을 벌렸다. 그렇게 그녀가 떠나고 나도 곧장 호텔로 향했다. 나는 호텔로 향하는 동안 그녀의 이름을 백 번도 넘게도 생각해 봤다. 그 무엇도 그녀와 어울리지 않았는데, 그녀의 입에서 나온 유일한 말 '메리'를 떠올렸다. 나는 그녀를 '메리'라고 부르기로 했다. 혹시 우리가 다시 만나면 그땐 이름을 물어보자고 다짐하며, 또 내가 너의 이름을 '메리'라고 지었다며 서로 웃을 미소들을 상상하며 '메리'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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