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곳에서 10여 년이 넘는 직장생활을 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있다면? 단연코 이분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이직의 시기.
나는 4년이 지나고 5년 차에 접어들 때 그 고비가 찾아왔다.
무언가를 결정한다는 게 쉽지 않았던 나에게 이직과 퇴사는 아주 큰 용기가 필요했다.
속으로만 곱씹고 내뱉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소화가 안 되는 것처럼 내내 더부룩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지만 그럴 용기도 없던 어느 날 나도 모르는 제2의 자아가 튀어나왔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상급자인 팀장이 출산휴가로 부재인지라 먼저 선임 2명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그래서 더 용기가 났던 것 같다. 불도저 같던 그녀가 없을 때 지금이 기회라며.
"저 그만두겠습니다."
그렇게 선임을 통해 전한 나의 퇴사 소식은 임원에게 최종 보고가 되었고 그렇게 임원과 일대일 미팅을 시작했다.
"우리 OOO 매니저, 뭐가 그렇게 힘들었을까?"
따뜻했다. 첫 퇴사도 아닌데 왠지 뭉클했다.
"사실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어요.
오랫동안 고민했는데요 교사의 꿈을 버릴 수가 없네요.
비록 가진 것은 많이 없지만 더 많이 배워서 가르치는 업을 하고 싶어요."
"그랬구나. 그랬었구나. 그럼 밖에서 맨땅에 헤딩하지 말고 여기서 시작해 보면 어떨까? 어차피 우리도 같은 업을 하고 있으니 사내에서 강의 같은 것 해보면서 성장하면 되지 않을까? 지금 하는 일을 좀 줄여줄 테니 그렇게 다시 한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생각할까?"
갈 곳을 정해놓은 것은 아니었기에 사실 그녀의 제안에 솔깃했다. 나의 힘듦을 알렸다는 안도감과 어쩌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한창 들끓었던 퇴사의 열기가 급격히 식어가고 있었다.
'그때 그녀가 나를 붙잡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때 그녀의 제의를 거절했다면 어땠을까?'
'그때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면 지금 나는 무얼 하고 있을까?'
결국 나는 그녀의 몇 마디로 인해 여전히 이곳에 남아 있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11년 차에 접어든 어느 날.
사내 게시판에 조직 개편 공고가 떴다.
그간 업무 변경 등으로 간혹 인사이동이 있던 터라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지만 유독 한 사람의 부재가 눈에 띄었다. 여성 임원으로 이 회사와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나의 퇴직을 막고 붙잡아준 그녀의 이름만 쏙 빠진 것이다.
누군가에게 물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본인에게 물을 수도 없었다. 가혹한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그간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래도 능력 있으신 분이니 좋은 일로 가시는 걸 거야.'
하고 조심스럽게 추측만 할 뿐이다.
곧이어 그녀의 송별회 일정을 잡는 쪽지가 도착했다.
매년 조직 이동이 있었지만 거진 8년을 넘게 우리 부서와 함께한 임원이기에 남다른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쪽지를 보면서 7년 전 그날이 문득 떠올랐다.
내가 회사를 나가고 싶다고 했을 때의 그녀의 만류가.
하지만 그때와 달리 나는 그녀를 붙잡을 수 없다.
우아하지만 강단 있는 나의 첫 여성 리더였기에 왠지 모를 허전함과 아쉬움이 밀려왔다.
<이미지 출처: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