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정
퇴사하고 개강하기 전까지인 4달 동안 뭘 할까 생각하다 관심은 있지만 4년 동안 실행에 옮기지 않았던 한문 공부(정확히는 한국어문회 3급 자격증 따기)랑 바리스타 자격증 따기를 하기로 결심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언어 공부의 일환으로 일본어 학원이나 다닐 걸 그랬다. 한문은 열심히 안 한 채로 시험장에 들어갔고 바리스타 학원은 그럭저럭 괜찮지만 짜릿함을 느끼진 못하고 있다. 난 어떤 거에 엔도르핀이 도는 것인가.
나는 여러 나라에서 통용되는 SCA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고 싶어서 혜화에 있는 서울바리스타학원을 등록했다. 굳이 집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혜화까지 가서 학원을 다니는 이유는 내가 생각한 가격대에 내가 원하는 시간대가 서울바리스타학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나는 국가가 일정 금액을 지원해 주는 내일배움카드로 결제를 해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학원을 다닐 수 있었다. 바리스타 자격증이 당장 내게 도움이 되진 않지만 내가 외국에서 카페 알바를 할지도 모르지 않는가? 한국에서도 카페 알바 경험이 있으면 좋을 거 같아 5월쯤에 지원할 예정이다. 참고로 학원은 좋다. 커피 배우는 거에 관심 있는 사람은 지원해도 좋을 거 같다.
학원 수업에서 가장 기대했던 부분은 바로 라떼아트인데 처음에 잘하는 것은 당연히 바라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다. 우유를 스티밍 할 때 심혈을 기울여야 하며 하트의 모양도 들쭉날쭉하다. 커피 학원을 다니면서 인생의 중요한 교훈 중 하나를 배운다. 뭐든 처음부터 잘하길 바라는 것은 요행이라는 것. 학원 선생님이 '저희 수업은 10회 수업이기 때문에 딱 그 정도의 실력을 가질 수 있을 거예요'라고 말씀하셨다.
근데 나는 지금까지 요행을 바라며 살아왔던 거 같다. 영어는 어릴 때부터 했기 때문에 큰 문제없지만 다른 새로운 도전을 하고 (ex. 스페인어) 도전한 영역에 대해 어느 정도 무르익은 실력을 가지려면 필수 조건으로 노력이 필요한데 나는 노력은 생략한 채 그저 '잘'하는 나를 원하는 것이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크다 보니 항상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고 괴로울 수밖에 없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상을 낮추거나 노력을 해야 한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해 결국 노력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요즘 내 주제를 파악하고 마음 훈련을 하는 중이다. 커피에서 시작된 거창한 자아성찰이다.
어떤 일이든 다른 일에도 똑같이 관통되는 메시지가 있다. 커피를 배우면서 얻은 깨달음이 한문을 공부하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뜻이다. 나는 한문을 잘하는 나를 원했지 한문 공부를 하는 기나긴 과정까지는 구체화하지 않았다. 최근에 자리에 앉아 진득하게 공부를 한 적이 없어서 그런지 한문을 한 자 한 자 외워 머릿속에 집어넣는 과정이 고역이었다. 의지가 꽤 있었던 공부 초반에는 하루에 한문 약 120자를 공부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한문을 잘하는 나를 원했지 한문 공부를 하는 나를 상상하지는 않았다. 내 사고회로에는 한문 3급 자격증이 있지 몇 시간 책상에 앉아서 한문 공부를 하는 '나'는 없는 것이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과정을 시각화하지 않으니 동기는 자연스레 사라졌고 내 의지 또한 다 타들어간 장작에 남은 불씨처럼 죽어갔다. 1월에는 꽤나 성실히 공부했으나 그 탄성은 2월에 완전히 풀렸다. 어제 할 일을 오늘로 미뤘으며 다시 내일의 나에게 기대를 거는 하찮은 굴레를 반복했다. 그렇게 시험 날이 다가왔고 나는 어차피 떨어진 것 시험지나 잘 보고 오자는 마음으로 시험장에 들어갔다.
공부를 충분히 하지 않았지만 한 가지 잘한 점이 있다면 완전히 포기하진 않은 것이다. 수치로 따지면 95%를 포기했는데 5%의 힘으로 시험 전날에 기출에 있는 한문 몇 자를 보고 잤다. 마치 텅 빈 유리잔에 툭하고 떨어진 끈기 한 방울이다. 아예 안 하는 것보단 조금이라도 하는 게 낫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불합격은 기정사실이었지만 공부를 완전히 외면하지 않았다. 웃긴 게 내가 유일하게 본 기출 2개에서 시험 문제가 꽤 나온 것이다. 설마 문제 은행처럼 기출만 달달 보면 합격하는 시험이었나? 하는 추측이 들면서도 이럴 줄 알았다면 공부를 좀 더 할 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서 시험을 보는 도중에 망상을 했다. 설마 합격하는 거 아니야?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말이다. 왜냐하면 답인지는 모르겠으나 답안지에 적은 것들이 생각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공란으로 놓아둔 빈칸을 세어봤더니 45개보단 적었다. (한국어문회 시험은 150점 만점에 105개 이상을 맞아야 합격이다) 사자성어 10문제 중 9개를 적었다는 것에서, 남겨둔 빈칸이 45개보다는 적었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시험장을 나왔다. 최선을 다하진 않았지만 막상 시험을 보니 약간 미련이 남아 아마 다음번에 한번 더 한문 시험을 응시하지 않을까. 그땐 현명하게 기출 위주로 공부하는 나를 그려본다.
시험 보고 나서 성희 언니랑 비건 아이스크림 집 아케미에 갔다. 병아리콩으로 만든 마시멜로가 위에 올라간 아이스크림을 먹었는데 맛이 너무 달콤하고 부드러워 신기했다. 병아리콩으로 어떻게 이런 맛을 구현할까? 역시 장사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궁금해서 직원분께 물어봤지만 역시 영업 비밀이라고 하신다. 사실 알려주신대도 만들지 못할 것이다. 비건 케이크를 만들겠다고 석탄을 구운 적이 있으며 오늘 새벽에는 바나나 땅콩버터 쿠키를 만들려 했으나 베이킹소다 맛만 가득한 알 수 없는 밀가루 덩어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가득 넣은 베이킹소다 덕분에 아직도 배가 빵빵하다.
다시 한문 이야기로 돌아와서; 정말 오랜만에 공부라는 것을 했고 시험을 봤기 때문에 학생 때 시험 기간이 끝난 후 친구들이랑 해방감을 느끼며 놀았던 기억을 잠시 떠올렸다. 물론 그때의 기분이 들었다는 건 절대 아니다. 성희 언니랑 우리가 왜 이런 상황에 놓여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답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모양에 있었다. 인생에는 답이 없는데 지금까지는 답이 있는 줄 알았고 있는 것처럼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걸어보니 답이 없는 것이다! 엄청난 혼란이 밀려올 수밖에 없다. 나는 네모난 건물에 네모난 학교에 네모난 책상이 있는 세상에 살아왔기 때문에 생각도 네모날 수밖에 없는데 지구는 둥글고 나를 잡아주는 거푸집은 네모나긴커녕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어떤 생각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고 아무렇게나 살 수 있는 것이다. 애초에 잘 닦인 길도 선명한 답도 존재하지 않는데 나는 계속해서 옳은 길이 무엇인지 두들겨보고 존재하지 않는 정답을 찾아 헤맨 것일지도 모른다.
당연한 말도 알려주기 전까진 모르기 때문에 누군가가 알려주거나 스스로 찾을 수밖에 없다. 어떤 일이든 잘하기 위해선 노력을 해야 하며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뚜렷한 정답은 없다는 것을 다 큰 성인이 된 지금에서야 선명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 당연한 말들에 대해 그전에 나는 몰랐거나 알면서도 체화하지 않았던 거 같다. 괜히 세대를 관통하는 격언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런 말들은 내가 실감하기 전까진 단어들의 배열에 지나지 않겠지. 커피와 한문 그리고 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이화에서의 마지막 학기를 무사히 마무리하는 힘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