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간의대지 Oct 24. 2021

필름통들의 역사

짧은 이야기


시간이 문을 열면 그는 처음에 들어온 것과는 다르게 이곳을 나갈 것이었다. 그가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한 가지를 실행하기 위해 떠날 것이었다. 어렴풋이 세어보아도 그가 멀리서 바라본 밤바다처럼 짙은 암실에서 색을 불어넣었던 사진들이 3만 5천 장이 넘었다. 이제는 더 커져버린, 당시에도 공장이 주변에 있어 늘 복작거리던 어느 도시에 비하면 시골이나 다름없는 인근 읍내까지 나가려면 걸어서 2시간이나 걸리는 오래된 벽촌에 어울리는 작은 사진관. 사실은 원래부터 이름도 없이 무심하게 ‘사진관’이라고만 걸려 있던 간판은 누가 보아도 겨울날 밤새 내린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반은 찢어진 것으로 보였다. 그냥 사진관. 일반명사로 만족해야 했던 고유한 이름들이 그 작은 방 안에서 눈부신 플래시 조명 앞에 긴장한 낯빛을 빌려주곤 했다. 그나마 괜찮은 것들을 골랐으나, 부끄러움을 미덕으로 알던 소녀가 투명한 비닐에 넣어 들고 다니기에는 너무 어색한 증명사진들이 유과 껍질처럼 노랗고 까끌까끌한 봉투에 담겨서 이름이 비슷한 사람들의 손에 전해졌다. 


사진관은 미아가 되지 말라고 필요 이상으로 엄마가 꼭 눌러 씌운 동그란 모자처럼 땅바닥에 박혀 있었는데, 아이가 부모를 떠나 독립하면서 학사모를 들어 인사하듯이 이제는 바닥 아래 구멍 난 흙길 위로 바람이 지나다녔다. 귀뚜라미도 오지 않아 잿빛이 된 마을도 한때는 여름을 달리는 청년의 핏줄처럼 이어진 골목들이 한 집도 빼놓지 않고 대문과 대문 사이를 잇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노크를 했다. 그중에 한 집안에서 태어난 아무개가 온 동네를 헤집고 다니는 소년에서 무엇에든 빠졌던 청년을 지나 한순간 그루터기가 될 때까지 그의 오른손 검지가 수많은 한 때를 수만 장에 담았다. 그는 그렇게 그가 찍었던 사진의 거의 모든 필름을 검은 원통형 필름 통에 넣어서 다락방에 넣어두었다. 다락방은 너무 오랫동안 충실히 숨겨져 왔던지라, 이제는 있으나 없으나 한 버려진 비밀 같았다.


그는 저번 주에 남아있던 사진기와 현상용 인화기, 청사진을 걸어두는 걸개들을 팔았다. 그가 사진을 찍기 위해서 샀던 것들이 이제는 수집용으로 팔렸다. 그는 서쪽으로 애매하게 뚫린 작은 창문의 반대편에 놓인 케비넷도 며칠 전 가장 요란한 소리와 함께 어딘가로 보내버렸다. 그는 이틀 전 밤 다락방에 모아두었던 필름통에서 필름만 모두 꺼내서 사진관 뒤쪽 공터에 허연 불자리에 모두 쏟아냈다. 필름통에게는 이제 사별한 노부부의 남은 한쪽처럼 기다리는 것만 허락됐다. 그리고 그는 평생 동안 한 번도 쓴 적 없는 떌깜을 무려 50년 치를 태웠으나, 겨울바람은 하나도 따뜻해지지 않았다. 대신에 불타는 필름 종이들은 불타 올라가면서 물줄기가 어떻게든 한 줄기로 흐르듯이 검은 연기를 이루었다. 웅덩이에 떨어진 검은 잉크는 차가운 공기에 흔적만을 남겼다. 그나마도 날아가면서 흐릿하게 색이 옅어져 저 멀리 높은 하늘을 바라보니 어둠에 가려져 온데간데 없어졌다. 만약 세계가 빛에서 출발하지 않고, 어둠으로 시작되었다면 그것은 그 세계의 사람들이 뿜어내는 입김과도 같았다. 그들은 우리와 달리 어둠을 마시고 빛을 뱉을 것이었다. 단지 골목길로 연결되었다는 이유로 수 만장의 다른 시절들이 한줄기 검은 연기로 같이 타올랐다. 그는 그것을 바라보면서 오직 필름이 다 탈 때까지만 불을 피웠다.  


그에게는 꿈으로 끝난 아이가 하나 있었고, 사진으로는 담을 수 없는 향기를 가진 여자도 있었다. 그 둘이 같이 떠나갔을 때 다락방이 만들어졌다. 그는 자신이 한 달 동안 톱질과 못 박기 그리고 종교가 없는 사람의 기도 같은 노동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리고 그가 비밀스럽게 해온 이상한 작업도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어떤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의 사진이 담기게 될 필름통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사진을 찍고자 했다. 점차 사람이 오지 않는 작업실에서 그는 거의 모든 각도에서, 위와 아래뿐만 아니라 왼쪽과 오른쪽의 차이를 함께 고려하면서, 적어도 그가 차이를 인지할 수 있는 수준에서 서로 다른 사진을 끝없이 찍었다. 그렇게 찍힌 수많은 각도에서 찍힌 거의 같으나, 그러나 분명히 다른 수백 장의 사진을 꺼내 놓고 그는 이를 담을 수 있는 사진을 위에서 찍었다. 그는 함축한 사진을 다시 찍음으로써, 여러 장의 함축을 어떤 천조각으로 꿰매어 놓았다. 그 천조각은 다시. 그러니까, 전해지지 않고 패망해버린 잊힌 나라에 대한 역사책도 없는데 하물며 그에 대한 색인이 필요할까?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그 작업에 천작했을지 알 수 없으나, 불경과 달리 그것을 읊을 수는 없었다. 그가 1.5층짜리 다락에서 만들어낸 사진들은 도대체 몇 층이었을까? 인화지의 무게는 같았으나, 그는 맨 꼭대기 기와에 해당하는 사진이 조금씩 조금씩 무거워져서 혼자서 들기에는 버거운 정도의 무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다락은 태어난 이래로 20년 동안 그와 같이 낡아갔다. 그는 매일 가게 문을 닫고 필름 통이 가득한 다락에 누워 바람이 다락방의 허술한 나무판자들 사이를 동여 묶을 때 생색내는 냇물 소리에 아늑함을 느꼈다. 그는 다락에서 잠들 때 종종 꿈을 꾸었다. 필름통 안에서 담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사진이 쏟아져 나왔다. 그가 거대한 필름통에 귀에 대자 무서운 파도 소리가 들렸다. 그림자를 꾹꾹 눌러 담은 깜깜한 밤에게도 대책 없이 해가 뜨듯이 상자에서 사진이 터져 나와 바다로 가버렸다. 검은 연기가 흘러간 곳에서 들리는 파도소리가 잠결에 들렸으나 잠을 깨우지는 않았다. 으레 그렇듯이 그는 아침에 일어나서 이 꿈을 모두 잊어버렸다.


아침 일찍 확성기를 탄 목소리가 골목을 흔들었다. "오늘 오전 중에 마지막 철거 작업이 실시될 테니 혹시라도 아직 나가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빨리 퇴거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깨어났으나 일어나지 않고, 가장 무거운 사진을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어린 시절 도시락을 채웠던 노란 보리알처럼 검은 통들이 그를 에워쌌다. 포클레인이 사진관의 뿌리를 건드려 우르릉 우르릉 파도소리를 냈다. 그의 몸 위에 가득 찬 필름 통들이 달그락달그락거렸다. 그가 찍었던 사람들 중에는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있었다. 그가 오래된 사진관을 나가기 30분 전이었다. 들어올 때와는 달랐다. [끝]

작가의 이전글 단역 (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