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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간의대지 Oct 24. 2021

단역 (3)

짧은 이야기

5. 대기실에서


빈자리에 다른 배우가 앉았다. 배우들은 자기 파트를 기다린다. 기다리던 배우가 일어서 나가면, 아직 준비 중인 배우가 그 자리에 앉는다. 몇 차례 자리에 앉은 배우가 달라졌지만 관객은 대기실 까지는 볼 수 없다. 앉은 사람이 언제부터 그 배역을 하기로 되어있었는지 언제 대기실을 나가게 될지 알지 못했다. 


6. 무대에서 


노인은 다음날부터 일주일에 두 번, 가능하면 주기적으로 수요일과 토요일에 엄마와 딸의 집으로 갔다. 딸은 전날 노인과 통화를 해서 오기로 한 시간을 확인하고 나면, 그 사실을 엄마에게 알려주었다. 그러면 다음날 엄마는 분주해졌다.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서 방을 치우고, 좁은 베란다에 있는 화분에 물을 줬다. 그중에는 일주일에 물을 한 번만 줘도 되는 식물이 있어서 딸은 화분을 미리 구석에 빼놓기도 했다. 엄마는 금방이라도 어딘가 갈 곳이 있는 것처럼 집안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었다. 그리고 손톱에 칠한 매니큐어보다는 반드시 연한 색깔의 입술을 발랐다. 연분홍의 희끄무레한 칠이 허연 얼굴 위에서는 연지 곤지나 다름없어 보였다. 엄마는 아빠가 너무 찐한 입술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고는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눌러 비볐다. 딸은 엄마가 거울 속에서 언제를 보고 있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엄마가 분명히 밖에서 오는 손님을 어떻게 돌아온 아빠로 계속 생각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그렇지만 노인을 대하는 엄마를 보고 있자면 엄마가 움켜쥔 그 시절의 시간이 한 톨도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오지 않는 것처럼 여겨졌다. 노인을 보면 엄마는 이제 우는 대신에 웃음을 보였다. 딸은 엄마로부터 여전히 이웃집 새댁 취급을 받곤 했지만 분명히 지난 3년간 보았던 얼굴보다 자주 웃는 표정을 볼 수 있었다. 노인과 엄마가 만난 시간이 3달이 넘으면서 결혼식도 점점 다가왔다. 딸과 결혼할 남자는 아직 요양원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딸은 엄마가 요양원에 간다면 자신이 노인만큼은 자주 찾아갈 수 있을지 생각했을 때 놀랐다. 


노인은 여자가 이불 밑에 고이 모셔 두었다가 꺼내어 보여주는 갈색 가죽 앨범을 자주 보았다. 여자는 한 장씩 넘기면서 각 페이지에 꽂혀 있는 흑백 사진을 보여주었다. 여자는 작은 집게손으로 비닐이 덮인 앨범 한 장의 모서리를 넘길 때마다 확인했다. 행여나 사진들 사이의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르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는 것처럼. 노인은 사진 속에 무뚝뚝하게 서 있는 어떤 남자와 옅은 분홍색 입술 사이에 하얀 이를 드러낸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느리지만 틀림없이 어떤 남자의 얼굴을 콕콕 찍었다. 여자는 자기에게 주어진 두 개의 색깔만 가지고도 그 사진이 담은 이야기들을 노인에게 알려줄 수 있었다. 노인은 그 남자가 그날 새벽에 가죽 잠바들에게 잡혀가지 않고 지금 여기까지 잘 지내왔다면 이토록 친절하고 애잔한 설명은 들을 수 없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 남자가 사라져서 자신이 이런 호사를 누리는 건가 하고 생각했다. 


그날은 평소보다 조금 늦게 노인이 도착했다. 노인이 오자마자 세 가족이 식탁에 모였다. 그 풍경은 처음 식사를 하던 날부터 지금까지 노인에게 가장 생소한 일이었다. 광택 없는 짙은 에메랄드 빛 식탁은 의자 네 개가 기둥 사이로 포개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노인이 앉은 의자의 등 받힘은 유난히 광택이 좋았는데, 식탁을 처음 사서 엄마와 딸이 사용해온 11년 동안 대체로 옷가지들 걸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속을 내보인 것이 의자만의 일은 아니었으므로 노인에게 앉을 자격이 있어 보였다. 


‘당신 소고깃국 좋아하잖아요. 어서 들어요’

‘예에 먹고 있어요’


노인은 소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노인이 13살 때 노인의 아버지와 장터에 나가 노인이 3년 넘게 돌본 소를 팔았다. 노인은 소머리 국밥을 사준다며 자신을 데려온 아버지가 미웠다. 노인의 형은 소를 판 돈으로 대학에 갔는데 소에게 여물 한번 먹인 적 없었다. 소는 그런 형을 위해서 팔려갔다. 노인이 보기에 소는 팔려가면서 그의 소명을 아는 것 같이 굴었다. 노인은 소가 우리 집에 와서 몇 년간이나 밭을 갈고도 홀연히 팔려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놈 참 정도 없는 놈이다’. 하고 돌아서는데 마지막에 가서야 소는 머리를 정신없이 흔들어 소장수를 당황하게 했다. 멀리서 음우 우- 하는 소리가 들렸다. 노인은 소를 끝까지 쳐다보았다. 소가 자신과 충분히 멀어질 때까지 태연한 척해온 것인지, 그저 멍청하게 이제 늦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인지 궁금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노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더욱 자연스럽게 연기했다.  엄마에게 노인은 틀림없이 남편이므로 노인의 부담이 한결 줄어든 덕이었다. 엄마는 다른 요일에도 남편을 찾았다. 두 사람은 같이 드라마를 보고, 주변 시장을 거닐고, 방 안에서 화투놀이를 했다. 노인이 더 자주 올수록 딸은 이런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 조금 걱정되었지만 다가오는 결혼식을 앞에 두고 애써 고민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계절이 가을로 바뀌었을 때 엄마의 상태는 바뀌지 않았지만 변화는 노인에게 찾아왔다. 노인은 자신의 임무를 너무 잘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노인은 수동적으로 얘기를 들어주는 것을 넘어서 집에 오지 않는 동안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거나 점심이나 저녁을 먹기 전에 어떤 메뉴를 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딸은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치매인 엄마가 어떻게 계속해서 더 많은 기억을 전해주고 있는지 그리고 습관까지 연습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7. 커튼콜


노인은 어느 날 자신이 처음 여자에게 배달해주었던 편지봉투가 반쯤 열린 서랍에 삐쳐 나온 것을 보았다. 노인은 어쩌면 그 편지가 과거의 진짜 남편으로부터 보내진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노인이 배달한 것들 중 내용을 알 수 있었던 건 없었다. 원래는 이번 편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지만 노인은 자신이 그 편지 내용을 봐도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이상하게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앨범에서 본 사진을 하나 더 보는 것뿐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노인은 일어나서 서랍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방 문 밖을 쳐다보니 전을 부쳐서 오겠다던 여자가 안보였다. 노인은 눈치를 보면서 편지를 꺼내서 열어보았다. 그 순간 상황은 느닷없이 바뀌었다. 


 ‘아저씨 누구세요?’


불과 10분 전까지만 해도 남편을 바라보던 여자가 노인을 보더니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딸도 노인도 예정된 파국에 당황했다. 딸은 엄마가 노인을 잊어버린 것이 처음이지만 마침내 이런 순간이 왔다는 것에는 놀라지 않았다. 이것이 원래 두 사람의 관계였다. 모르는 사람들. 노인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집은 그전과 다르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노인이었다. 노인은 눈을 감은 채로 방바닥에 옆으로 돌아누워서 실이 터져 나온 낡은 이불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눈길이 안내한 대로 손이 느리고 크게 이불을 다시 박음질하고 싶어 하는 듯이 보였다. 손과 이불 사이에서 만난 굳은살과 일어난 보푸라기가 마찰을 확인할 뿐이었다. 아주 천천히 까끌한 소리가 얕아질수록 양쪽 면이 조금씩만 보드라워졌다. 그렇지만 마음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그것으로는 마음이 받은 온기를 도로 뺏지 못했다. 단지 남은 것은 자신이 그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당연하게도. 많은 일들이 기억 때문에 벌어지고도 결국에는 사실에 묻혔다. 노인은 생각한다. 편지가 진짜 남편이 보낸 것이었다면 자신은. 편지가 빈 종이였다면 자신이 배달한 것은.  


8. 대기실에서


빈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는다. 기다리던 사람이 나가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람이 그 자리에서 시간을 보낸다. 몇 차례 자리에 앉은 사람이 달라진다. 내린 사람만이 그들의 자리를 떠올리곤 한다. 


결혼한 딸은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요양원에 있는 엄마를 찾아간다. 엄마는 점점 더 과거로 혼자 간다. 이제 엄마는 딸이 태어나기 전으로 갔다가 아주 잠깐 돌아오곤 한다. 여자는 아무리 오랫동안 창밖을 쳐다보아도 딸의 아빠를 기억하지 못한다. 대신에 금세 역할을 잃은 한 연기자에 대해 묻는다.


‘새댁 그 아저씨 언제 와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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