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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간의대지 Oct 24. 2021

영구 팽창으로부터의 부드러운 탈출

짧은 이야기


                                                              그리고 그가 너에 관해 꿈꾸기를 그만두었다면...

                                                                                      《거울 나라의 엘리스》, 4장


꿈을 꾸다가 깨면 우리는 늘 떨어지고 있었다. 떨어지면서 우리는 셀 수 없는 꿈을 꾸었다. 이제는 내가 바닥을 기대하고 있는지 혹은 바닥이 있는지조차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까마득한 시간이 흘렀다. 귓가로 거대한 폭포와 같은 바람소리가 쏟아져 내린다. 거대한 폭포를 떠올려본다. 나는 그것이 어릴 적 경험한 나의 기억인지 아니면 어느 날 내게 배정된 순서에 따라 사전의 W – 물질 섹터에 해당하는 순서에 따라 꾼 꿈에서 처음 본 것인지 알지 못한다. 


옆에서 함께 떨어지는 우리들의 모습을 쳐다볼 수는 없다. 나는 폭포를 거슬러 고개를 돌릴 수 없다. 단지 거대한 바닥의 끌어당김에 몸을 던진 채 소리를 듣는 것밖에 우리는 할 수 없다. 우리는 각자 추락하고 있지만 옆에서 나와 꼭 닮은 모습으로 우리가 추락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누군가 가까이에서 우리를 본다면 그것은 실수로 떨어뜨린 성냥개비 같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먼발치에 떨어져 우리를 바라볼 수 있다면 별똥별과 같이 밤하늘을 수놓을지 모른다. 그건 아주 멋진 광경일지 모른다. 


검은 밤하늘은 짙고 푸르렀다. 나는 이 밤하늘이 거대한 바다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럴 일은 아마도 없으리라는 걸 알았지만 저 멀리서 우리를 애타게 찾는 등대의 빛이 나를 발견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버릴 수는 없었다. 이 깊은 어둠 속에서 갑자기 빛이 있어 우리를 구원해주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런 마음을 간절히 품고 있던 어느 날에 나는 빛과 관련된 꿈을 꾸기도 했다. 그건 내 순서가 아니었는데도 나는 그런 꿈을 꾸었다. 어쩌면 우리가 꾸는 꿈에 관심 있는 존재는 없는지도 몰랐다. 


그날 나의 꿈속에서 깊은 바다를 항해하는 노란 잠수함에 탄 조타수였다. 어느 날의 꿈에서 나는 선장이었고, 또 다른 날의 꿈속에서 나는 빨간 잠수함 속에서 숨을 거두기 직전에 꿈에서 깼다. 어느 날은 공격하고 또 다른 날에 나는 가까스로 어뢰를 피했다. S 섹터의 끝없이 많은 꿈의 변형들 중 몇 가지를 내가 꾼 것이었다. 그러나 꿈들 간의 유사성은 오직 떨어지고 있는 중에만 알 수 있었다. 한번 꿈속에 들어가서 그 역할을 수행할 때면 나는 온전히 그 사람이 되어서 꿈속을 완전히 현실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깨면 나는 다시 떨어지고 있었다. 


그날 노란 잠수함의 선내는 대부분의 선원들이 자고 있었다. 선장과 부선장을 비롯해 선원들은 붉은 원의 문양이 들어간 제복을 말끔하게 입고 각자의 자리에 앉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오른 손잡이는 왼팔을 왼손잡이는 오른팔을 각자의 앞에 있는 형형색색의 버튼이 가득한 대시보드에 대고 있었다. 거대한 적막 속에서 그때의 나는 두려움에 떨면서 보이지 않는 검은 바닷속을 천천히 유영하고 있었다. 깊이와 거리를 알 수 없는 새까만 바다가 금방이라도 나를 움켜쥐어서 우그러뜨릴 것 같았다. 잠수함의 프로펠러가 한 바퀴 돌아가는 동안 이미 여러 번 죽음이 다녀간 것 같았다. 그날 꿈은 아주 길었다. 지루함이 죽을 정도로 아주 길었다. 나는 무서운 마음을 안은 채 아주 오랫동안 그 바다를 헤엄쳤다. 회색 빛 수초가 허공에 매달린 낡은 깃발처럼 흐늘거렸다. Flag와 관련된 몇 가지 꿈에서 깃발은 많은 사람들을 모으는 데 사용되었다. 평화를 위해서 평화를 가장한 폭력을 위해서 깃발은 펄럭거렸다. 물론 나는 꿈속에서 빨갛고 검은 문양의 독재자 역할을 하기도 했고 그로부터 세습된 권력과 싸우는 혁명군의 심부름꾼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날 바닷속의 깃발은 아무 색깔도 없고 어떤 사상도 담고 있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닌 깃발은 아무것도 모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저 흔들거리기 위해 존재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멀리서 점멸하는 희미한 빛을 보았다. 금방 전에 스위치를 올려서 점차 세어지며 켜지려는 것인지 심지가 모두 없어진 촛불처럼 곧 연기가 되어 사라져 버릴 운명인지 알지 못한 채 나는 빛을 향해 추진 레버를 당겼다. 프로펠러가 얼마 남지 않은 연료를 태우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잠수함이 가까이 다가갈수록 빛은 더욱 멀어졌다. 급한 마음에 레버를 더욱 아래로 내렸지만 홈의 가장자리에서 둔탁한 소리를 내며 더 이상 속도를 올리지 못했다. 빛은 내가 꾸물거리는 사이에 점점 더 멀어만 지더니 더 간헐적으로 빛나다가 별안간 사라졌다. 나는 처음보다 더 외로워졌다. 빛이 저 멀리 빠르게 내 달려 사라지고 나니 잠수함은 점점 느려지면서 끝내 멈춰버렸다. 나는 그 까만 압력 속에서 가만히 있었다. 이제 나조차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잠수함의 뒤에서 강하게 끌어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나는 갑자기 잠수함이 뒤로 빨려 들어가는 힘을 느꼈다. 잠수함은 어떤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 반대편으로 끌려갔다. 빛에 대한 환영 같은 꿈. 꿈에서 깨자 나는 다시 떨어지고 있었다. 


어떤 위대한 손이 나를 끌어올릴 일은 없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위를 쳐다볼 용기도 없었다. 바닥으로부터 시작되었을 거대한 끌어당김에서 나는 도망칠 수 없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 손가락과 발가락을 움직여 본다. 폭포의 굉음 소리 속에서. 


그러는 동안 나는 내가 볼 수 있는 단 한 방향을 별 다른 반항 없이 살핀다. 언젠가 나의 추락이 닿을 곳을 살핀다. 추락은 나를 거기까지 잘 데려다주고 끝없는 밤과 나를 떨어뜨려 놓을 것이다. 내 꿈은 거기서 끝나겠지. 그런데 아직은 이 추락이 끝나질 않는다. 나는 아까 전에도 도달할 수 없는 거리에 있으나 저 멀리 관측한 위성에 사별한 연인의 이니셜을 붙이는 과학자의 꿈을 꾸었다. 이 꿈이 아직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끝없이 팽창하는 세계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우리는 최후의 몽상가들이라고 불렸다. 우리는 지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연기자들이어야 한다. 우리는 끝없이 추락하며 꿈을 꾼다. 우리 무대의 보이지 않는 대기실이 있다면 그곳에는 온갖 종류의 성격과 사연과 사상과 히스테리가 소품처럼 걸려있을 것이다. 저쪽에 걸려있는 것은 괴팍한 남자의 어릴 적 상처이다. 이쪽에 개어져 있는 것은 자유를 수호한다고 알려진 혁명가의 들키지 않은 허영심이다. 우리는 능숙한 연기자들이어서 꿈속에서 추락하는 우리 자신을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의 최후는 끝없이 연장될 것이다. 흐르고 우주가 더없이 빠르고 광활하게 팽창하는 동안 우리는 계속해서 꿈을 꾼다. 우리는 탈출하는 중이다.


 ***


아마도 그들이 꿈꾸는 동안 무언가 떠올린다면 이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들은 침묵한다. 우리의 계획대로라면 그들, 영원한 몽상가들은 인류의 기술이 집약된 동면 장치에 잠들어 있을 것이다. 깨어나서 말할 수 있는 일이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천천히 유영하는 거대한 우주선에서 끝없는 꿈을 꿀 것이다. 우리 마지막 인류가 꿈꾸는 방주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예견된 자신들의 종말을 보았기 때문이다. 


인류 기술을 집대성한 AI, NoAh는 영구적으로 팽창하는 우주에서 인류의 상대적 크기가 한없이 작아져 언젠가 소멸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우주는 암흑물질로 인해 그 팽창 속도가 줄어들지 않고 끝없이 더 빨라지고 있었다. 인류는 한 없이 빠르게 팽창하는 우주라는 도화지에서 결국은 관측될 수 없을 정도로 충분히 작은 상태에 이를 것이라고. 없는 것이 관측되었을 때 인류는 존재를 잃어버릴 것이라고. 


***


인류 생략의 시간은 가속해서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 최후의 인류는 물질의 팽창에 의한 생략에 대비하여 물질이 아닌 것. 보이지 않는 것을 이용한 새로운 빅뱅을 통해 ‘무’의 존재로 생략되는 운명을 바꾸기 위해 미래를 걸었다. 영원한 몽상가들은 잠든 채로 무한한 꿈을 꿈고 그것이 일으키는 파동 에너지는 우주선 코어의 ‘드림박스’로 보내진다. 영원에 가깝게 에너지를 끊임없이 중첩시켜 언젠가 박스는 폭발할 준비가 될것이다. 새로운 빅뱅의 시초가될 판도라의 상자가.   


영원한 몽상가들은 ‘드림 박스’를 코어로 하는 우주선에서 영면을 선택했다. 이론 대로라면 이번 우주의 팽창이 상당히 진행되어 현생 인류의 존재가 완전히 지워질 무렵, 드림 박스는 꿈의 밀도를 이기지 못하고 폭발할 것이었다. 이전의 빅뱅이 그러했듯이 새로운 빅뱅의 팽창 속도는 기존 우주의 팽창 속도를 따라잡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흰색 바탕의 벽면에 노란색 페인트를 흩뿌리듯 '드림 박스'에 있는 꿈의 이야기들이 퍼져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폭발하는 꿈들이 잉태할 새로운 우주의 탄생 속에서 인류는 사라지지 않을 수 있을까. 


***

최후의 몽상가들은 계속 추락한다. 그들은 닿을 수 없는 바닥을 향해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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