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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단발 Dec 12. 2021

한밤의 취미

<프로크리에이터로 그림 그리는 중>


지난달. 아이패드를 샀다. 굳이 샀다. 프로크리에이터, 라는 앱도 깔았다. 이것도 굳이 깔았다. 그다음부터 한밤의 취미가 생겼다. 


어렸을 적부터 낙서하는 걸 좋아했다. 만화 주인공을 따라 그리거나 그때그때 떠오르는 이미지를 여기저기 그려놓곤 했다. 덕분에 중, 고등학교 교과서 한 귀퉁이는 미니 스케치북이 되곤 했다. 그림을 따로 배운 적은 없다. 미술 학원에 다닐만한 형편도 안 되었고, 그냥 끄적거리는 걸로 만족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언젠가부터는 내가 낙서를 좋아한다는 사실도 잊고 살았다.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니까. 


작년부터 난데없이 '그림을 그리고 싶다.'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러다 시간이 나거나, 따라 그리고 싶은 게 생기면 수첩에다가 하나, 둘 씩 그리기 시작했다. 연필로 그리고, 사인펜으로 색칠하는 정도로 마무리했다. 한두 시간이면 완성할 수 있는 간단한 수준이었다. 딱히 눈에 띌 만한 그림은 아니었지만 재밌었다. 그런데 그리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뭔가 아쉬웠다. 스케치도, 채색도, 구도도 다 유치하고 어색했지만, 그러니까 실력이 별로였지만 그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뭘까. 뭘까. 한참 고민하다가 답을 찾았다. 답은 아이패드였다.


 유튜브를 보니 아이패드의 프로크리에이터, 라는 앱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슥삭슥삭 몇 번에 알록달록 예쁜 캐릭터가, 유럽의 멋진 풍경이,  우수에 찬 사람들이 뿅뿅 완성되었다. 저건 전문가의 솜씨라는 걸 알면서, 나는 저렇게 그릴 수 없다는 걸 알면서 그래도 탐났다. 막상 그림을 연습하는 건 귀찮았고, 또 이 정도 그리는데 뭘 연습까지 해, 하는 생각이 드는 한편 나의 실력을 비약적으로 키워 줄 것 같은 고급 장비를 갖고 싶었다. 사고 나서 연습하지 뭐. 


아이패드는 비쌌다. 그림 그리는 용도 외에는 딱히 쓸 데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그림을 그려서 뭘 할 것도 아닌데 100만 원 가까운 큰돈을 들인다는 게 선뜻 내키지 않았다. 몇 달 고민했다. 낮에는 '아이패드는 무슨. 자주 그리지도 않으면서.' 했다가도 밤이 되면 자꾸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러다가 안 되겠다 싶어 당근 마켓을 통해 중고로 구입했다. 


프로크리에이터까지 깔고 나니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왠지 실력이 향상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앱을 켜고 되는대로 아무거나 그려보았다. 어머나. 수첩에 그릴 때보다 더 이상하네. 유튜브 강좌를 보면서 따라 그렸다. 어머나. 똑같이 따라 했는데 난 왜 이 따위지? 그림 실력이야 어차피 한 번에 늘 수는 없을 거고, 뭔가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프로크리에이터 기능 강좌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나름 신세계가 열렸다. 사진을 깔아놓고 베끼듯 그리니 일단 그럴싸해 보였다. 그리고 레이어의 순서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전체적으로 그림이 깔끔해졌다. 이제는 사진을 베끼지 않고, 보고 그리는 단계로 진입하는 중이다. 또, 붓을 바꾸어 가며 이것저것 시도해보기도 한다. 


유명한 그림 유튜버 '이연(LEEYEON)' 이라는 분이  '혼자서 그림 연습하는 3가지 방법'이라는 영상을 만들었는데 거기에서  '손 따라 그리기, 크로키, 그림일기'를 꾸준히 하면 좋다고 하여 얼마 전부터는 손을 따라 그리고 있다. 처음에는 선 하나하나가 삐뚤삐뚤해서 일부러 못 그린 척하는 그림처럼 보였지만 (일단, 다 그려놓고 보면 사람의 손이 아니다) 스무 번 넘게 그려보니 손목에서 엄지로 올라가는 둥그런 근육을 살려야 하고, 손가락을 접었을 때 마디마디에 잡히는 작게 볼록 나온 근육 형태를 잡아야 사람 손처럼 보이는구나, 정도를 알게 됐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새벽 한, 두 시가 훌쩍 넘어가기도 한다. 어깨도 뻐근하고, 목은 아래 방향으로 경직되어 고개를 들 때면 아파- 소리가 절로 난다. 특히, 픽셀 단위로 지우개질을 할 때는 눈도 아프다. 문득 내가 왜 이렇고 있나, 정신이 나갔나, 싶기도 하다. 출근도 해야 하고, 회의 준비도 해야 하는데. 이게 뭐라고 이 시간과 에너지를 쏟나.  그러면서도 해질 녘 하늘에 어울리는 '조금 더 주황기 도는 붉은색'을 찾아냈을 때 기분이 좋아진다. 그렇게 하늘을 채색하고 완성작을 보면 뿌듯하기도 하다. 


아이패드에 그림을 그리면서 브런치를 시작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글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릴 수 없거나(사실상 그릴 수 있는 스타일은 정해져 있는 게 함정), 그림에 어울리는 글을 쓰지 못하는 등 제약이 있다. 누가 뭐라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읽는 사람도 별로 없으니 아무렇게나 해도 되겠지만 일단 하고 싶을 때까지 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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