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퇴근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모든 일은 각자의 사정이 충돌할 때 생기는구나.'
직장 동료인 A가 몹시 괘씸했다. '세상천지에 둘도 없는 여우가 능구렁이 같은 상사한테 붙어서 나를 모함하다니! 가만 두지 않으리라!' 저주에 가까운 앙심을 품고 씩씩대며 집으로 왔다. 내 사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을 모두 붙잡고 '세상천지에 둘도 없는 여우'가 저지른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대한의 악행'을 고발했다. 그 여우가 한 짓이 얼마나 부당한지, 얼마나 파렴치한지, 사람이라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양심마저 저버렸다며 끝도 없이 성토했다. 그 여우가 활개를 치고 다닐 수 있게 내버려 두는 상사나, 지켜보는 동료나 다 똑같다고 조직까지 싸잡아 몰아쳤다.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라야 고작 셋. 그 셋을 붙잡고 내가 얼마나 억울한지, 내가 얼마나 무고했는지 변명과 설득을 가장한 억지를 썼다. 말하는 동안 내심 알고 있었다. '늬들은 내 편들어줄 거지? 나랑 같이 욕해 줄 거지?'
그들도 듣다 듣다 지쳤는지 내게 되물었다.
"그런데 지금 네가 하는 말이 사실이야? 네 생각이야?"
순간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뜨끔했다. 내 말을 들어주는 두 사람이 나에게는 나침반 같은 존재들이라 더 이상 억지를 쓰긴 힘들다는 걸 직감했다. 그래도 그들은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이라 이실직고했다.
"... 사실과 생각이 섞인 것 같아."
셋 중 솔로몬에 가까운 한 사람은 "네가 여우라고 한 사람에게 다른 사정이 있을 수 있다"라고 했고, 법관에 가까운 한 사람은 "사실부터 확인한 다음 노선을 정하라 " 라고 했고, 오랜 세월 알고 지낸 한 친구는 "많이 힘들었겠네"라고 했다.
부끄러웠다. 순간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사방팔방에 열기를 쏟아냈다는 게 창피했다. 너무 창피해서 전후사정을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그 일 자체를 덮어버렸다.
그러다가 몇 개월이 지났을까. 한때 '그 여우'가 차 한잔 하자며 말을 걸었다. 그때만 해도 나를 왜 만나고 했는지 몰랐지. 나는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렸으니까.
세상 맹한 표정으로 왜요?라고 물었다. '그 여우'가 그때는 미안했다며 그간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구구절절 적긴 어렵지만 결론적으로 '그 사람'도 다른 이의 농간에 벼랑 끝에 서 있는 상황이었고, 나를 제물로 바칠 생각은 전혀 없었으며, 여럿이 각자 살겠다고 발버둥 치다가 '그 사람'이 '그 여우'가 되는 것으로 마무리된 상황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내 사정에 눈이 멀어 누군가를 몰아갔구나. 한심하다.
각자의 사정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든 충돌할 수 있다. 내 사정은 무엇인지, 그의 사정은 무엇인지 두루 살펴야겠다.
나는 대체 언제 어른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