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평안한 만남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평안함을 깨져버리고 말았다. 그 친구와 약속 전에 은행 계좌를 만들었다. 프랑스의 은행은 십 분이면 은행 창구에서 뚝딱 계좌를 만드는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르다. 은행 계좌를 만들기 위해서는 약속(Rendez vous)를 잡아야 한다. 그 약속한 날짜와 시간에 은행을 가면 나를 담당하는 직원과 함께 그 직원의 작은 사무실에 들어가서 계좌를 만든다. 나도 동일한 방법으로 계좌를 만들었다. 어느 정도 진행되었을 때 갑자기 나의 집 크기를 비롯한 형태를 묻기 시작했다. 느낌이 이상해서 혹시 집 보험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집 보험이 맞다고 이야기하였다.
우리나라와 다르게 몇 나라들은 세입자가 집 보험을 들어야 한다. 프랑스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에서부터 익히 들어왔고 인터넷으로 가입하면 요금이 저렴하다는 것을 알아서 나중에 가입하겠다고 이야기했다. 은행 계좌를 만드는 당시에 담당 직원과 나뿐만 아니라 인턴으로 추정되는 직원 한 명이 같이 있었다. 의사소통을 제대로 못하는 나를 대신해서 그 인턴 직원이 다시 한번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담당 직원은 의무라고 나에게 겁 아닌 겁을 주었다. 이미 핸드폰 유심에서 당하였기에 더 단호하게 이야기했고 나의 짧은 프랑스어 실력이 문제가 될까 봐 번역기를 써가면서 이야기했다. 나는 안심 아닌 안심을 하며 서명 하나를 하며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그 친구를 만나고 집에 왔는데 담당 직원이 준 많은 문서 중에 집 보험 계약서가 있어서 기함을 토했다.
약속 시간이 다가오면서 마음이 급해진 나는 문서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서명을 한 것이다. 당연히 은행 계좌를 위한 서명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집 보험 계약서에 서명을 한 것이었나 보다. 나의 부주의함으로 또 말도 안 되게 당하고 말았다. 나는 보통 20유로 이면 하는 집 보험을 이번에도 5배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가입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비용이 과도하게 발생하는 것보다 속상한 것은 나의 무능력함이다. 한국에서는 발생하지 않았을 일들이고, 혹여나 발생했더라도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인데 여기서는 쉽지가 않다. 그러니 여기저기에 도움 아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다.
이번에도 한국 유학생에게 손을 뻗었다. 어제 한국 사람의 특유의 따뜻함을 맛봐서 그랬는지 바보같이 유심 사건을 까먹고 어학원에 있는 한국 유학생에게 이야기했다. 사실 해결해달라는 마음보다는 그냥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래서 쉬는 시간에 잘나가지도 않은 복도에 나가서 이야기를 했는데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죄송해요. 도와주지 못하겠어요.’라는 대답을 듣고 말았다. 게다가 그 자리를 박차서 다른 사람을 향해서 가는 것을 보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다. 이번에는 도와 달라고 이야기한 것도 아닌데, 도와주지 못한다는 답을 또 듣고 말았다. 지겹다. ‘그놈의 도와주지 못하겠어요.’는 이제 그만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