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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산 가까운 산(30)

by 김헌삼



급등직하(急登直下) 하설산



여름 산행에서 부딪는 난관 두 가지라면 끈적끈적 휘감기는 무더위와 간단없이 내리는 장맛비라 하겠다. 이 난관들을 어떻게 헤치고 큰 고생을 줄이고 산행을 마칠 것인가가 문제다. 다분히 행락(行樂)으로 산을 찾는 우리에게는 그치지 않을 기세로 폭우가 쏟아지는 날 산행을 강행한다든가 살인적인 더위 속을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심산(心算)으로 산을 찾을 것까지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찍이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 하설산(夏雪山 1,028m)을 가기로 한 무렵은 이러한 우려의 와중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당일은 며칠 동안 퍼붓던 장맛비가 소강상태여서 날은 그런대로 잘 잡힌 셈이었다.

동대문터미널을 출발할 무렵 하늘은 잔뜩 찌푸려있었으나 예보에서처럼 비는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면 예약할 때 산악회 총무가 ‘그다지 힘들지 않은 4시간 정도의 무난한 코스’라고 했던 것을 막상 떠나는 차 중에서 대장은 이를 완전히 바꿔 ‘총 산행시간이 5시간 정도 되는 여름 산으로서 다소 힘겨운 곳’이라고 겁을 잔뜩 주었다. 본의 아니게 그릇된 정보를 제공하여 부인을 대동한 몇몇 우리 일행에게 고생을 끼치면 어쩔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래도 도심을 벗어나 넓고 푸른 들을 지나는 동안 심신에 쌓여있던 번잡하고 께름칙한 것들을 날리는 듯한 홀가분함을 누렸다. 겹겹이 두른 산중으로 꾸불꾸불 찾아들 때부터는 새로이 맞을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감으로 한껏 부풀어 있었다.

약 3시간 걸려 충북 제원군 덕산면 도기리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다리를 건너면서부터 산행의 발동이 걸렸다. 일행들은 신발 끈을 고쳐 매기도 하고 소매를 걷는 등 채비를 점검 보완하는 동안 길은 고랭지 채소밭을 지나고 장마로 우거질 대로 우거진 덩굴과 잡목 터널 사이로 인도되었다. 앞서가던 사람들은 숲 속으로 빨려들 듯 하나씩 둘씩 사라지고 있었다.

옆으로 흐르는 계곡은 숲에 가려 보이지 않을 정도였지만 물소리는 제법 우렁차게 들린다. 관목 수풀이 끝나자 키 큰 낙엽송들이 울울한 산자락이었다. 여기부터 경사가 갑자기 급해지니 즉각 힘겨운 느낌으로 부담을 준다. 다리에 체중이 묵직하게 실리고 질척이는 길 또한 미끄러워 무엇이든 잡지 않고는 운신이 여의치 않다. 필요성을 잊고 있던 스틱 생각이 간절하다. 갈 길이 얼마나 남았는지 내다보고 싶어도 부질없는 짓인 것은 이 길이 수직으로 하늘까지 닿은 듯 올라야 할 곳 끝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한걸음 올리면 어김없이 갈 길은 한걸음 줄지만 지나온 길이 남은 길보다 두 걸음씩 늘어난다는 사실은 고무적인 일이다. 그래서 쉬기를 자제하며 꾸준히 걷는다.

동참 부인들이 염려되어 간간 살펴보면 나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은 듯하여 다행이다. 그렇게 힘들어하는 것 같지도 않다. 낙엽송 숲이 다시 잡목림으로 바뀌었어도 계속되는 급경사로 어디 앉아 쉴 만한 공간조차 없다. 가끔이라도 바람결이 시원하게 지나가면 숨을 돌리련만 그런 기색은 전혀 없어 보인다. 산세가 그렇게 생겼는지 오늘 날씨가 유독 그런지는 알 수 없다. 싱싱한 나뭇잎들이 풍기는 청량감도 후덥지근한 더위 앞에는 무색할 뿐이다.

누군가가 “온몸에 새지 않는 구석이 하나도 없네!” 중얼거렸듯이 전신이 땀으로 범벅되어 여기저기 신음하는 듯한 소리가 드높다. 갑자기 고함을 내지르면 그와 함께 고통이 덜어질까 가끔 기합을 넣어보지만 별무효과다. 오래전 유명산을 처음으로 찾았을 때 초입 급경사를 맞아 이것은 천국으로 가는 길이구나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다. 2시간가량을 숨 돌릴 새 없이 거의 수직으로 오르기만 하고 있으니 그 끝은 하늘나라일 것이라는 생각이 왜 안 들겠는가.

드디어 하늘이 트이고 고지 끝이 시야에 잡힌다. 최고봉은 1,100미터의 매두막봉이었다. 이후의 길은 평탄해지며 폭풍야(暴風夜) 뒤 고요한 아침 햇살을 맞는 것 같은 평화가 심신에 돌아온다. 능선 길 따라 무성한 풀들은 부추 같은 모습으로 부드럽게 널려있고, 진초록 산자락에 드문드문 박힌 나리꽃이 밤하늘을 지키는 별들 같다. 여름 산의 꽃들은 대부분 흰색으로 청초한 분위기이나 나리만은 노랑 또는 적황의 원색에 큰 꽃송이가 띄엄띄엄 피어있는 모습이 어느 정도는 정열적이다.

지금 우리가 겪는 고행은 수도자의 그것과 흡사하다. 타는 듯한 갈증을 생각하면 찬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싶으나 페이스 유지를 위한다면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된다. 그동안 힘들었던 것을 요량하면 철퍼덕 주저앉아 실컷 쉬어봤으면 해도 힘의 지속적인 유지를 위하여서는 적당한 선에서 끊어야 한다.

1,075봉을 지나며 울창한 교목 숲 사이 확 트인 너덜지대로 한동안 내리니 담뱃잎 모양의 큰 풀들이 군생한 가운데 샘이 있었다. 차디찬 물을 들이켜니 생명수인 듯 축 처졌던 몸에 활기가 꿈틀거리며 다시 솟구치는 느낌이다. 샘터를 지나 완만하게 오르는 능선 안부에 이르러 다시 긴장시키는 것은 또 올라야 할 산체(山體)가 가로막고 있는 것이었다. 그곳이 바로 마지막 난관인 1,028미터의 하설산 정상이다. 이보다 더 높은 매두막봉을 좀 전에 올랐으나 그 뒤로 얼마나 내려왔으면 70여 미터나 낮은 곳이 저렇게 높아 보이며 공포의 봉우리로 우리 앞에 서 있는 것인가. 그러나 이번 한 번만 더 용쓰고 나면 모든 오름은 끝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앞으로 20분, 넉넉잡아도 30분이면 고지를 점령하여 더 오를 것이 없는 여유를 가질 것이다.

오후 정각 2시, 산행 시작 3시간 반 만에 등정은 모두 끝났다. 정상에 20여 분 머무르다 내려오기 시작하니 이제 살 것 같다.

산 오르기는 주로 폐 기능에 의한다면 내릴 때는 전적으로 다리 힘에 의존하게 된다. 오름에는 폐활량이 두드러진 역할을 하는데 급한 내리막은 다리의 조절능력에 따라 아주 쉬울 수도 또는 올라갈 때보다 더 까다롭고 힘겨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오름을 이끄는 것은 폐장의 힘이고 쉽게 내리도록 유도하는 것은 다리를 유효 적절하게 옮겨 딛는 기술이다.

하설산은 오름도 급경사였지만 내려오는 길도 만만찮게 급하다. 주변으로 높이 백여 미터는 됨직한 낙엽송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가운데 길은 잘 뚫려있으나 수직 경사여서 그대로 서서 몸 가누기조차 힘겹다. 더욱이 장마 뒤끝이라 길이 질척이고 미끄러운데 잡을만한 나무도 마땅찮음이 하산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오늘 5시간의 산행 중 줄곧 삼림욕과 함께 비지땀으로 전신 목욕을 한 셈이니 마무리를 계곡 욕으로 하면 십상이겠다. 누가 한여름에도 무더위를 무릅쓰고 산행하는 이유를 물어온다면 이렇게 말하리라. ‘계곡 찬물에 몸을 푹 담갔다가 마른 옷으로 갈아입을 때의 한없이 상쾌하고 날 듯한 기분을 만끽하기 위해서’라고.

하설산 계곡물은 이 한여름에 차기가 마치 방금 풀린 얼음물과 같아서 잠시 담가도 발목이 끊어질 듯 시고 저린 것이었다. 아하! 이제야 하설산(夏雪山)의 의미를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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