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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산 가까운 산(29)

by 김헌삼

두류산 빗속에서



많은 비가 그토록 줄기차게 내릴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미리 알아봤자 다른 뾰족한 방도가 있는 것은 아니니, 계획된 산행은 언제나 ‘우천불구’이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집을 나설 무렵 좀 흐려있기는 해도 비가 오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서울을 벗어나 포천을 지나고 있을 때 빗낱이 하나둘 차창을 긋는 정도의 기미는 있었지만, 그래도 산을 오르다 보면 내리던 비도 그치거나 오락가락하다 말기가 예사여서 오늘도 그렇게 잘 넘어갈 것으로 기대했었다. 사창리까지 올 때만 해도 이런 생각에 변동이 없었다. 우기이어서 비옷과 우산은 물론 속옷 여벌을 준비하고 만약에 대비하기는 했으나 야속하게도 산행을 시작하여 끝낼 때까지 3시간 반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사정없이 쏟아질 인정머리일 줄은 미처 몰랐다.

사창리는 휴전선으로부터 약 30킬로 정도의 접적(接敵) 지역이어서 주변에 군부대가 많이 포진해 있다. 춘천과 김화를 잇는 56번 국도가 관통되는 고을인데 남으로는 가평, 서쪽으로 포천과 이어지는 도로가 사방으로 뚫려있는 군사, 교통의 요충이다. 그래서 휴가를 떠나거나 귀영(歸營)하는 군인들과 이들을 면회 오는 가족 친지들로 북적이는 통에 마을은 그다지 크지 않아도 다방 여관 음식점 등이 밀집되어 꽤 번화하다. 일대에서 군대 생활을 경험한 이 나라의 사나이들에게 희미해져 가는 옛 젊은 시절의 추억을 되살려주는 곳이리라.

목적지 두류산(頭流山 993m)은 김화로 가는 국도변에 있었다. 사창리에서 4킬로 정도의 명월리 도로에서 두어 명의 헌병이 통행을 관장하고 있는 교통안내소가 있는데 오른쪽 계류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면 외딴 농가가 나온다. 여기서 수통에 식수를 채우며 산행은 시작되었다. 이때만 해도 빗물은 나뭇잎을 적시는 정도이고 그것들이 모였다가 큰 방울을 이루며 후드득 떨어지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땅바닥은 어느새 질척일 정도로 변하고 신경을 곤두세워 디뎌도 자꾸 미끄러지니 차라리 아이젠을 가져올 걸 하는 농담 비슷한 말을 하는 이도 있었다. 실은 지난달 산행할 때였던가 냇물을 건너게 될 때 신발 안으로의 침수를 최대한 방지하기 위하여 심설(深雪) 산행에서나 어쩌다 사용하는 스패츠로 꼭꼭 무장한 일행을 본 일도 있다. 써서 도움이 되고 필요하다면 겨울 장비를 여름에 사용한다 해서 그 기지에 박수를 보낼 일이지 누가 뭐라 할 것인가.

산행코스 대부분이 그렇게 되어있고 또 그런 방향으로 과장되게 체감하듯이 오르는 능선길이 매우 가파르고 험준함으로 다가온다. 숨 몰아쉬기 바빠 다른 상념이 비집고 들어올 겨를이 없다. 누군가는 산을 오르기 시작하여 대열이 채 정비되기도 전에 “셨다 갑시다!”라고 크게 외쳐 주위 사람들을 웃겼다. 처음부터 오름이 가팔라지면 이때가 가장 힘든 것은 사실이다. 산행의 전 구간을 무난히 해낼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도 시작 30분 사이 페이스 조절에 실패하면 여지없이 낙오자의 대열로 떨어질 수도 있다.

성기던 빗방울은 어느새 촘촘해지고 낙하속도도 완연히 빨라졌다. 게다가 가끔 ‘우르릉 꽝!’ 때리고 지나가는 천둥소리가 6.25 당시 포성을 듣던 순간처럼 놀라게도 한다. 더욱이 이곳은 전방 부근이라 그것이 대포 소리이기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이 절실했다. 한 손에 우산을 받쳐 들고 미끄러운 길이 급해지니 운신하기가 쉽지 않다. 땀에 젖으나 비를 맞으나 젖는다는 점은 차이가 없으니 우산은 접어두고 우의로만 버텨보기로 한다.

지천으로 들어선 떡갈나무 물푸레나무 싸리 철쭉 등의 녹엽(綠葉)들이 비에 젖으니 유난히 싱그럽고 번들거린다. 잎 모양은 둥글고 길쭉하고 날카로운 형태로 여러 가지이지만 온통 푸르름 일색이다. 아직 매달려있는 싸리 꽃이 간혹 치이고, 진한 황토색 산나리가 야간 활주로의 유도등처럼 어둑어둑한 길가를 밝히듯 피어있을 뿐이다.

정상은 동북쪽 건너로 더 가야 한다. 1시간 반쯤 걸려 올라선 920봉만 해도 사방으로 전망이 시원스럽고 그간의 역경과 고초를 모두 극복한 듯한 기분에 취하게 된다. 여기부터 꼭대기까지 약 30분간의 능선은 오른편이 수직에 가까운 절벽이지만 비틀린 소나무 등 수목들이 뒤덮고 있어 위험할 것까지는 없다. 간단없이 흩뿌리는 비 때문인지, 직전 920 고지에서 모두 한 차례씩 휴식한 뒤끝이어서인지 정상에 머무는 이는 아무도 없다. 불치의 병고에 시달리는 환자가 대책 없이 잦아들 듯이 우리 몸도 그와 똑같은 과정을 거쳐 젖은 옷의 무게를 실감하게끔 되었다. 한편 신발 속으로 스며든 물의 질척이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 정도다. 걸친 옷이 속속들이 젖으니 이제 마음은 오히려 편하다. 산행 후 마른 옷으로 갈아입을 때의 안온한 느낌은 배가될 것이다.

정상을 지나고 941 고지를 거치는 동안 완만하게 뻗어 내린 능선은 가스가 자욱하여 흐릿한 전경(前景)이 마치 안개 낀 가로수 길의 수묵화 같다. 여기는 평탄한 내림이라 가볍게 뛰는 듯 걷는 게 빠르기보다는 편하다. 우거진 그늘 속에 인적 드문 곳이어서 풀들이 키가 껑충 자랐지만 성기고 층져 있어 길을 식별하기에는 문제없다. 862봉은 지나치는 줄도 모르는 사이 일사천리로 내달아 쉽사리 절골 고개에 도달하였다. 지켜 서 있던 중간리더의 인도로 왼편으로 빠져 계곡을 향해 내려가야 할 판이다.

비경처럼 숨어있는 백마계곡은 전국에서 가장 깨끗하다는 평판이 있으나 지금은 빗물이 흘러들어 일시적으로 혼탁하다. 그렇다고 평가가 잘못된 것이라 매도할 일은 아니다. 오늘 줄기찬 양과 속도의 강우가 있었어도 끝끝내 참아주고 집중호우나 폭우로 변하지는 않았다는 것, 그래서 계류가 흙탕물이었지만 크게 불어나지 않아 건너 다니는 데 지장 없었던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청정 계곡의 고요는 이제 잘 봐두었으니 다음 기회에나 여유 있게 몸을 담그며 음미할 일이다.

이 순간 아무리 힘들어 지쳤거나 갈 길이 바쁘더라도 고개를 들어 앞산에 우뚝 선 기암은 놓치지 말아야 두류산을 다녀간 의미를 간직할 것이다. 약 30미터 높이로 돌올(突兀) 한 이 바위를 신선바위라 한다. 이런 바위들은 대부분 입석(立石), 촛대바위 아니면 주봉(柱峰) 심지어 남근석으로 불리는데 왜 유독 신선바위라 했는지 그 수려함 속에서 그 뜻을 찾을 듯하다. 어쨌든 신선바위의 여운을 남기며 산행을 마침으로써 감명 깊은 여운을 간직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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