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종주기
대피소에서 숙박하며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지리산을 섭렵해 보려는 것은 젊은 날부터 간직하고 있던 나의 오랜 꿈이었다. 그 목표를 환갑이 되는 나이가 되어서야 이뤘다. 이제 힘든 과정을 끝내고 장터목산장 앞 긴 나무 의자에 노곤한 몸을 눕듯이 기대앉아 따스하게 내리쬐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일행들과 함께 8시 백무동코스로 하산할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기나긴 능선을 누벼온 지난 이틀간은 시종 비 오고 흐렸었기 때문에 이 아침의 햇볕은 더욱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이다. 저 멀리 말 엉덩이 모양의 반야봉, 그 왼편으로 까마득히 삿갓을 빼닮은 노고단이 선명하다. 그곳들을 거쳐 여기까지 백여리 길을 오직 한 발 한 발 모아 땀 뜨듯 촘촘히 걸어왔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사람이 얼마나 독하고 무서운 존재인가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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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성삼재휴게소부터 산행을 시작하여 벽소령과 장터목 두 대피소에서 각각 하루씩 유숙하며 종주를 끝낼 계획을 세운 것은 전혀 무리 없는 일정책정이라고 생각했다. 바쁠 일이 없는 우리로서는 일수(日數)를 늘릴 수도 있지만 넉넉하게 잡는다고 능사가 아니다. 불편한 잠자리와 부실하게 때워야 하는 식사, 상대적으로 무거운 짐을 지고 매일 평상 수준 이상의 거리를 걸어야 하므로 날이 갈수록 체력은 점차 쇠하고 피로감은 누적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흘 전 밤 11시 50분 서울역발 진주행 무궁화호에 몸을 싣고 졸다 깨기를 반복하며 이튿날 새벽 5시 10분경 구례구역에 내리며 비로소 지리산행을 실감하며 다소 들뜬 기분이었다. 역사(驛舍) 밖에는 때맞춰 기다리고 있던 버스가 기차 손님이 다 옮겨 탄 듯하니 구례 시외버스터미널에 실어다 놓았다. 이곳 식당에서 이른 아침 식사를 마칠 무렵 성삼재행 버스가 출발하니 모든 것이 미리 짜놓은 각본에 맞춘 듯 기다리는 시간 없이 진행이 순조롭다.
성삼재에서의 하늘은 잔뜩 흐렸으나 오래 계속된 가뭄이 앞으로도 더할 것이라는 기상청 예보를 믿고 설마 비는 안 오겠지 했다. 흐린 하늘은 아직 이른 시각이라 미명(未明) 때문이라 돌리고 비에 대한 걱정은 안 하고 있었다. 노고단대피소까지 한 시간이 채 안 걸리는 길은 가볍게 몸풀기 위한 것이었고, 간밤 기차에서 잠을 설친 찌뿌듯함을 털어내고 쉬고 있던 체내 기관들이 깨어나 활성화하는 시간이었다.
수년 전 여름휴가를 이용하여 성삼재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가족들과 함께 걸었던 곳이니 이 구간은 낯설지 않은 길이다. 그때 자기 키 위로 높이 솟은 큰 배낭을 짊어지고 결연한 모습으로 지나치는 젊은이들을 대견한 시선으로 흘깃거리며 노고단 돌탑까지 올랐었다. 웅장한 지리산의 초입만 핥아보는 정도였지만 그사이에도 함초롬히 핀 앙증맞고 희귀한 야생화, 밀려왔다가 또 바삐 달아나는 운해 사이로 잠깐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하는 수많은 봉우리와 겹겹이 뻗어 나간 산줄기의 장중한 모습을 대면하며 지리산은 이렇게 날림으로 봐도 좋다는 생각이었다.
노고단은 반야봉 천왕봉과 더불어 지리산을 형성하는 3대 주봉 중의 하나라 한다. 반야봉을 향하여 노고단 왼쪽으로 도는 길로 들어서며 가벼운 흥분을 느낀다. 여기부터는 처음 밟아보는 땅이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체험하는 것에는 기대와 설렘이 있다. 돼지령 임걸령을 지나며 전인(前人)의 숱한 발길에 밟히고 다져져서 길은 확연하다. 주변은 빽빽하게 어우러진 고산식물 숲이었다. 옛 기억으로 천왕봉과 제석봉 사이처럼 지리산 능선은 모두 평평하고 시야가 확 트여있을 것이란 추측은 잘못된 선입견이었다.
요즈음 국립공원 측은 웬만한 초목에는 간단한 특징과 이름을 기재한 표찰을 달아놓아 생소한 식물들과 가까워질 수 있도록 한 모양이다. 고산지대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것은 구상나무다. 연륜이 꽤 되어 보이는 늙은 거목에서부터 관목 수준의 어린것, 쓰러져 널브러진 고사목에 이르기까지 이곳저곳 포진하고 있는 세력이 상당하다. 어린애 주먹 크기의 큰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는 함박꽃나무(산목련)와 함께 수수꽃다리 산수국도 꽃을 피워 잘 어우러져 퍼져있다. 함박꽃은 큰 꽃에 코를 푹 박고 벌름벌름 맡아봐도 향이 풍기는지 아닌지 미적지근하다. 여인의 체취처럼 은은한 내음이 감지되어 둘러보면 멀지 않은 곳에 연보랏빛 수수꽃다리 꽃 무리가 그건 나요 하듯 미소 짓고 있다. 길 가장자리로는 비비추 삿갓나물 노루오줌 수리취 산오이풀 등의 초본식물이 무리를 이루며 싱그럽게 자라고 있으니 지리산은 얼마나 풍요롭고 모성이 강한 산인가.
시간이 흐르며 햇빛은커녕 멀리 보이던 연봉들도 차차 안개인지 구름 속으로 사라지고 머리 위나 팔에 새 오줌 같은 빗방울이 하나둘 듣는다. 오후 2시경 연하천대피소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비가 본격적으로 쏟아지고 있는데 이를 그을 마땅한 자리가 없다. 점심을 끓여 요기하는데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다만 뜨거운 국물로 허기를 채우고 어두워지기 전에 벽소령까지 갈 수 있었다는 것만이 그런대로 위안거리였다.
벽소령. 지리산 빨치산 이야기를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 비명에 세상을 뜬 원혼들이 정처 없이 떠도는 곳. 그러나 이러한 치열하고 처절한 것들은 모두 역사 속에 묻어두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그 현장을 굽어보는 자리에 150명 수용 규모의 대피소를 세워 찾아드는 등산객의 잠자리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숙소 안에 관리소 직원들이 빨랫줄을 매 주어 젖은 옷들을 밤사이에 말릴 수 있었던 것, 마침 때가 학생들의 방학이나 직장인의 휴가 전이라 숙소 공간 활용이 넉넉하여 하룻밤을 큰 불편 없이 지낼 수 있던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튿날은 잔뜩 흐리기는 해도 안개비가 내리는 정도여서 전날에 비하면 기분이 훨씬 가볍고 살만하였다. 일정상 오늘 걷게 되는 구간도 첫날의 3분의 2 정도 거리이니 훨씬 수월할 것이다. 산행코스도 한결 평탄하고 시야가 트여있을 것이란다. 한 가지 걸리는 것은 어제 그렇게나 힘들였는데 오늘도 계속 걷기를 하는 것이지만 충분히 쉬어가며 해도 시간과 거리가 넉넉하다는 게 위안거리라면 위안이었다. 어제는 특히 삼도봉에서 화개재까지의 구간이 애써 올라간 것을 한없이 다시 내려오는 느낌이어서 이보다 더 높은 곳을 목표로 하여 올라야 할 우리로서는 벌어놓은 것을 대책 없이 까먹는 것처럼 아깝고 안타까운 생각에 마음고생이 가중되었을 것이다.
아침 8시 벽소령을 출발하여 그야말로 걷기보다 쉬기를 더 많이 했어도 12시에 세석(細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제 비는 내리지 않을 태세였다.
세석은 오래전 철쭉 철에 맞춰서 한번 찾은 적이 있다. 세석 철쭉은 지리십경(智異十景) 중의 하나로 당시 매년 철쭉제가 이곳에서 열려 세석평전은 거대한 야영장으로 변하고 모르긴 해도 아이러니하게도 철쭉보다 그것을 보겠다고 모여든 사람들 구경만 실컷 하고 가는 사례가 빈번했을 것이다. 당시 때맞춘다고 했지만 수일 전 내린 큰비에 꽃은 져서 모두 떠내려 가버리고 활짝 퍼진 나뭇잎들의 싱싱한 푸르름만 돋보였었다.
마음대로 취사 야영하도록 방치되어 있는 동안 세석은 급속 황폐화했을 것이다. 이렇게 망가진 자리를 복원하기 위하여 수십억 원을 투입하였으며 이제는 야영은 물론 극히 한정된 구역을 제하고는 취사도 금하고 대부분 지역은 일부 등산로 외에는 출입을 일체 못하도록 통제하고 있다.
우리가 장터목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경이었다. 이곳 대피소에서 하루 묵고 아침 일찍 천왕봉에 올라 일출을 맞으며 지리산 종주의 대미를 장식할 계획이었었다. 어젯밤 우리는 숙의 끝에 애초의 그 목표를 수정하기로 했는데 주된 이유는 날씨 탓이었다. 천왕봉에서의 일출 시각이 5시 5분이라는데 대피소에서 그곳까지 1시간 거리로 되어있지만 지난 이틀간의 우리 실력을 고려하면 해 뜨는 시각에 대어가기 위하여 2시간 앞선 3시에는 기상해야 한다. 그러나 잔뜩 흐려있는 날씨가 몇 시간 뒤로 다가오는 다음날 새벽에 개일 것 같지 않다는 판단으로 맘 편히 자고 일출과는 관계없이 6시쯤에나 일어나 정상 행을 시도키로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살다 보면 전혀 타의에 의하여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때가 종종 있는데 우리가 뜻밖에 지리산 정상에서 일출을 맞을 수 있었던 것이 그러한 경우였다. 새벽 3시경부터 주위가 소란스럽고 어수선해져 우리는 모두 깨고 말았다. 천왕봉 일출 시각에 맞춰 줄줄이 나서는 극성스러운 사람들의 인기척과 왁자한 소음 때문에 더 자려해도 잘 수 없는 형편이었다. 어느새 우리 일행 중 하나가 밖에 나가보고 별이 총총하고 달조차 있다는 말을 전한 게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우리도 뒤늦게 서둘러 준비하고 나서니 4시 5분 해 뜨는 시각 1시간 전이었다.
다시 대피소로 돌아올 계획으로 짐을 벗어버린 홀가분함 때문인지, 잠재되어 있던 본 실력의 발로인지 모두 표준시간보다 10여 분 빠른 50분 만에 통천문(通天門)을 지나 천왕(天王)의 자리에 의연하게 설 수 있었다.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오는 여명의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해뜨기를 마음속으로 헤아리고 있었다. 운해층(雲海層)이 두터워 예정보다 10여 분 후 용광로 속 달군 쇳물 빛깔처럼 붉은 해의 장엄한 모습이 구름과 구름 사이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10분 후에는 그 위로 솟아오르며 온 누리에 찬란한 빛을 여지없이 비추고 있었다.
온 천하 산지사방 어둠 속에서
문득 동쪽 하늘 어슴푸레 긴 가로 금
마침내 한 점 붉디붉은 것 틔어 빛나더니
큰 덩어리로 떠올라
내 온몸 달아오름이여
천왕봉 일출의 감흥을 읊은 이성부 시인의 「천왕봉 일출에 물이 들어」의 일부다.
첫날은 비에 젖고 다음 날 그치기는 했어도 울먹이는 듯 흐릿했던 날씨가 오늘 이렇게 개인 것은 하늘이 우리 중로(中老)들에게 내린 은총이었다. 그저 계속되는 맑은 날보다는 ‘비 온 뒤 갠 날’이 더욱 청명하고 산뜻함은 말할 것도 없다. 지난 이틀 동안 운우(雲雨)와 연하(煙霞) 속에서 고산에서의 주어진 조망특권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다가 마지막 날 대하드라마의 대단원을 클라이맥스로 장식하는 것처럼 최고봉에 서서 발아래로 끝없이 펼쳐지는 수많은 고산심곡(高山深谷)을 한 눈 안에 굽어본다. 비록 발성은 자제하고 있으나 가슴속으로 환호와 탄복의 함성 같은 것이 절절히 북받쳐 옴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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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일 벽소령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 일행 9명은 하나도 낙오됨이 없이 짐을 꾸려 격전을 승리로 이끈 일개 분대의 용감한 전사들처럼 장터목을 뒤로하고 유유히 백무동 쪽으로 줄지어 내려가고 있었다.(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