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수험생 엄마이자 메이크업 아티스트 A와의 대화
이번 주말, 고3 딸을 키우는 40 후반의 여성 A를 대치동에서 만났습니다. 아이를 학원에 들여보내고 부리나케 약속장소에 도착한 A는 약간 상기된 모습으로 인터뷰에 응했습니다. 대치동에서 학벌 자랑 말고, 압구정에서 재력 자랑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분은 그런 후광 없이 자수성가한 타입이었습니다. 일본 유학 후 부단한 노력으로 연예인을 주 고객인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A와 저는 수년간 친분을 유지하는 중인데, 볼 때마다 배울 점이 많은 여성이란 생각이 들곤 합니다. 이번 인터뷰는 A의 자신만의 삶에 대한 태도를 중심으로 진행했습니다.
우선 직업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했습니다. 메이크업 아트를 오래 하셨는데, 이 직업을 선택하게 된 특별한 계기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20여 년간 미용분야에서 외길을 걷기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특히 20년 전 메이크업이라면 완전히 불모지에 가까웠는데 당시 상황을 얘기해 달라고 했습니다.
A : 저희 집은 딸만 다섯이고 제가 넷째예요. 부모님은 맞벌이셨고 저희 자매들도 알아서 살아야 했어요. 항상 넉넉지 않았어요. 저는 관광학과에 들어갔는데 적성에도 안 맞고 이래서는 도무지 인생이 바뀌지 않겠다는 위기감이 들었죠. 바로 중퇴하고 일본 워킹홀리데이를 떠났어요. 아시겠지만 일하면서 공부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잖아요? 일본어가 안 되니까 한식당 주방에서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주부습진도 걸려보고, 아무튼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했습니다.
저는 A가 힘든 환경에서 자기 자신을 깨우고 삶을 개척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어서 유학을 마치고 현지에 남지 않고 왜 귀국을 택했는지 물었습니다.
A:일본은 당시에도 지금의 올리브영 같은 드럭스토어나 피부관리숍이 잘 됐어요. 전망이 밝아 보였어요. 우리나라에 적용해서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했어요. 하지만 메이크업 아티스트라는 직업조차 생소했기 때문에 직업 자체를 알리는 것조차 힘들었어요. 무시나 천대받는 건 기본이고요, 웨딩샵 등의 텃세도 만만치 않더군요.
저는 이 대답을 듣고 A가 어떤 정신력으로 어려운 상황을 극복했는지 더 알고 싶었습니다. 귀국 시기와 가정을 이룬 시점도 비슷한데, 일과 가정을 어떻게 균형 잡는지를 말씀해달라고 했습니다.
A: 나의 수고에 대해서 생각했어요. 누군가가 수고를 알아주길 바라니까 화가 쌓이고 일만 안 풀리더군요. 어느 날 ‘나의 수고는 나만 알면 된다’는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내가 나를 이해하면 그걸로 된 거지. 지금까지 자기 믿음이 없으니까 트러블이 생기면 계속 맘에 두고 힘들었던 거예요. 긍정적으로 바꾸니까 좀 살 것 같더군요. 결혼은 동종업계 사람과 했고 딸도 바로 얻었지만, 워킹맘이라서 육아에 대한 어려움이 너무 많아요. 다 포기하고 싶은 날이 거의 매일이니까요.
자기 믿음과 자존감은 스스로가 부여하는 거라는 좋은 말씀이었습니다. 현재 A의 딸 Y가 고3이 됐습니다. Y는 매우 우수한 학생으로, 그간 엄마의 노고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A에게 자녀양육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물었습니다.
A:아이 낳고 4년을 쉬었어요. 경단녀가 된 셈인데요. 아이에게 충실했던 세월을 후회하지 않지만 일을 포기한 데 대한 슬픔은 어쩔 수 없더군요. 오래 쉬다 보니 "난 더 이상 사회에서 필요한 사람이 아닌가?" 이런 생각만 들었어요. 남들 SNS를 보면 나만 지질한 것 같고 우울을 떨칠 수가 없었죠. 안 되겠다 싶어 옛 동료도 다시 찾고, 이력서도 쓰고, 자격증도 따면서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양육은 제 우울과는 다른 문제더군요. 시간은 자꾸 흐르고 아이는 커가니까요. 피곤해도 몸을 일으켰어요. 일부러라도 같이 책을 읽거나 여행을 많이 다녔어요. 거기다 Y가 사춘기가 세게 왔잖아요? 그때 저도 죽고 싶을 정도였는데, 얘는 더 힘들겠지 하며 그냥 버틴 것 같아요. 결국 양육에서 중요한 건 인내와 마음소통인 것 같아요.
저도 균형을 잡으면서 현명하게 사는 A의 말에 힘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끝으로 현재의 삶이 조금은 만족스럽지 않다고 느끼시는 3060 여성분들께 힘이 되는 말씀을 부탁드렸습니다.
A : 제가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냥 비교하지 말라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남과 비교하는 순간 모든 게 불만스럽고 자기 영혼을 해치게 되니까요.
A와의 대화는 짧지만 울림이 있었습니다. A는 자신만의 경험과 성찰을 바탕으로 현재의 '나'를 완성해 가는 여성이었습니다. 완벽해 보이는 사람을 보면, 일과 삶에 척척 적응하며 잘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분명 남모르는 애환과 시련을 이겨내는 과정이 있었을 겁니다. 현재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나의 장점부터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요?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요? 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뿐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