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정서재 May 25. 2023

천녕전

붉은 용의 전설 (단편)


단기 343, 하늘이 열리고 붉은 용이 압록강에서 승천하여 상서로운 기운이 장안에 가득했다. 그날 밤 마한국에서는 정안왕후가 난산 끝에 쌍생아를 출산하기에 이른다. 천둥이 울리고 비바람이 몰아친다. "뭐라? 쌍생아라고?" ", 왕후마마, 어찌하오리까?" 정안은 왕궁 승려의 말을 떠올렸다. "쌍생아 중 하나가 붉은 용의 여의주인 자운석의 기운을 타고났으니, 그 아이가 장차 천하의 주인이 될 것이오." 정안은 두 갓난아기의 등을 확인했다. 번개가 칠 때마다 '천녕' 하얀 등에 붉은빛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그리도 천지신명께 빌고 빌었건만..." 마한에선 여인이 왕이 될 수 없었다. 더구나 쌍생아는 불길한 존재라고 여겼다. 하나는 반드시 죽여서 액막이를 했다. 이대로라면 딸은 자운석의 주인이니 죽임을 당하진 않지만 왕이 될 수 없을 거고, 천극은 아들이지만 죽게 될 터였다. 정안은 얼른 눈물을 훔쳤다. 장막 뒤 누군가에게 손짓했다. 마한 최고의 살수 ''이 들어왔다. ''은 핏덩이를 안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비바람 치던 그날, 궁에는 정안의 숨죽이며 흐느끼는 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릴 뿐이었다.     



왕세자 천극은 용의 기운을 타고난 자로 천명을 받든 마한의 후계자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백성들은 칭송을 멈추지 않았다. 오랜 지병을 앓고 있는 진무왕은 이미 세력을 잃은 지 오래이며, 실권은 정안왕후가 휘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정안은 불안했다. 천극 몸에는 자운석의 기운이 보이지 않았다. 진무왕은 뭔가 알아챈 듯 자주 물었다. 대신들은 상고부터 전해오는 전설대로 천극이 자운석의 봉인을 풀어 백성을 오랜 가뭄과 기근에서 구해주리라 믿었다. 천극17세가 되던 해, 진무왕과 대신들은 자운석을 직접 보길 원했다. 정안은 다시 한 번 피를 묻히리라 결심했다.      



''은 딸 '천녕' 산속에 살면서 약초를 캐거나 약을 만들어 살았다. '천녕'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아비를 따라 약초를 팔러 다녔고 병자를 치료하기도 했다. 그녀의 나이 17, 대갓집 규수 못지않은 기품과 아리따운 용모로 천리 밖까지 소문이 났다. 부녀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은 정안왕후가 보낸 정예군에게 쫓기고 있었다. '' 더 이상 살생을 하지 않기로 다짐하며 살았다. 17년 전, 갓난아기 '천녕'을 궁에서 데리고 나와 그림자숲으로 향했다. ''은 자기 품 안에서 잠든 아기의 천진한 미소를 보고 꺼냈던 단도를 도로 집어넣었다. 정안왕후가 다시 그를 찾는다. 이번에는 천극 세자에게 방해되는 진무왕과 충신들을 죽이라는 명일 것이다. '천녕'을 키우며 사람 사랑하는 법을 배웠고 사람 목숨을 지키는 법을 깨달았다. 더 이상 악랄한 왕후의 사냥개로 살 순 없었다. 부끄러운 아비가  수 없었다.     



왕후의 정예병에 둘러싸인 ''은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천녕'을 걱정했다. '천녕'은 아비의 심부름으로 고잔국 왕궁에 천년초를 납품하러 가고 있었다. 고잔국은 황금과 철광으로 번성한 대국으로 마한국과는 항상 대립 중이었다. 고잔국 태자  며칠 전 사냥을 나갔다 희귀한 독사에 물렸는데, ''의 약초가 효험 있다는 소문에 그를 부른 것이다.



그날따라 '''천녕'에게 심부름을 보냈고, '천녕'은 태자 ''을 알현한다. "'' 대신 왔다고? '천녕'이라고 했나? 내 병을 고치면 큰상을 내릴 것이다." 태자 '''천녕'의 상서로운 기품에 첫눈에 반하고 만다. 고잔국 태후도 부러지는 '천녕'을 맘에 들어 했다. 이때 전령이 다급히 달려와 ''의 죽음을 알린다. 하루아침에 천애고아가 된 '천령'은 아비의 장례를 홀로 치르며 복수를 다짐한다. 고잔국 태후는 딸이 없었다. 그로부터 ‘천녕 양녀를 삼아 어여삐 여겼다. '천녕'은 공주 신분으로 궁에 머물게 됐다. 태자 '' 몹시 기뻐했다.      



그러던  정안왕후의 욕망은 점점 도를 더했다. 진무왕의 단약에 매번 미량의 독초를 섞었다.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진무왕은 어느 날 꿈을 꾼다. 붉은 용이 검은 연기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 왕에게 일갈한다. "자운석이 선택한 아이가 지금 여기 없구나! 부정한 어미가 잘못된 선택을 하였다! 반드시 찾아 내거라." 진무왕은 진실을 알아챘다. 하지만 이미 늦은 걸까? 상궁을 은밀히 불러 겁박하니 '천녕'의 존재를 털어놨다. 시간이 없다. 정안왕후가 눈치채기 전에 어서 딸을 찾아야 한다.     



궁녀 소생인 성락 왕야는 모친과 왕궁 정원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마침 산책하던 정안왕후 눈에 모자가 눈에 띄었다. 멀리서 정안왕후는 손가락을 까딱했고 어머니 숙의는 부리나케 치마폭을 움켜쥐고 왕후에게 내달렸다. 성락도 어머니를 쫓아 정안왕후께 머리를 조아렸다. 어머니가 무시당할 때마다 피가 역류했다. 다른 후궁들과 그 자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정안왕후는 아들 천극 세자를 위해서는 피도 눈물도 없었다. 복종하는 자에게만 자비를 베풀었다. 정안왕후에게 유일하게 대적할만한 세도가는 국공 왕비야 뿐이었다. 왕비야는 천극의 숙부로 진무왕의 형이다. 붉은 용의 기운을 타고난 동생 진무에게 왕위를 뺏기고 속내를 감추고 사는 자이다. 왕비야는 정안왕후의 옛 정인이었으나, 정안은 왕비야를 버리고 왕위에 오른 진무를 택했다. 왕비야는 때를 기다리며 비밀리에 철광산 기슭에서 반란군을 양성하고 있었다.      



한편, '천녕'은 고잔국의 공주로 살면서 태자 ''의 아낌없는 보살핌을 받는다. "생명을 구해준 널 영원히 지켜줄게." 두 사람은 점점 서로에게 깊이 빠져들었다. 하지만 '천녕'은 아비 ''의 원수를 찾아야 했다. 결국 ''의 과거를 알고, 자기를 지키려 한 ''의 진심에 가슴 아파한다. '천녕' 아비의 원수 정안왕후를 처단하기 위한 계획을 짠다. 한편 왕후의 측근은 ''의 오두막을 불태우려다 '창녕'의 흔적을 발견한다. 이에 보고를 받은 정안은 딸의 생사를 의심하고 '천녕'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진무왕은 서서히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직감했다. 천극을 부른다. "긴히 할 말이 있다. 너는 진정 왕이 되고 싶으냐?" ", 아바마마, 저는 자운석의 봉인을..." "틀렸다. 네가 더 잘 알지 않느냐. 잘 듣거라. 네겐 쌍생아 누이가 있다. 반드시 찾아 내거라. 네 어미의 욕심으로 죽을 고비를 맞았지만 이 마한을 살릴 수 있는 아이는 그 아이뿐이니라." 천극 당황했다. 어머니 정안왕후의 기대와 집요함에  쫓기듯 살았던 자신이었다. 시와 서화를 좋아하고 자연을 벗 삼아 자유로이 살고 싶었거늘, 어느새 세자 자리에 앉아 어머니 눈치를 보며 사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누이를 만나고 싶다. 찾아내자.     






사흘  정안왕후의 성대한 생일잔치가 열렸다. '천녕' 무녀로 변장하고 마한궁으로 잠입했다. 태 '' 불현듯 자취를 감춘 '천녕' 걱정한다. 그는 무녀에게 '천녕' 출생의 비밀에 대해 듣는다. 그는 비극을 직감하고 마한으로 쏜살같이 말을 달린다. 악공들이 연주하는 선율과 무희들의 요염한 춤사위가 경전전을 휩감는다. 무리 속에서 춤을 추던 '천녕' 눈빛이 바뀐다. 정안왕후는 대신들의 술잔을 받고 호탕하게 웃어재낀다. 이때 '천녕'  묻는 단도를 정안의 심장을 향해 있는 힘껏 던진다.  순간을 위해 무수히 연습해 왔다.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으로 여기는 희대의 요녀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      



천극 세자는 비밀리에 움직였다. 누이가 살아있다면 어디로 갔을까? '' 죽고 나서 고잔국으로 흘러갔다는 누이는 자신이 누군지 알고 있을까? 진무왕의 혈맥 속에 퍼져있던 독이 발작했다. 진무왕은 각혈을 하다 회환의 눈물을 흘리며 용상에서 스러져갔다. "내가 지은 죄가 많구나.... 내가..."        



정안은 가슴팍에 꽂힌 단도를 내려다본다. 칼자루 끝으로 붉은 피가 흘렀다. 군사들은 '천녕'을 에워쌌다. 그때 '' 천정을 뚫고 바닥으로 내려온다. '''천녕' 등을 맞대고 서서 군사들에 대항한. 칼과 칼이 부딪치고 창과 창에 불꽃이 튀긴다. 어느새 천극 달려온다. 정안왕후를 끌어안고 오열한다. "어머니, 어찌 하늘을 거스른단 말입니까? 그 아이가 살아있어요." 정안은 숨을 헐떡이며 "그럴 리가 없다, 그래서도 안 되지. 네가 용상에 올라야..."



'천녕' 마지막 목숨을 거두기 위해 쓰러져있는 정안 앞에 우뚝 선다. 천극 벌떡 일어나 맞선다. 두 사람의 칼이 서로의 목을 겨눈다. "정안왕후는  아비의 원수다. 오늘 목숨을 거둬가겠다." "어머니가 아무리 죄인이라도  버릴  없다!" '천녕' 칼끝이 천극 목덜미를 날카롭게 내리친다. "안돼! '천녕'!" 태자 ''이 다급하게 외친다. 정안은 간신히 붙어있는 숨을 붙잡고 마지막 말을 내뱉는다. " 아들이... 네년 때문에..."      



'천녕' 칼에 천극 허물어지듯 주저앉는다. "천녕, 그토록 찾았는데 이렇게 만났구나." 천극 그대로 숨을 거둔다. '천녕' 모자의 시체 옆에 서서 동상처럼 굳어 버린다. 태자 '' 달려와 '천녕' 부둥켜 앉는다. "괜찮다. 괜찮아." '' 두 눈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얼마쯤 지났을까? '천녕'은 혼란스러웠다. 태자 '' 세상을 등지고 선산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둘만의 세상에서 자유롭고 싶었다. 어머니 정안에의 원망도  용서하고, 오라비 천극 위한 제도 올리면서. 하지만 붉은 용은 '천녕' 놓아주지 않았다. 하늘이 선택한 자가  운명을 거부하면 수많은 백성의 목숨이 위태로워진다. 성락 왕야 같은 제후들과 국공 용비야의 야심 또한 심상치 않았다.      



운명이란 무엇인가? 왕위란 무엇이란 말인가?

자운석의 봉인을 풀기 위해 '천녕'은 주어진 운명을 피하지 않기로 했다. 마한의 주인으로 새 황후가 탄생한 날이었다. '천녕'18세의 일이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