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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May 16. 2024

다시 쓰는 일기 32 - 2024.5.XX

‘인생은 지나간다’

고향에서 큰 행사가 있었다. 주손胄孫인 사촌 형님의 고택 뒷마당에서였다. 행사의 목적은 집 옆 언덕에 서 있는 직계 조상의 사적비를 청소하는 것이었지만 그것 못지않게 족친들의 단합 도모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내 기억으로 이런 행사는 전에 없던 일이었다. 그래서일까 고향에 사는 일가친척은 물론이고 서울 · 부산 · 대구 등 ‘경향’ 각지에서 많은 종친들이 모였다. 고향에 남은 일가친척이라고 했지만 사실 몇 되지도 않는다. 다들 도시에 나가 살거나, 평생 고향 땅을 지키고 살던 사람들도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친족보다는 타성 사람들이 더 많아진 고향이다. 모인 사람들이 어림잡아 50여 명은 넘었는데 90을 넘거나 바라보는 어른들이 적지 않았다. 그보다 젊다 해야 6∼70대고 아주 드물게 50대가 섞여 있을 듯하다. 11시경부터 시작된 행사는 오찬 후 흥겨운 여흥까지 이어져 오후 4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사적비를 청소하는 일이 모임의 명목상 이유라고 했는데 이 일이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30여 년 전에 세워진 것이라 비 표면은 먼지와 얼룩으로 더러워져 있었는데, 화학약품을 사용해서 닦아내는 일이 생각보다 수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누구는 사다리에 올라 솔질로 비 표면을 닦아내고, 또 누구는 긴 호스를 연결해서 물을 뿌리고, 바닥을 청소하고, 한쪽에선 동영상을 찍고, 또 몇몇 어르신들은 이래라저래라 지시를 하고, 그도 저도 아닌 사람들은 멀찍이 떨어져서 구경이나 하는 부산한 장면이었다. 다행한 것이 전날 밤까지만 해도 비가 오락가락하던 궂은 날씨가 아침에는 거짓말처럼 화창하게 개어서 모두들 조상이 도우신 것이라며 덕담들을 하였다. 역시 문중 행사 때마다 앞장서는 몇몇 사람이 팔을 걷어붙이고 제 역할을 했고, 또 예상치도 않았던 신선한 ‘일꾼’들이 나와서 칭찬을 듣기도 했다. 비의 머리 부분까지는 손을 대지 못하고 비신碑身 부분만 청소를 한 후 다음을 기약하고 끝을 냈는데 그래도 제법 비의 꼴이 의젓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주손인 사촌형님의 집은 고택 체험으로도 이용되는 제법 번듯한 기와집이다. 내게는 큰집이 되는 곳이다. 대대로 주손이 이어받아 가꿔온 집이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시던 집인데 거슬러 올라가면 몇백 년 세월을 버텨온 집이다. 낡고 퇴락한 집을 그동안 몇 차례 보수와 개수를 거듭해서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춘 것이다. 앞마당에는 갖가지 꽃들로 눈이 부시고 한쪽에는 가지런히 정돈된 장독들이 열을 지은 장독대가 있으며 그 둘레를 낮은 돌담장이 둘러싸고 있다. 앞마당 못지않게 넓은 뒷마당은 정갈하게 잔디가 깔려 있다. 예전에는 감나무 몇 그루가 서 있었는데 나무를 베고 정원으로 가꾼 지가 오래되었다. 그 뒤로 제법 너른 밭이 있고 이어지는 완만한 경사의 산기슭을 오르면 조상들의 무덤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내 아버지는 둘째라 결혼 후 분가하여 큰집에서 20리 떨어진 시내에서 살았고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갔으니 이 집에서 산 적은 없다. 그렇지만 조부모와 백부 · 백모, 사촌 형제들이 살던 곳이며 방학 때면 다녀가던 곳이라 그에 대한 추억이 없을 리가 없다. 비록 태어난 곳은 아니더라도 이곳이 내 고향임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집 곳곳에 서려 있는 사람과 풍물과 풍속에 대한 그립고 아련한 추억은 내게 더없이 소중한 것이고 또 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곳이니 내 뿌리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너무 일찍 고향을 떠났기에 가계의 내력이나 일가친척에 대해서는 무지한 편이어서  성장해서 고향을 찾았을 때도 늘 소외되는 듯한 쓸쓸함을 느끼곤 했다. 내게는 낯이 설었지만 내가 누구 아들이라고 인사를 하면 상대는 금방 아, 네가 아무개구나 하고 이름까지 알고 반겨줄 때는 더욱 송구한 마음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번 행사에서 일시에 여러 일가친척을 만나고 보니 새삼 친족의 살가움을 느낀 좋은 기회였다. 멀게는 몇십여 년 만에 다시 보는 어른들도 있었고 처음으로 인사를 나눈 사람들도 여럿이었다. 여기저기 투박한 사투리가 들리고 안부를 묻는 소리들이 오간다. ㅇㅇ할배, ㅇㅇ할매, ㅇㅇ아지매 하며 손을 맞잡고 안부를 묻는 반가운 소리들이다. 마당에 마련된 식탁에는 오랜만에 맛보는 고향 음식들이 가득했다. 종친 간부들의 인사말이 끝나고 식사와 함께 흥겨운 노래자랑 시간이 되었다. 대구에 사는 어느 아지매의 남편 되는 분이 아코디언과 하모니카 연주로 흥을 돋우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 사람 두 사람 앞으로 나서며 마이크를 잡는다. 휠체어에 앉아 있던 90 노인이 일어나서 덩실덩실 춤을 추고 동갑내기 할매들이 서로서로 손을 잡고 <동숙의 노래>를 부르고 <낙화유수>를 부른다. 그 즐거워하는 모습들이라니! 그런데 오래전에 그리도 많이 불렀던 노래인데 왜 이리 가사가 떠오르지 않을까? 자막에 의지하는 노래방 시대라 노래방 기계가 없으면 머릿속이 하얘진다. 내비게이션이 없으면 길치가 되는 것과 같다. 웅얼웅얼 말 배우듯 뱉어내던 몇 마디 가사조차 끊어지더니 휴대전화에서 약 올리듯 반주만 저 혼자 흘러간다. 그래도 모두들 즐겁기만 하다. 나도 노래 두 곡을 불렀다. 사촌 형님이 한사코 노래 부르기를 사양해서 ‘주최 측 체면’이라도 세워야 할 것 같아서였다. <섬마을 선생님>과 <가는 세월>을 불렀다. 하도 많이 들은 노래라 가사는 대충 기억이 났다. 젊을 때는 제법 노래 잘한다는 칭찬을 듣던 나였지만 나이 들어서는 목소리가 갈라지고 고음을 ‘뽑아내지 못해’ 여러 사람 앞에서 노래 부르는 건 포기한 지 오래되었는데 그래도 망신은 면할 정도였던 것 같다. 노래가 끝난 뒤 사촌 형님이 내 자리로 와서 팁이라며 3만 원을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자천 타천으로 몇몇 사람들의 노래가 계속된 뒤 모두 한자리에 모여 기념사진을 찍는 것으로 행사는 끝이 났다. 떠들썩하게 배웅하는 소리들과 함께 집 옆 공터에 늘어서 있던 자동차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아직도 고향을 지키는 사람들 몇몇만 남았다. 서울로 오는 차 안에서 읊조리듯 <섬마을 선생님>과 <가는 세월>을 부르고 또 불렀다. ‘더 잘 부를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서울에 도착할 때쯤 벌써 카톡에는 행사 장면을 찍은 사진과 (어느 여자 가수의 노래를 배경으로 한) 동영상이 올라오고 소감들이 줄줄이 달린다. 이구동성으로 모임이 너무 좋았다며 내년에도 모이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말 한마디 한 마디에 옛날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이 담겨 있다. 그 그리움 속에는 이제는 없는 사람에 대한 추억도 있고 자신들의 지나간 모습도 담겨 있을 것이다. 말이 그렇지, 이런 행사를 언제 다시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여기 모인 사람들, 언제 다시 한 자리에서 보겠는가. 행사에 참여했던 어느 분의 소감이 인상적이어서 적어 본다.     

'그리운 고향 산천 보고 싶은 얼굴

주손 부름 받고 서울에서 부산에서 대구에서 안동에서

구름같이 몰려와 산자수려한 고택에 들어와

아재요 언니요 새아재요 새아지매요 반갑고 반갑도다

신록으로 치장한 뒤안에서 요리사로 명인된 안에 새댁 솜씨에

진미, 정성, 감동을 함께 먹고 악단이 무색해도

하모니카 아코디언에 장단 맞춰 노래하고 춤추고∼∼

짧은 해가 아깝다 내년에도 기약하자 '


<소설가 구효서 씨의 산문집 「인생은 지나간다」를 작은 제목으로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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