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독도서관 안에 있는 서울교육박물관에서 <60∼70년대 학교와 아이들>이라는 제목으로 김완기 사진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전시장 벽에 소개된 작가의 약력을 보니 작가는 초등학교 교사와 교육청 등에서 근무한 교육자이자 저명한 사진가이기도 하다. 전시된 사진들에는 작가가 교사로 근무하던 ‘1960∼70년대의 학교와 아이들을 소재로 한 생생한 생활 모습’이 담겨 있다. 교실 안 풍경을 비롯해 운동회와 졸업식 광경, 교생 실습 현장, 민방위 훈련, 스승의 날 기념식 등 학교 안에서의 모습과 등 · 하교 길, 소풍, 학교 앞 주변과 동네 골목길 풍경 등 반세기도 더 전의 모습이 아득한 옛날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이전 브런치에 쓴 글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나는 4 · 19가 나던 해 여름 경상북도의 한 작은 도시의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에서 서울의 ‘명문 초등학교’로 전학을 왔다. 3학년 1학기를 마친 때였다. 나 혼자만의 단신 ‘상경’이었다. 그해 대학에 입학한 막내 삼촌의 권유였던 것 같은데 거처는 막내 삼촌의 자취방이었다. 삼촌은 친구와 함께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그 좁은 방에 나까지 끼어들게 된 것이다(사실 나는 그 자취방에 대한 기억이나 삼촌 친구에 대한 기억도 전혀 없다. 다만 집이 꽤 지대가 높은 언덕에 있었던 것 같은데 학교까지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던 것 같다). 고향에서의 초등학교 시절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지만 남아 있는 사진으로 보건대 아버지가 무척이나 ‘정성 들여’ 나를 키운 것 같다. 옷차림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학교 선생님에게도 귀여움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학예회 같은 행사에서도 주인공을 했고 담임 여선생의 (구식) 결혼식에는 학생 대표로 갔던 기억이 있다. 결혼식 장소가 강 건너 마을이었는데 나룻배를 타고 낙동강을 건너갔었다. 그 무렵 시골 학교에서는 보기 드물던 『새소년』 같은 소년잡지도 가지고 있어서 아이들이 부러워했다(막내 삼촌이 사서 보내주었다).
3학년 2학기 전학 첫날의 기억은 비교적 또렷하다. 너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교실 분위기는 그때까지 내가 다녔던 학교와는 너무 달랐다. 우선 아이들의 차림새가 그랬다. 소년잡지의 화보 사진에 나오던 그런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담임선생님이 나를 소개한 후 간단한 인사말을 했는데 아이들이 모두 ‘와’하고 웃었다. 투박한 사투리 때문이었다. 아이들의 웃음거리가 되기 싫어 그 후로 한동안 아이들 앞에서 말을 꺼내기를 꺼렸다. 내가 전학한 학교는 ‘명문 초등학교’였다. 중학 입시 경쟁이 치열하던 시절이었다. 우리 학교에는 부잣집 아이들이 많았다. 첫날 음악 시간이었는데 한 여자아이가 바이올린 연주를 했다. 부반장이라고 했다. 그때 나는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실물)를 처음 보았고 물론 눈앞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음악보다도 그 아이의 모습이 강렬했다. 숏커트 머리로 얼굴이 ‘분결처럼’ 고왔다. ‘차가운 듯하면서도 지적이고 이목구비가 반듯한’ 여자아이였던 것 같다(세월이 지나면서 과장되고 미화된 모습일 것이다). 전형적인 부잣집 아이의 모습이었다. 그 후로 나는 그런 유형의 여자(차가운 인상에 지적이며 귀티 나는 용모)를 늘 ‘이상형의 여자’로 여겼다. 점심시간이 다가오면 보온병과 도시락을 가져온 가사도우미(그때는 식모라고 불렀다)들이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삼촌은 정성 들여 도시락을 싸주었다. 시골에서 아버지가 오가며 밑반찬을 날라주기도 했다(아버지는 철도 공무원이어서 기차 운임이 들지 않았다). 그래봐야 부잣집 아이들 도시락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초라했다. 아무리 명문 초등학교라지만 부잣집 아이들만 있었겠는가. 반쯤은 나 같은 아이들이었다. 자기 도시락이 창피해서 학교 뒷산에서 먹고 오는 아이들도 여럿이었다. 나도 그런 아이들 부류에 속했다. 수업이 끝날 때쯤이면 운동장에 자가용 여러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에 벌써 자가용 가진 집 아이가 꽤 많았다. 가끔 자가용에 못을 긁고 도망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어느 날의 미술 시간이 생각난다. 우리 학교는 창경궁(당시는 창경원)과 멀지 않아서 그곳까지 걸어가서 야외 미술 수업을 하는 때가 있었다. 당시는 화판을 가진 아이가 몇 되지 않았다. 화판이라야 골판지로 만든 (지금 생각하면 조잡한) 울긋불긋한 디자인의 것으로 목에 걸 수 있도록 끈이 달려 있었다. 우리 반에 장관 아들이라고 알려진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는 화판을 가지고 있었다. 창경원으로 야외 미술 수업을 하러 갈 때 그 아이는 빈손으로 가고 화판과 물감은 다른 아이들이 가지고 갔다. 그 아이가 자기 것을 맡겨서가 아니라 다른 아이들이 서로 그 화판을 목에 걸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경쟁이 치열했다. 화판을 걸게 된 아이는 무슨 벼슬이나 얻은 것처럼 의기양양했다. 나도 그 화판을 한번 목에 걸고 싶었지만 그런 기회가 오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 보면 참 서글픈 기억이다. 학교 앞에는 노점상들이 있었는데 해삼과 멍게를 사 먹은 기억이 난다. 손수레에 좌판을 깔고 그 위에 해삼과 멍게들을 늘어놓았다. 주인은 수시로 좌판에 물을 뿌렸다. 옷핀으로 그 멍게나 해삼을 초장에 찍어 먹었다. 용수철 달린 막대 손잡이를 당겼다 놓으면 가로 세로로 여러 개의 못들이 박혀 있는 작은 상자 안으로 쇠구슬이 튀어 올랐다가 내려오면서 못에 걸리면 거기 적힌 상품을 주던 놀이도 있었다. ‘사다리 타기’ 같은 게임이었다. 양은인지 생철인지 계란 모양의 용기 속에 얼린 ‘아이스케키’(서양의 오크 통 같은 상자 안에 들어 있었는데 통을 빙빙 돌렸다가 멈춘 뒤 꺼내서 용기를 벗기면 나오는 것이다)는 짭짤하면서 달콤한 것이 맛이 기가 막혔다. 입체 삼각형 모양의 투명한 비닐 용기 안에 든 음료(조악한 오렌지 주스 같은)가 있었는데 비닐에 바늘 구멍을 내고 물총 싸움을 하던 즐거운 기억도 있다.
그 시절 명문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거의 다 과외수업을 했다. 부유한 집 아이는 가정교사를 두고 그게 안 되면 몇 명이 모여 그룹으로 과외수업을 받았다. 숙식을 하며 수업을 받기도 했다. 나도 5학년 때부터 명문대 4학년 학생 집에서 우리 반 아이 세 명과 함께 숙식하며 수업을 받았다. 그러던 것이 6학년 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급격히 가정 사정이 어려워져 두 달 치 과외비가 밀리자 과외 선생 집에서 쫓겨났다. 덮고 자던 이불을 담보로 놔두었다(그 낡은 이불이 무슨 담보 가치가 있었는지). 그때 같이 수업받던 아이들(졸업 후로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이름과 모습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과외를 하지 못하면서 수업이 끝나면 가끔 학교 근처 만화 가게를 드나들었다. 손의성, 박기당, 산호, 김종래 같은 만화가들의 만화는 지금도 눈에 선하다. 구질구질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훈훈하고 정겨운 모습의 옛날 초등학교 사진들을 보면서 나는 왜 이런 쓸쓸한 기억만을 떠올리게 되는 것일까. 제목을 ‘학교 종이 땡땡땡’이라고 적었는데, 시골 초등학교 때는 종을 쳤던 것이 분명한데 전학 온 서울 학교에서도 그랬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 땡땡땡 울리는 종소리는 얼마나 낭만적인가!
<표지 사진은 전신주 공사 현장을 구경하는 아이들을 찍은 김완기 선생의 작품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