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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 선거에서 떨어졌어

by 나날


우리 집 둘째는 앞에 나서는 걸 싫어한다. 쑥스럽고 부담스럽고, 심지어 두렵다고 한다. 그런데 어제 누나가 반장선거에 나가서 발표를 했다고 하니, 동생은 두 팔을 있는 대로 활짝 펼치며 "엄마, 앞에 나가서 발표를 하려면, 용기가 이--------------만큼 필요해."라고 말했다.


하지만, 용기를 그렇게 많이 냈던 누나는 2표 차이로 선거에서 떨어졌다. 뱃속에서부터 용기를 가지고 태어나는 기질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집은 '선거'쯤 나가려면, 우주의 에너지를 최대한 끌어모을 만큼 아이가 애를 써야 한다. 용기를 냈을 때, 결과가 좋으면 얼마나 좋을까..


"엄마, 나는 용기를 내면, 세상이 나를 도와줄 거라고 믿었어. 나는 지금 자꾸 자고만 싶고, 숨고만 싶고, 숨이 막혀. 세상이 정말 미워.." 생애 처음으로 도전한 반장선거에서 떨어진 날 밤에 첫째는 이렇게 말하며, 마음이 98퍼센트 썩었다고 했다. 그런 아이에게 '그래도 용기를 낸 너는 정말 대단해!'라는 문장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이 말은 아이의 말 문을 더 닫게만 할 뿐이었다.


사실 '그래도 용기를 낸 너는 정말 대단해!'라는 문장은 아이의 좌절이나 슬픔과는 온도차가 있다. 그 내용이 사실일지라도, 이 문장은 슬퍼하고 있는 아이의 마음보다는 어서 빨리 기분이 좋아지길 바라는 엄마의 마음과 가깝긴 하다. 슬픔의 늪에 빠져있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어서, 아이가 그 손을 잡고 늪을 빠져나오길 바라는 엄마의 마음말이다. 그런데 슬픈 아이에게는 충분히 슬플 시간이 필요한지, 첫째는 내가 내민 손을 잡고 싶어 하지 않았다. 오히려 슬픈 자신의 곁에 내가 다가와 함께 앉아있길 바랐다. 자기 스스로 그것을 털고 일어날 때까지 말이다.


솔직히 아이가 속상하면, 나도 같이 속상하다. 그도 그럴 것이, 같이 늪 속에 빠져있는 게 쉬울 리가 없다. 그러니 엄마인 나는 아이가 얼른 슬픔을 털고 일어나길 바라게 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우리는 같이 늪에 빠져있게 되는 걸까? 아이는 분명 '좌절'이라는 늪에 빠져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좌절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의 좌절'은 아니다. '아이의 슬픔과 함께 하는 것' 자체가 나에게 '늪'이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슬픈 아이 곁에 머무는 것이 나에게 '늪'일 이유는 없었다.


생각이 이렇게 정리가 되자, 내가 아이에게 진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좀 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슬픔 속에 있는 아이가 혼자라고 느끼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아이에게 잘 전달해 줄 문장은 무엇일지 고민해 보았고, 답은 '내가 슬플 때 듣고 싶은 말'에 있겠다 싶었다. 마음과 마음이 만나기엔, 마음에서 나온 문장이 제격이 곤 하니까..


"우리 딸, 많이 속상하겠다.. 엄마도 예전에 선거에서 떨어져서 엄청 속상했어... "

이 말은 아이가 거부하지 않았다. 아이는 고요했고, 잠잠했다. 엄마여서 느껴지는 것인데, 이 순간 바닥만 바라보고 있던 아이의 마음속 얼굴이 고개를 드는 것 같았다. 그럼 된 거다. 아이는 그렇게, 자신의 마음과 만나며 좌절을 소화하는 연습을 하면 되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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