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1. 시작할 것인가, 말 것인가
제안요청서를 받았다고 해서, 모든 경우가 제안서 제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제안요청서를 검토하고, 질문을 정리하고, 내부 논의를 거친 끝에 아무것도 제출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경우도 있다. 이 선택은 대개 조용하게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만큼 가볍지 않은, 꽤 신중한 판단의 결과다.
겉으로 보면 제안하지 않겠다는 결정은 기회를 내려놓는 선택처럼 보일 수 있다. 고객사에서 직접 요청이 왔거나, 이미 우리를 알고 제안을 기대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 결정은 더 어렵게 느껴진다. 그러나 실무를 거듭할수록 분명해진다. 제안하지 않는 선택은 회피가 아니라 판단이며, 오히려 제안하지 않기로 한 결정이 장기적으로는 더 나은 선택이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기획자가 프로젝트 초기에 고민하는 질문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이 프로젝트는 정해진 기준과 방식으로 굴러갈 수 있는가, 아니면 누군가가 계속 붙잡고 있어야만 유지되는가.
요구사항이 열려 있고, 의사결정 기준이 문서로 정리되어 있지 않으며, 일정은 이미 결과처럼 정해져 있고, 그 모든 불확실성을 “진행하면서 맞추자”는 말로 넘기고 있다면 기획자는 언젠가 같은 상황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왜 일정이 늘어났는가”
“왜 처음과 다른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가”
“왜 이 범위는 당연히 포함된 것으로 이해되었는가”
이 질문들은 대부분 프로젝트가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문서 안에 조용히 적혀 있었다.
제안하지 않기로 한 결정에 대하여
예전에 고객사로부터 제안요청서를 직접 받은 적이 있다. 이미 유사한 프로젝트를 수행한 경험이 있었고, 그 레퍼런스를 알고 있던 고객사에서 제안서 작성을 직접 요청해 온 상황이었다. 내부에서도 비교적 긍정적으로 검토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제안요청서를 자세히 읽어 내려가면서 몇 가지 지점에서 계속 질문이 생겼다. 구축 범위가 명확하지 않았고, 요구사항 역시 표현이 모호한 부분이 많았다. 무엇이 반드시 구현되어야 하는지, 어디까지가 기본 범위인지가 문서만으로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일정은 더 고민스러웠다. 제요청서에 적힌 일정은 개발과 검수, 그리고 그 사이의 조율 과정을 고려했을 때 현실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워 보였다. 여기에 프로젝트 참여자 전원 상주를 전제로 한 진행 방식까지 함께 제시되어 있었다. 형식만 놓고 보면 불가능한 프로젝트는 아니었다. 사람을 더 투입하고, 일정을 압축하고, 상주를 통해 현장에서 계속 조율한다면 어떻게든 오픈은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내부에서도 “진행하면서 맞춰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나왔다.
하지만 유사한 프로젝트를 여러 차례 경험해 본 입장에서, 이 요구사항을 이 일정 안에서 안정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기술이나 역량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 프로젝트는 시작하는 순간부터 사람의 시간과 책임으로 버텨야 하는 구조에 가까워 보였다. 요구사항은 계속 해석되어야 했고, 결정은 현장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았으며, 일정의 부담은 상주 인력에게 쌓여갈 것이 분명했다.
결국 내부적으로 다시 논의를 거쳤고, 해당 프로젝트에는 제안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 선택은 할 수 없어서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 이 방식으로 시작했을 때 누군가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우게 될 가능성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제안 작업을 하지 않기로 한 결정은 도망치는 선택이 아니다. 오히려 이후에 발생할 문제를 미리 인정하고, 팀이 감당할 수 있는 조건을 분명히 선을 긋는 선택에 가깝다.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기획자는 항상 그 한가운데에 서게 된다. 일정이 흔들릴 때, 요구사항이 바뀔 때, 설명이 필요할 때 가장 먼저 불려가는 사람도 기획자다. 그래서 처음부터 구조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프로젝트를 알면서도 시작한다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미래의 자신에게 돌아오게 된다. 물러나는 선택은 기획자로서의 역할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는지를 분명히 하는 선택이다. 모든 프로젝트를 잡는 기획자보다, 어떤 프로젝트를 시작하지 않을지를 설명할 수 있는 기획자가 결국 더 오래 일할 수 있다.
이 장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결국 하나다. 제안하지 않기로 한 프로젝트는 실패가 아니라 판단의 결과다. 그리고 그 판단은 경험이 쌓일수록 더 빠르고, 더 조용해진다. 기획자는 무엇을 만들지 고민하는 사람이지만, 때로는 무엇을 만들지 않기로 결정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 선택 역시 기획의 일부다.
다음 장에서는 제안요청서를 그대로 옮긴 제안서가 왜 위험한지,
그리고 제안서에 반드시 **‘포함/제외/협의 항목’**이 들어가야 하는 이유를 다뤄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