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사는 법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여자와 남자, 장애인과 비장애인, 성소수자 사이의 경계가 짙어지고 있다. 이를 반증하듯, 성별·장애·학력·성적지향성·인종·언어 등을 이유로 '차별하지 말자'는 목소리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 또한 모든 형태의 차별을 금지하는 '차별금지법'의 발현 역시 요원한 상태로 머물러 있다.
'서로 존중하며 사는 일'이 경계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외려 경계를 더욱 뾰족하게 세우는 시대가 돼버린 오늘, 장애여성공감 극단 춤추는허리가 아주 특별한 작업을 무대에 올렸다. '기어이 누군가를 차별하는 것도, 끝내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것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작품 '연극연습4. 관객 연습-사람이 하는 일'(이하 연극연습)이었다.
지난 19일 막을 내린 연극연습은 서슬 퍼런 경계의 존재와 무너짐을 목도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했다. 출연진 대부분은 장애를 가진 배우였다. 그들은 뇌병변·언어장애, 지체 장애, 발달장애 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들은 자신 혹은 다른 장애인이 일상에서 겪을 만한 네 가지 에피소드를 연기했다.
홀로 지하철 타는 연습을 하는 발달 장애인의 상황, 출·퇴근길 대중교통 속에서 장애인 휠체어 자리를 차지한 비장애인의 모습,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화장실을 급하게 찾는 경우, 시설에서 독립하려고 하는 성소수자·장애인과 복지시설 관계자의 모습 등이었다.
작품은 50%만 완성된 반쪽이었다. 나머지 반쪽은 공연에 참석한 관객의 몫이었다. 관객은 장애인이 어려움을 겪는 에피소드에 언제든 끼어들어, 상황을 바꾸고 개선할 수 있는 적극적인 참여자로 역할할 수 있었다. 성소수자와 장애인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황 속에서 관객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첫 번째 에피소드가 지나가고 두 번째 에피소드 역시 끝나가고 있었다. 대중교통 속 비장애인은 장애인 휠체어 석을 차지했고, 장애인의 몸과 같은 휠체어에 기댔다. 무엇보다 그는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았다. 장내는 점점 시끄러워졌다.
이것이 하나의 연극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시민(관객)도 끼어들지 못했다.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누군가 먼저 나설 거야' '괜히 나섰다가 상황이 더 복잡해질 수도 있어' '정말 돕고 싶은데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모르겠어' '제발 누가 먼저 좀 나서주세요!' 등 다양한 의미의 경계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차별금지를 위한 첫걸음
첫 번째 용기는 n번째 용기를 낳는다
뇌병변·언어장애가 있는 서지원 배우(수진이 역할)는 휠체어에서 홀로 힘겹게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질 무렵, 한 관객이 용기를 냈다. "멈춰!" 하는 소리와 함께 참여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첫 번째 관객은 서툴지만 수진이의 입장을 일반 시민에게 설명했다.
놀라운 일은 그 이후로 이뤄졌다. 첫 번째 시민 이후, 여러 시민이 "멈춰!'를 외치며 성소수자·장애인과 함께 행동하겠다고 나섰다. 혼자 용기가 없어서 못 했던 사람도 다른 사람과 함께 상황을 개선해 보겠다고 나섰다. 그렇게 굳게 닫힌 장애인 화장실 문을 열려고 애쓴 시민, 영화가 시설에서 자립적으로 살 수 있도록 관계자를 설득한 시민, 변기에 앉을 수 있도록 도운 시민들이 등장했다. 20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총 6명의 시민이 나왔다.
시민들의 모습에선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것이 있었다. 이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잘 몰랐지만, 고민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은 장애인 배우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연습'해봄으로써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었다.
"출근길 대중교통 속에서 휠체어를 탄 장애인분들을 많이 보지 못해서 사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어요."
"어떻게 하면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장애인 분이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휠체어에 탄 장애인을 화장실에 데려다줄 때) 그분이 잘 알려주셔서 그대로만 하면 됐어요."
마음은 마음으로 전달된다. 시민들의 행동에 장애 배우들도 응답했다. 장애 배우들은 시민들이 충분히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행동해 준 것만으로도 힘이 났다고 소감을 전했다.
서지원 배우는 "시민분들이 함께 나서서 이야기해 줄 때 정말 힘이 났어요"라며 "끝까지 충분히 들어주시고 같이 해주셔서 좋았어요"라고 소감을 전했다.
그는 뇌병변·언어 장애가 있는 장애인이 화장실을 이용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 장면을 연기한 후, 화장실 성별에 대한 의견도 밝혔다. 그는 "중요한 것은 화장실이 여자와 남자로만 정해져 있다는 점"이라며 "저도 가끔 화장실 갈 때 여성인지 남성인지 질문을 받기도 해요. 다양한 화장실이 없어서 성소수자라면 어려움이 있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발달장애를 가진 조화영 배우는 시설에서 독립하려고 하는 영화의 에피소드를 연기했다. 그는 "시설에 아직 제 물건이 있어요. 그런 상황에서 함께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힘이 났어요"라고 고마워했다.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봤을 때 '도와줘야겠다'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은 추상적이고 막연하다.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지, 어떤 게 도움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더 나아가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물론 그 행동 곁엔 차별금지법 제정도 있다.
연극연습은 그런 연습을 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줬다. 그것은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연습하는 시간이었다. 동시에 함께 존중하며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나는 시간이었다. 연습을 끝낸 관객에게 이진희 연출가는 말했다. "오늘 무대에서 했던 연습을 잊지 말고 공연장 바깥으로 나가셔도 평등을 위한 행동을 계속해주세요"
공연 포스터에 게재된 상연 시간은 20분+a다. 20분은 장애 배우들이 연기하는 시간이다. +a는 오롯이 관객 몫이다. 관객의 참여도에 따라 시간은 확장된다. 20이 한국 사회의 차별금지와 평등 수치라면, +a는 시민의 역할에 따라서 확장될 수도 정체될 수도 있다.
한편, 연극연습은 연출, 희곡, 연기 등 연극을 이루는 요소에 변수를 인풋하여, 연극의 확장과 새로운 연극의 발생을 시도하는 연극연습 프로젝트(고주영 기획/제작)의 일환으로 기획·제작됐다. 앞서 '연극연습1. 연출 연습 세 마리 곰', '연극연습2. 연기 연습 배우는 사람', '연극연습3. 극작 연습 물고기로 죽기' 등이 관객을 만났다.
※해당 글은 민중의소리에 게재한 저의 기자수첩을 올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