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 때야말로 소중한 사람이 누군지 발견하기 좋은 시간이다. 서러운 밤길을 달려 도착한 친구네 집은 참 포근했다. 그 친구나 나나 둘 다 자발적으로 '꿈 좇는 가난한 삼십 대'를 택한 처지다. 우리가 만나서 하는 일은 참 별 거 없다. 직접 요리한 저녁에 와인 곁들여 죽치고 앉아 드라마나 영화 때리기. 매번 이게 다다. 그 별 거 없는 시간이 신기할 정도로 힘이 된다. 맛있는 음식과 술+편한 친구+재밌는 볼거리. 이 세 요소 중 하나만 빠져도 그만큼 좋지는 않을 거다. 그날 우리가 선택한 볼거리는 '이번 생은 처음이라'였다. 제목만 얼핏 들어본 드라마였다. 별 기대 없이 봤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대사들이 꽤 있었다.
특히 여주인공 지호의 처지에 절절히 공감했다. 괜찮은 대학 나와서 세상 물정 모른 채 귀 닫고 하고 싶은 거 좇아 살다 보니 서른. 결국 가진 것 하나 없는 서른. 제 집 달고 다니는 달팽이가 부러운 서른. 지호는 말한다. '이 길을 가려고 선택했을 때 어두운 터널을 걷는 일일 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 터널이 이렇게 어두울 줄이야, 이렇게 끝없을 줄이야.'
서른이란 말을 입에 달고 신세한탄을 하는 지호에게 세희가 말한다. 신피질의 재앙에 대하여. 대뇌에 신피질이 발달한 인간만이 시간이라는 개념으로 과거, 현재, 미래를 나눠 이 세계를 인식한단다. 신피질이 없는 고양이는 매일 똑같은 사료를 먹고 똑같은 공간에 머물러도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들에겐 그저 현재만 존재할 뿐이다. 스물아홉이건 서른이건 고양이에겐 그저 한치 다를 바 없는 현재의 반복일 뿐인데. 도대체 서른이 뭐라고 우리는 이렇게 서른에 연연하는 걸까. 왜 서른이면 가진 게 없어선 안 되고 이룬 게 없어서도 안 될 것만 같은 불안에 시달리는 걸까.
신피질이 발달한 게 재앙이라고 해서 우리가 고양이처럼 돼야 한다는 게 아니다. 그러한 존재 방식, 사고방식이 있음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사뭇 위로를 얻을 수 있다는 거다. 괜찮냐, 힘내라는 말보다 '신피질의 재앙' 이야기가 더 위로가 되는 까닭은 우리의 괴로움이 사실 세계 자체보다는 세계를 인식하는 나 자신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힘든 생각을 회피하고 덮어버리는 게 아니라 마주하고 다시 보게 하기 때문이다.
친구네 집에서 이틀간 저녁 시간은 오로지 밥 해 먹고 드라마 보는 데 다 썼다. 성취 없는 과거도 끝이 안 보이는 터널 같은 미래도 아닌 그저 그 순간에 머물렀다. 앞뒤 없이 널브러져 보낸 현재 속에서 다시 살아갈 에너지를 충전하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