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일지, 나의 아저씨, 또 오해영
대문사진은 그냥 내가 좋아하는 이선균 맥주 짤... 브런치에 글을 쓰면 쓸수록 느끼는 건데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지면 좋은 글이 될 가능성은 적어진다. 글의 가독성은 떨어지고 '그래서 하고자 하는 말이 뭔데?'라는 질문이 따라오게 된다. 지금 내 글이 그렇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져 글을 잔뜩 써놓고 조금이라도 필요 없다 싶으면 문단 단위로 지워야 하는 게 글쓴이로서는 가장 마음이 아프다. 아무튼 조금이라도 드라마에 관심이 생긴다면 직접 보시고 내 어질러진 감정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같이 느껴주시면 좋겠다. 근데 브런치 발행 키워드 대체 왜이럽니까..? 어떤 드라마 하나 제대로 키워드를 입력하지 못하고 '오해영' '해방일지' '아저씨'로 발행해야 한다니.
박해영 작가님은 감사하게도 항상 나의 상황에 걸맞은 작품을 떡 하니 내어주신다. 물론, 드라마 속 수많은 상황들 중 나에 상황에 맞는 인물에 감정 이입을 하는 것이 크다. 그래도 종종 신기할 때가 있다. <또 오해영> 방영 시기에는 오해영에, <나의 아저씨> 방영 시기에는 박동훈에 감정을 이입할 수 있었다. <나의 해방일지> 를 보면서는 어느 날은 내가 염미정 같다, 어느 날은 염창희 같다가, 때때로는 구씨 스럽기도 했다.
같은 작가님이 써서 그런지 드라마에서 공통적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메시지가 있다. 각자의 불행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서로를 위로하고 결국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된다. '흑역사(비단 쪽팔림을 넘어서서 말 그대로 어두운 역사)'를 생산한 인물들이 '흑역사를 기꺼이 잊어줄 수 있는, 잊게 해 주는' 사람을 만나 어둠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빛으로 뚫고 나올 수 있게 된다. '그 사람'이 어둠 속에서 팔을 잡고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의 의지로 뚫고 나온다고 볼 수 있다. 모든 등장인물들에게 잊고 싶은 아픈 과거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서로 응원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내가 내 과거를 잊고 싶어 하는 만큼
다른 사람의 과거도 잊어줘야 하는 게 인간 아닙니까?
-나의 아저씨, 박동훈
옛날 일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모른 척해줄게. 너에 대해서 무슨 얘기를 들어도 모른 척해줄게.
-나의 아저씨, 박동훈
우리 서로 왜 불행한지 얘기해볼래요? 서로 얘기하고 완전히 잊어주기. 전 결혼 전날 차였어요. 와, 처음 말해본다. 한 번은 말하고 싶었어요. 다시 볼 사이가 아닌 사람한테. 이제 우리 다시 보지 마요.
-또 오해영, 오해영
어떻게든 그냥 살아요.
피투성이라도 그냥 살아요.
-또 오해영, 박도경
잘 돼서 날아갈 것 같으면 기쁘게 날려 보내 줄 거야. 바닥을 긴다고 해도 쪽팔려하지 않을 거야. 세상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해도 인간 대 인간으로 응원만 할 거야. 부모한테도 그런 응원 못 받고 컸어 우리.
-나의 해방일지, 염미정
'잊어주자' 이것이야 말로 나는 박애주의적인 idea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그 사람의 과거의 전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사람 자체로 알아가는 것.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을 척척(척척... 이라기보다 차차?) 해내는 등장인물들이 어쩐지 부럽다.
이제 아침에 일어나서 맨 정신일 때 우르르 찾아오는 인간들 중에 형도 있는데...
형. 환대할게.
-나의 해방일지, 구자경
그래, 유난 떨지 말아야지. 누구 말대로 77억 인구 중 1원짜리 인생이 뭐 그렇게 무거울 필요가 있나 싶다. 다 자신만의 인생이 있고 자신만의 흑역사가 있다. 그래도 지구는 돌아간다. 나에게 개새끼가 누군가에겐 착한 딸, 좋은 친구, 귀한 아들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고 싶었던 나도 누군가에겐 개새끼일 것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지 말고 너른 마음으로 잊어주고 잊혀지며 살아가 보자.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상처를 준 상대에게 상처를 조금이나마 돌려준다면 그 과정에서 속이 후련하거나 상처가 아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찝찝하고, 희한한 상처가 하나 더 새겨진다. 그러니 차라리 환대해보자. 실제로도 나는 원인 제공자의 조력(사과..?) 없이 스스로가 나를 치유하고 내 상황을 괜찮게 바꿔나가려 노력하고 있다. 내가 정말 괜찮아지면, 그때 여유롭게 환대할게. 내 인생의 아픈 역사가 아니라 쪽팔린 역사로 덮어줄게. 그리고 우는 대신 웃어줄게. 기대해라. 나에게는 풍자와 해학의 피가 흐른다. (어디선가 독기가 느껴진다)
재미는 쪽팔림에서 나오는 거야.
인간의 역사는 쪽팔림의 역사야.
-또 오해영, 허지야
그냥 쪽팔리면 쪽팔린 대로 사는 거지.
인간사가 원래 쪽팔림의 역사야.
태어나는 순간부터 쪽팔려.
빨가벗고 태어나.
-나의 해방일지, 염창희
드라마 속에서는 상대방의 과거를 잊어줄 수 있는 용기가 있기에 무조건적인 사랑 또한 가능한가 보다. 오해영은 오해와 복수로 본인에게 큰 상처를 준 박도경과 사랑에 빠진다. 염미정은 구씨를 추앙하기로 결심한 이후로 정말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 상관없어하는 모습을 보인다. 어쩌면 판타지와 같은 무조건적인 사랑.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주는 사랑. 살면서 꼭 한 번쯤은 해보고 싶다고 마음(만) 먹어보는 그런 사랑.
내가 좋아하는 것 같은 사람들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다 불편한 구석이 있어요. 사람들하고 수더분하게 잘 지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진짜로 좋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혹시 그게 내가 점점 조용히 지쳐가는 이유 아닐까, 늘 혼자라는 느낌에 시달리고 버려지는 느낌에 시달리는 이유 아닐까.
상대방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거에 나도 덩달아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고, 그냥 쭉 좋아해 보려고요.
-나의 해방일지, 염미정
자꾸 답을 기다리게 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지만, 두고 봐라. 나도 이제 톡 안 한다. 그런 보복은 안 해요. 남자랑 사귀면서 조용한 응징과 보복 얼마나 많이 했게요. 당신의 애정도를 재지 않아도 돼서 너무 좋아요. 그냥 추앙만 하면 되니까.
-나의 해방일지, 염미정
무조건 적인 사랑이 정신적인 지지를 제공하는 것이라면, 불도저 같은 직진 또한 그들의 사랑 '시작' 법.
근데요 애타는 게 좋은 거예요? 왜 좋아요, 애가 타는데? 익는 것도 아니고 타는데? 마음이 막. 애타고 간질간질하고 그거 다 불쾌 아닌가요? 유쾌가 아니라.
-나의 해방일지, 염기정
생각해보면 다 줄 거야 하고 원 없이 사랑한 적이 한 번도 없다. 항상 재고, 마음 졸이고, 나만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닌가 걱정하고. 이젠 그런 짓 하지 말자. 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 만나면 발로 채일 때까지 사랑하자. 꺼지라는 말에 겁먹어서 눈물 뚝뚝 흘리며 조용히 돌아서는 그런 바보 같은 짓은 다시는 하지 말자.
-또 오해영, 오해영
염미정은 어쩌면 진화한 오해영 같다. 물론 오해영의 상황이 훨씬 더 복잡하고 힘들었던 것을 참작해주길 바란다.
생각해보면, 내 인생의 개새끼들도 시작점은 다 그런 눈빛. '넌 부족해'라고 말하는 것 같은 눈빛.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발견하고자 달려들었다가 자신의 볼품없을 만 확인하고 돌아서는 반복적인 관계. 어디서 답을 찾아야 될까?
-나의 해방일지, 염미정
나는 쪽팔리지 않습니다.
사랑을 쪽팔려하지 않습니다.
더 많이 사랑하는 건 자랑스러운 겁니다.
나는 자랑스럽습니다.
-또 오해영, 오해영
나는 큰 사람이다.
사랑을 갈구하지 않는다.
-나의 해방일지, 염미정
너한테 그렇게 쉬웠던 나를.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그렇게 쉬웠던 나를. 어떻게 이렇게 쉽게 버리니? 나는 네가 아주아주 불행했으면 좋겠어. 나는 이대로 너를 생각하다가 화병으로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그래서 네가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으면 좋겠어
-또 오해영, 오해영
나를 떠난 모든 남자들이 불행하길 바랐어. 내가 하찮은 인간인걸 확인한 인간들은 지구 상에서 다 사라져 버려야 하는 것처럼 죽어 없어지길 바랐어. 당신이 감기 한번 걸리지 않길 바랄 거야. 숙취로 고생하는 날이 하루도 없길 바랄 거야.
-나의 해방일지, 염미정
인간관계에 있어서 (현실에서 적용하기 많이 어려운) ideal 하고 fantasy적인 요소들을 다루기도 하지만, 캐릭터들은 기본적으로 지극히 평범한 인간관계를 기반을 두고 살아가는 일반적인 사람들이다. 그래서 현실적이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대목 또한 많다. 인간관계에 정답이 있을까.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mbti로 사람을 나눠도 16가지가 넘어가고 그 마저도 퍼센티지로 세세하게 분류하면 같은 mbti를 가진 사람도 결코 같지 않은 게 인간이다. 누군가는 싫어도 티 내지 않는 것이 사회를 살아가는 방법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싫어하는 사람을 칼 같이 끊어내고 거리를 두는 것이 살아가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누군가는 내게 소중한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에게 거리를 두게 되고 누군가는 그 사람들과도 두루두루 지내는 것이 원만한 인간관계라고 생각한다.
넌 걔가 왜 싫은데?
-나의 아저씨, 박동훈
아저씨가 싫어하니까.
-나의 아저씨, 이지안
네가 싫어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다 같이 싫어해줘야 되는 거야? 무슨 유치한 논리야.
-또 오해영, 박도경
나는 그쪽이 싫어하는 사람, 같이 싫어해줄 거야. 엄청 증오해줄 거야.
-또 오해영, 오해영
사회생활 만렙 찍은 박동훈은 특히 나에게는 가장 현실적인 인물 같다. 물론 나보다 생각이 깊은 어른의 모습이긴 하지만 가장 공감되는 생각 회로를 가지고 있었다. 삶을 살아오면서 그리고 회사 생활하면서 겪어볼 수밖에 없는 감정들. 관계들. 그 모든 신물 나는 일들을 박동훈 아저씨는 임원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이 겪었을까. 모든 것을 통달한 어른 그 자체. 그래서 그의 인생의 반토막(?) 밖에 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공감 가는 인물이었다. 닮고 싶은 어른 박동훈. 실은 <나의 해방일지>가 방영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의 인생 드라마는 <나의 아저씨>였다는 tmi를 조심스레 밝혀본다.
인간 다 뒤에서 욕해 친하다고 뭐 욕 안 하는 줄 알아? 인간이 그렇게 한 겹이야? 나도 뒤에서 그렇게 욕해 욕하면 욕하는 거지 뭐 어쩌라고 일러 쪽팔리게.
-나의 아저씨, 박동훈
누가 욕하는 거 들으면 그 사람한테 전달하지 마 그냥 모른척해. 너희들 사이에선 다 말해주는 게 우정 일지 몰라도 어른들은 안 그래. 모른척하는 게 의리고 예의야. 괜히 말해주고 그러면 그 사람이 널 피해. 내가 상처받은 거 아는 사람 불편해, 보기 싫어.
-나의 아저씨, 박동훈
어떻게 그 새끼랑 그럴 수 있어. 너 왜 그랬어. 너 왜 그랬니. 너 그 새끼랑 바람피운 순간 너 나한테 사망선고 내린 거야. 박동훈 넌 이런 대접받아도 싼 인간이라고. 가치 없는 인간이라고. 그냥 죽어버리라고...
-나의 아저씨, 박동훈
"(동훈) 슬리퍼 어쨌어. 내가 너한테 슬리퍼 한 짝도 받지 못할 사람이야?"
"(지안) 버렸어요. 그냥 뒀으면 신었고요? 내일 출근하면 사람들 많은 데서 나 자르겠다고 얘기해요."
안 짤라! 너 자르고 동네에서 우연히 만나면 아는 척 안 하고 지나갈 생각 하면 벌써부터 소화 안돼. 너 말고도 내 인생에 껄끄럽고 불편한 인간들 널렸어. 그딴 인간 더는 못 만들어. 그런 인간들 견디며 사는 내가 불쌍해서 더는 못 만들어. 그리고 학교 때 아무 사이 아니었던 애도 어쩌다 걔네 부모님 만나서 인사하고 몇 마디 나누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사이 아니게 돼. 난 그래. 나 니네 할머니 장례식에 갈 거고, 너 우리 엄마 장례식에 와. 그니까 털어. 골부리지 말고 털어. 나도 너한테 앙금 하나 없이 할 테니까 너도 그렇게 해. 사람들한테 좀 친절하게 하고. 인간이 인간한테 친절한 건 기본 아니냐? 뭐 잘났다고 여러 사람 불편하게 퉁퉁거려. 나 너 계약기간 다 채우고 나가는 거 볼 거고, 딴 데서도 일 잘한다는 소리 들을 거야. 그래서 10년 후든 20년 후든 길에서 너 우연히 만나면 반갑게 아는 척할 거야. 그렇게 하자. 부탁이다. 그렇게 하자. 슬리퍼 다시 사와.
-나의 아저씨, 박동훈
박동훈 아저씨도 부디 환대하세요...그런 지겨운 불편한 인간들... 환대합시다.
드라마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결국 '행복하자'이다. 몇몇 사람들은 '꿈이 뭐야?'라는 질문에 '행복'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게 나다. 욕심이 많나? 다 가지고 싶었던 적 없다. 다 가져서 행복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이 드라마 주인공들 또한 다 가져서 행복에 도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욕심을 덜어내야 행복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난 내가 여전히 애틋하고 잘 되길 바라요.
-또 오해영, 오해영
다 아무것도 아니야. 쪽팔린 거? 인생 망가져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거? 다 아무것도 아니야. 행복하게 살 수 있어. 나 안 망가져. 행복할 거야. 행복할게.
-나의 아저씨, 박동훈
우리 다 행복했으면 좋겠어.
쨍하고 햇볕 난 것처럼 구겨진 것 하나 없이.
-나의 해방일지, 염미정
이미 구겨진 부분도, 다림질해가며 구겨졌던 티도 안 날 만큼 잘 필 거다.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야지. 입에 달고 사는 그 말 '행복하자', 절대 말버릇으로만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행복해질 그날까지 나는 행복하려 노력하고 더 괜찮은 사람이 되려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