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에세이 독자투고
문예잡지 월간에세이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독자투고 게시판에 글을 등록했습니다. 제목은 ‘나도 꽃을 사랑할 수 있을까?’입니다. 얼마 후 편집장님께 전화를 받았습니다. 3월호에 글을 싣고 싶다는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글이 잡지에 실린 3월부터 지금까지 매달 월간에세이 잡지를 선물로 받고 있습니다. 글도 실어주시고, 선물도 보내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아래에 그 글을 남깁니다.
나도 꽃을 사랑할 수 있을까?
꽃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들. 그중 몇몇은 꽃이 예쁘지 않으냐고 물어왔다. ‘예쁘다’라는 수식어를 단 그 질문은, 꽃은 예쁘게만 보아야 한다고, 어서 동의하라고 강요하는 것만 같았다. 강요하는 질문 앞에 무력한 나는 꽃조차 자유롭게 바라볼 수 없었다. 꽃은 늘 멀게만 느껴졌다.
나는 모든 식물을 ‘꽃’이라는 한 이름으로 통일해서 불렀다. 자세히 들여다본들 아는 꽃이 있을 리가 없었지만, 들꽃들이 심어진 일터의 화단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이리저리 살펴봤다. ‘으윽! 이 징그러운 꽃은 뭐지?’
제각기 크고 작은 높이의 줄기를 세워, 가장 높은 곳에 꽃봉오리 하나씩을 가졌다. 그런데 꽃봉오리 표면에 피가 잔뜩 묻어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사람 살갗이 찢어져, 그 찢어진 틈으로 피가 흘러나와 덮인 모습 같았다. 잠깐 사이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스친 듯 소름이 돋았다.
가까이 다가섰다. 허리를 굽히고 목을 빼고 신중하게 바라보았다. 잎, 줄기, 꽃봉오리 모든 것이 익숙한 녹색인데, 둥근 꽃봉오리 표면에 제 살갗을 찢어낸 자리마다 붉은색을 내보였다. 뻘겋게 피멍이 든 자리에는 연고처럼 투명한 진액이 발려 있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투명한 진액은, 표피의 빨간빛을 사람이 흘리는 피와 더욱 흡사하게 보이게 했다.
징그러운 이 꽃봉오리는 어떤 꽃을 피워 보일까? 겉을 찢어 덩치를 키우고, 피멍 같은 상처를 참아내고, 흙에 비스듬히 선 얇은 줄기로 가장 높은 곳까지 진액을 빨아올린 수고만큼, 아름답게 꽃을 피울까? 화단에 낮게 꽂힌 팻말을 찾았다. ‘작약-수줍음, 개화시기(5월~6월)’
주말 내내 비가 내렸다. 작약이 궁금했다. 빨간 상처를 덮고 있던 투명한 진액이 비바람에 씻겨버리지 않았을까? 이 비는 작약을 아프게 하는 것일까, 자라게 하는 것일까. 이 비가 지나면 작은 꽃봉오리들은 제 몸집을 더 키우게 되고, 큰 꽃봉오리들은 꽃잎을 열어젖혀 속을 드러내 보이게 될까? 활짝 핀 작약이 궁금했다. 하지만 검색하지 않았다. 섣부른 방식으로 호기심을 풀고 싶지 않았다. 꽃이 피기를 마냥 기다렸다.
결재판을 들고 건물을 나섰다.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순간 멈춰 섰다. ‘이 바람이 꽃봉오리를 감싸고 있던 꽃잎을 열어젖혔겠구나!’ 왠지 작약이 피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걸음을 돌려 화단을 향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얼굴에는 열기가 올랐다. 매일같이 꽃봉오리 주위를 기웃기웃하던 익숙한 화단으로 가는 길인데 몸은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반응했다.
작약을 향해 걷던 그날의 선명한 감각. 뺨을 스치는 바람, 가슴을 치는 심장소리, 얼굴까지 차오른 열기. 그 감각으로 활짝 핀 작약을 만난 그날 이후 나는 변했다. 작약이 필 때, 작약이 질 때, 이전과 같지 않았다. 설레고, 반갑고, 아쉬워했다. 작약에게는 새로운 꽃말을 붙여주었다. 누가 정했는지 모를 ‘수줍음’이라는 꽃말 대신, 나와의 관계를 추억하기 위해 ‘기다림’이라고 지어주었다.
꽃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들을 볼 때 생각했다. ‘나도 꽃을 사랑할 수 있을까?’ 작약과 사뭇 가까워지고 나서 알게 되었다. 소소한 호기심을 간직한 채 기다림의 시간을 이어가면 관계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나는 다른 꽃들과도 관계를 맺어갔다. 무심히 지나쳤던 익숙한 꽃과 낯선 꽃을 향해 다가갔다. 이름을 외우고, 사진을 찍었다. 꽃잎의 색과 모양을 기억하려 애를 썼다. 시든 꽃에 얼굴을 들이밀고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를 옅은 향기를 더듬었다. 돌아보니 꽃봉오리 주위를 맴돌던 기다림의 시간이 계절마다 내게 다채로운 꽃을 선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