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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JH Jan 22. 2022

석굴암 옛 사진 속의 낙서

"석굴암 원형 사진"의 촬영 시기는 1913년 봄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의 대표 중의 대표 격이라고 할 수 있는 경주 석굴암 석굴. 잘 알려져 있다시피 현재의 석굴암은 오랜 세월 방치되고 훼손되었던 것을 1913년부터 1918년까지 조선총독부가 대대적으로 "수축"해 놓은 모습이다. 이때 사용한 콘크리트의 균열로 인한 안전성 저하와 습기 문제, 제대로 기록을 남기지 않은 원래 석굴의 배치 훼손 가능성 등등은 수십년 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어오고 있음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논쟁의 한 가운데에서, 흔히 일제가 해체공사하기 이전의 석굴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동안 수많은 연구자들과 논자들에 의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졌던 유리원판 사진이 한 장 있다. 그런데 이 사진의 촬영시점에 대해서는 유리원판 사진 원본이 소장되어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도 문서 기록이 없고 하다보니, 그저 막연하게 1900년대 말, 혹은 1910년 무렵 운운하는 식으로 소개되곤 했던 것이 사실이다. 


흔히 "석굴암 원형 사진"으로 자주 소개되었던 유리원판 사진.


그런데 이 사진 역시 유리원판의 막강한 해상도 덕택으로 내용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서 사진의 촬영 연대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먼저 좌측 인왕상의 얼굴 옆에는 김창조 金昌祚라는 인물이 여기에 왔다갔다는 낙서를 새겨놓고 갔는데, 그 옆에 써놓은 날짜는 "임자 壬子년 10월 12일"이다. 임자년은 1912년이니, 일단 1912년 10월 12일 이후에 찍은 사진이라는 것은 명확해진다. 

인왕상 옆의 낙서. 김창조라는 인물이 임자(1912)년 10월 12일에 석굴암에 왔다 갔다는 사실을 먹 글씨로 적어두었다.


다음으로 석굴암 입구 양측에 놓여있는 팔각석주 가운데 왼편 것에는 "보성중학교 수학여행단"이라고 적힌 낙서와, "공립 경주보통학교 수학여행단"이라는 두 개의 글씨가 쓰여있다. <매일신보>에 따르면 보성중학교의 경주 수학여행은 1911년 5월 19일부터 6월 2일까지 있었으며, 경주공립보통학교(현 계림초등학교)는 정식으로 공립학교 인가를 받은 것이 1911년 11월 1일의 일이므로, 그 이후에 쓰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팔각석주에 쓰여있는 또다른 낙서. "보성중학교 수학여행단"과 "공립 경주보통학교 수학여행단"이 쓴 낙서가 보인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보면 이 사진은 일단 1912년 10월 이후에 촬영된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또 사진의 오른쪽 하단을 보면 한무리의 짚단과 새끼줄 같은 것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1909년 이후의 여러 석굴암 사진들을 놓고 비교해보면 겨울철에 석굴 내부에 눈과 얼음이 쌓이지 않게 하기 위해 석굴암 암자의 승려들이 가져다 놓았던 물건임을 알 수 있다. 이미 이 짚단과 새끼줄이 한 번 쓰인 뒤 거두어져있는 것을 보면, 결국 이 사진은 1912년 겨울을 난 뒤인 1913년 봄에 촬영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이 사진을 일각에서 석굴암 본존불을 포함한 조각에 채색이 되어있었다는 주장의 근거로 삼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본존불의 입술이 유난히 짙게 찍혀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역시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본존불의 입술 아래로 흘러내린 먹 자국이 있어서, 보성중학교 학생들, 혹은 경주공립보통학교 학생들, 그도 아니면 김창조 같은 개인이 방문해서 멋대로 먹으로 칠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채색의 증거로 삼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먹칠을 한 것이 흘러내린 석굴암 본존불의 입술 모습


당시 조선총독부에서는 1913년 4월 조선총독부 철도국 토목기사 구니에다 히로시 國枝 博를 파견해 현지 실태조사를 하게 했는데, 이러저러한 내역을 종합해보면 아마도 이 사진은 구니에다가 파견 당시에 촬영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즉 이 사진은 1913년 10월 석굴암의 해체공사가 시작되기 전, 석굴암의 원래 상태를 담은 마지막 사진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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