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꿈보라 Mar 25. 2022

따뜻하게 물들이는 아이의 말

모네의 양귀비 들판 속 가족



무더웠던 어느 여름

나는 다리에 멍과 상처가 잘 생기는 편인데

때 되면 사라지겠지라는 생각으로

굳이 신경을 안 쓰는 편이다.

근데 나보다도 우리 아이가

내 상처에 더 관심이 많다.​



엄마 여기 아파?
밴드 주세요.
내가 밴드 붙여줄게요.


어디서 또 부딪혔는지

무릎에 파란 멍이 생겼다.

내 다리의 멍과 상처를 심각한 눈으로 살피더니

고사리 같은 손으로 뽀로로 반창고를 붙여준다.

나에게 무심한 나보다

더 꼼꼼히 나를 챙겨주는 첫째 아이다.



가정 보육하는 날

어린이집에 일이 생겨서

가정 보육을 하는 날이었고

첫째와 둘째를 동시에 보는 상황이었다.

가장 겁나고 무서운 아이 둘 보육.

무탈하게 시간이 잘 지나가길 바라지만

꼭 한 번은 인내의 순간이 찾아온다.

정신없는 틈에 사레가 들려서

소파에 걸터앉아 기침을 했더니

신나게 놀던 첫째 아이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엄마! 물 내가 따라줄게.
물먹어.
엄마 이제 아프지 마.



키높이 디딤대를 정수기 앞으로 가져가서

옆에 있는 컵에 물을 따라준다.

물을 흘리지 않게 조심히 들고 오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고 고마워서

힘듦이 아닌 힘이 샘솟는 하루였다.



일생에 관한 독후 활동 날

평소와 똑같이 독후 활동을 하는 날이었다.

사람의 일생에 대한 책을 읽고

아이의 사진 앨범을 함께 꺼내보았다.

“쪼꼬미야, 혹시 이때 기억나?”

초음파 사진부터 태어났을 때 모습

먹고 자고 씻는 일상의 모습

촉감놀이나 장난감으로 노는 모습

셋이서 여기저기 놀러 다닌 모습

“쪼꼬미 너 어릴 때 수납장 문 열고

혼자 들어가서 놀았잖아. 진짜 웃겼어!”

소소한 일상의 모습들로

나 혼자 추억을 회상하는 건가.

아이에게 열심히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딱히 특정 말을 하진 않았다.​


어렸을 때 기억이 난 걸까,

사진 속 표정과 모습이 웃긴 걸까.

시종일관 조용히 미소만 지으며

스스로 사진을 넘겼다.

인간의 일생을 책으로 읽고

사진 앨범을 보며 자신의 성장을 살펴봤으니

오늘은 간단하게

이쯤 마무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
키워줘서 고마워요!



의자에서 일어나

갑자기 와서 껴안더니 이제야 입을 열었다.

처음 듣는 말에 깜짝 놀랐다.

순간 코끝이 찡하고 눈물이 핑 도는 기분이었다.

반응이 없어서 조용히 보고 끝날 줄 알았는데

어린 시절부터 성장해온 사진들을 집중해서 보며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엄마, 아빠와 함께

행복해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고마운 마음이 들었던 걸까.

“엄마의 딸로 태어나줘서 고마워.”

오히려 고마운 건 나다.

쪼꼬미가 터질 듯이 꼭 껴안아주었다.





Claude Monet <Poppy Field>

내 마음을 잘 표현해 주는 듯한

모네의 <양귀비 들판> 그림이다.

맑고 푸른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구름.

드넓고 빨간 양귀비 들판 속에서

모네의 아내 카미유와 아들 장은

아르장퇴유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산책하는 엄마와 아들도

자유롭고 행복해 보이지만

이 둘을 관찰하며 그린 모네는

얼마나 더 뿌듯했을까.

모네도 가족과 행복했던 이 시간들을

그림 속에 무척 담아내고 싶었을 것이다.

사실 모네의 가족들은 모델 출신 미유를 반대해서

아내와 아들을 두고 떨어져서 지냈고

전쟁까지 터지면서 녹록지 않은 상황이었다.

여러모로 힘든 상태이지만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하기를 꿈꿨다.


그리고 그 꿈이 아르장퇴유에서 이루어졌다.



Claude Monet <The Artist’s House at Argenteuil>


모네는 아르장퇴유의 <양귀비 들판>을 비롯해

아르장퇴유에서 꿈에 그리던 가족과 함께 지내며

밝고 좋은 그림을 많이 탄생시켰다.


풍경 속에서 인물을 그리려는 연습을 많이 했고

​자연이나 정원이 있는 집에서

아내와 아이를 등장시켰다.


이 시기가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던걸 증명하듯

화려하고 밝은 색채와 따스한 분위기로

그림에서 그의 감정이 묻어 나온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안타깝다.

이 행복은 그리 길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내 카미유는 점차 건강이 안 좋아졌고

32살이라는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아직 성공하지 못한 모네 곁에서

갈등도 생기고 고생도 많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며 행복했다.


아르장퇴유에서 그린 작품들은

모네에게 더없이 소중하고

애잔하고 애틋한 작품이 되었다.

빛을 그린 모네는

그 시간과 그 순간을 담아내려 했다.​

모네가 찰나의 빛을 담으려 했지만

사실은 가족들과의 추억을 남긴 것처럼

나도 아이로부터 받은 감동의 순간을

기록하여 담고 싶었다.





나는 아이에게 처음 듣는 말들을

바로바로 기록하며 저장해 두고 있다.

처음 들어본 말이자

어쩌면 이 시간, 이 시기에만 할 수 있는 이야기.​


그 순간을 기록하지 않으면

영원히 놓칠 것만 같아서

항상 핸드폰 메모장에 날짜와 함께 적어둔다.

아이들을 사진으로 남기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 순간을 글로 적어두면

세세한 내용이 형상화되어

더 기억에 남는다.​



한때 쪼꼬미가 또래보다 말이 느린 것 같아서

걱정된 시기가 있었다.​


건강만 하길 바랬는데

빨리 뒤집길 바라고

빨리 기어가길 바라고

빨리 걸어가길 바라고

빨리 말하길 바란다.


사실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건강한 것만으로도 기특하고

한 단계 나아가는 것 자체가 대견스러운데 말이다.


중요한 건 속도보단 방향이다.

빠르면 빠른 대로

느리면 느린 대로

비교하지 말고 자신의 속도에 맞춰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사랑해주자.


아이는 나의 부족함을 가르쳐줄 만큼

더 깊은 생각과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예상치 못한 아이의 말은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물들이고

아이로부터 사랑과 배려를 배우게 한다.​

앞으로 또 어떤 감동과 깜짝 선물을

너에게 받게 될까.

너만의 따뜻한 색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사람이 될 수 있길.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라는 드라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