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평등하고 차별 없는 곳
어느 지역에 특수학교를 설립하려 하니
지역주민들이 나서서 반대를 했던 일화를 보고
너무나 안타까웠던 기억이 있다.
심지어 장애 학생의 부모가 무릎을 꿇고
허가를 사정하는 모습에선 분노가 올라왔다.
장애인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무관심을 넘어
무시하는 모습이었다.
사회적 약자의 기준도 어렵고
나누는 것부터가 조심스럽지만
사회적 약자라고 지칭하는 이유는
우리의 보호가 필요하고
제도적으로 돕기 위해서다.
하지만 약자로 낙인 하는 건 불편하다.
누구나 모자란 부분이 하나씩 있듯이
그저 어느 부분이 조금 불편할 뿐이기 때문이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고
다른 게 아니라 같은 친구일 뿐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는 외면보다 내면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하나의 유행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따라가기 바쁘다.
팝아트의 대가 앤디 워홀은
일상생활의 대중적인 소재를
실크스크린 기법(판화)을 이용하여
같은 이미지로 계속해서 찍어냈다.
반복적으로 찍어내는 ‘마릴린 먼로’ 작품처럼
우리는 유행을 따라가며
개성보다는 다 똑같은 획일화가 나타난다.
앤디 워홀은 산업 발달로 인한 대량생산 체제를 보여주었고 현대 사회의 대중문화를 미술작품으로 끌어들였다.
워홀은 기존의 천재들이
직접 손으로 그리거나 만들어 내는
단 하나의 작품인 순수미술의 방식과는 다르게
대량생산 기법을 활용하여
순수미술의 유일무이성과 오리지널리티를 부정했다.
기법도 주제도 상업적이고 대중적인 소재라
고급문화를 따로 규정하는 기존의 엘리트들에겐
비난의 대상이었다.
워홀은 순수미술의 위치만큼
대중미술의 위치를 격상시켰다.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순수미술과 대중미술,
그 경계는 점점 모호해지고 있다.
같은 문화이고 같은 미술인데
그리고 같은 사람인데 구분 짓고 나눠야 할까.
각 사람마다 고유의 본질이 다를 뿐
누구나 다 똑같은 사람이다.
초등학교 때 같은 반에 지적 장애 친구가 있었다.
키가 또래 남자아이들보다도 컸는데
다행히 괴롭힘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다가서는 친구들도 없었다.
내 앞자리였던 그 친구는 수업 시간에 자꾸
나를 뒤돌아보며 응시했다.
그저 나를 순수하게 바라보는 눈빛이었고
나와 친해지고 싶다는 표현으로 느껴졌다.
나도 차츰 체육시간에 줄 설 때 도와주거나
특별활동 시간에 헤맬 때 같이 챙겨주곤 했다.
이제는 나에게 담임을 맡는 자리가 왔고
우리 반 학생으로 특수 대상 학생들을 만나게 되었다.
담임을 하며 만난 아이는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귀여움을 듬뿍 받는 존재였다.
내면의 순수함과 아름다움은
외면의 아름다움보다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크다.
그저 순수한 그 친구들에게 더 눈길이 가고
더 따스하게 대해주게 된다.
누구나 평등하고 차별 없는 곳은
외면보다 내면에 집중하며
남을 한 번 더 생각하고
도움이 필요한 곳에 먼저 손 내미는
따뜻한 마음이 넘치는 곳이 아닐까.
겉모습이 아닌 마음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대하는 사이가 되길.
우리 아이가 마음이 예쁜 사람이 될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