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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Sep 23. 2024

괴  물

고레에다가 그린 인간 초상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선을 넘어가고 있다. 그 선은 이쪽과 저쪽을 나누는 경계의 선이다. 이쪽에는 가족이 있고, 저쪽에는 사회가 있다. 또한 저쪽은 아날로그 필름의 시대이고 이쪽은 디지털 고화질의 세계이다.

 이로써, 히로카즈가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가족의 문제는 일단락되고 있다. 법정물과 같은 사회문제를 다루고 싶다는 의지를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피력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 작품이 ‘괴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작품은 가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지 않다. 가족과 사회의 중간지점으로 선택한 공간이 ‘학교’일 것이고, 그런 선택은 일본인 특유의 신중함이 내재한 선택으로 볼 수 있다. 우선 잘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보자는 안전한 출발인 셈.


 그간 히로카즈는, 천착해온 가족의 세계를 통해 ‘이해할 수 없는 죽음(환상의 빛, 1995), 작별과 사랑(원더풀라이프, 1999), 버려진 아이들의 세계(아무도 모른다, 2004), 끊어지지 않는 가족이라는 유산(걸어도 걸어도, 2008), 가족의 이산(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2011), 확장되는 가족의 의미(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2013)’를 탐구하면서 전통적 가족관을 마구 흔들어 놓았다. 급기야 ‘서로에게 타인인 존재로 꾸려진 가족’(어느 가족, 2018)을 탄생시켰고, ‘태생적 가족을 팔아버리려는’(브로커, 2022) 유사 가족의 탄생에까지 도달한다.

 이 모든 작업들의 소재가 가족이었고, 어떠한 형태였건 가족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렸다는 점에서 고레에다의 ‘가족 서사기’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그 종지부를 찍고 그가 더 큰 장으로 나가는 이쪽과 저쪽의 중간지점에 걸치게 된 작품이 ‘괴물’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소재가 가족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학교의 문제이기도 한 사건들로 점철, 혼재되어있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학교라는 공간이 가진 특징과도 맞물린다.


 ‘괴물’의 서사공간은 사요리와 미나토의 세계, 키요카타와 요리의 세계, 호리와 히로나의 세계로 3분된다. 이들 상이한 각 개의 세계는 ‘미나토, 요리, 호리’의 세계를 만들어 낸다. 이를 편의상 언급한 순서대로 1세계, 2세계, 3세계, 4세계로 명명한다. 1, 2, 3의 세계는 사적 세계다. 1차 집단, 가족을 의미한다. 모자 가정의 세계, 부자 가정의 세계, 동거 가정의 세계를 대변하는 이들 가족의 형태는 전통적 관점에서 온전한 구성이 아니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로 인해 이 영화는 선입견이 파생되고(1세계) 그것이 현실화되며(2세계), 그것이 자신의 미래로 현재화되는 모습(3세계)을 적실히 보여주는 이들 ‘1차 집단’의 불완전성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세 개의 가족들이 2차집단, 즉 제4의 세계를 이루는 곳이 바로 ‘학교’다. 미나토, 유리, 호리가 학교라는 공간을 공유하며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 낸다. 학교는 사회로 나가기 위한 전단계인 가정과 사회를 연결하는 중간계로써의 기능을 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 학교가 ‘괴물’을 만들어 내는 후기 산업사회의 첨단 공장이라면? 그러한 상상 자체가 얼마나 ‘괴물’스러운지에 대한 고레에다의 표현력은 통렬하고 신랄하다.


 사요리는 남편과 사별 후 세탁소를 운영하며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 미나토를 키우고 있다. 시내에 화재가 발생하고, 그 건물 안에 있던 업소에 미나토의 담임이 있었다는 소문이 사요리의 귀에까지 이른다. 하나의 미심쩍은 의심이 아들 미나토의 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미나토가 학교에서 신발을 잃어버리고, 머리카락을 자기 마음대로 자르는 행동을 하며, 옷도 더러워져서 집에 들어오기 일쑤인 것이 마음에 자꾸 거슬리는 것이다. 미나토가 ‘인간의 머리 속에 돼지 뇌를 넣을 수 있느냐’는 질문과 함께 담임이 아들을 체벌했다는 말에는 학교 방문을 할 수밖에 없는 사정에 이르게 된다.

 (손자를 자신의 차에 치어 숨지게 한) 특수한 사정이 있는 미나토가 다니는 학교의 교장은 극히 객관적이고 사무적인 행태로 사요리를 응대하고 사요리는 성의 없는 학교의 대응에 분노하게 된다. 급기야 담임의 공개 사과가 있었으니 사건은 석연치 않다. 담임 호리는 끝까지 자기의 결백을 주장하고, 사건은 과연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지경에 빠진다. 사건은 라쇼몽적 상황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무엇이 사실인지, 진실이 무엇인지 아무도 모르게 되는 불가지의 상황이 전개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영화는 인과의 관계를 주축으로 하는 플롯을 펼쳐놓는다. 이것은 추리소설가가 형사를 내세워 사건을 조사해나가는 것처럼 감독은 카메라를 앞세워 의문을 하나씩 풀어나간다. 퍼즐조각이 하나씩  맞춰지면서 완성되어가는 그림, 그래서 ‘괴물’에 등장하는 형사는 ‘카메라’다. 따라서 감독은 사건을 파헤치고 진실을 찾아 나가는 형사의 눈을 가지고 사건을 따라간다.

 지금까지가 서막이었다면, 이제 사건은 2막에 접어든다. 미나토와 요리에게 초점을 맞춘 카메라는 그 둘의 세계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1차 집단의 세계 속에 속했던 인물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결핍과 관심의 이율배반적 관계 속에 성장하고 있는 미나토는 정작 원하는 것(아버지)은 없고 불필요한 관심(어머니)만 무성한 가정환경을 가지고 있다. 반대로 요리는 정작 있어야 할 것(어머니)은 없고 있으면 안 되는 대상(아버지)만이 존재하는 가정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 이 둘의 만남은 운명적이다. 각각의 부모에 대한 부재가 가지고 온 결핍을 상대에게서 찾고 이상적 관계형성을 하려고 하는 이들에게 학교의 상황은 난관투성이다. 그래서 현실로부터 벗어나 안착할 수 있는 이상적 공간, 폐철도의 객실은 그들만의 공간이며 평화와 안정 둘만이 서로를 지켜 줄 수 있는 완전한 공간으로써의 기능을 하는 곳이다. 이 곳에서는 본성이 이끄는, 생긴 그대로의 상대를 받아들일 수 있다. 이성으로서의 이끌림 이전에 서로에게 강렬히 끌리는 감정을 가지게 되는 것, 자신이 원하는 그 어떤 것도 가능한 곳이다. 거짓말이 더 이상 필요 없는 그들만의 세상, 진실의 공간이다.     

 담임 호리는 올바른 교육관을 가지고 아이들을 가르치려는 평범한 교사다. 그가 학교로부터 배척받고, 정직처분을 당하게 되는 과정에까지 이르면서, 결국 동거하던 여자친구도 떠나버리는 현실적 고통에 이른다. 자신이 결백하다는 사실, 진실을 알고 있는 대상은 오직 아이들 뿐이다. 호리는 그들에게 진실을 밝혀줄 것을 기대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절망적 상황이다.

 거기에 교장의 특수한 사정과, 교직원들이 보여주는 일련의 매너리즘적 태도들은 사태를 ‘불확정성의 현상’으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대단원을 향해 사건은 치닫는다. 호리와 사유리가 아이들을 찾아 나선다. 그들이 남긴 일기장 속에 그들만의 세계가 그려져 있다. 산사태가 나고, 아이들이 사라지고 없다. 마을과 산 사이에 터널이 있고, 터널밖에는 오래전 운행을 중단한 폐선로 위에 한 칸짜리 객차가 폐가처럼 남아있다. 아이들의 낙원을 향해 호리와 사유리가 폭풍우를 뚫고 달려가지만, 아이들은 거기에 없다.

 기차 객실로부터 탈출한 두 아이는 어딘가를 향해 달려간다. 그들이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며 주고 받는 대화의 본질은 이런 것이다.     

 

 이게 새로운 세상일까?

 아냐 그런 세상은 없어, 지금 이 세상이 계속되는 거야.     


 영화는 전환에 전환을 거듭하면서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초현실적 세계인지 구분할 수 없는 장면들이 연출된다. 관객인 내게 마지막 장면은 이렇게 다가온다.

 갑자기 사방에 정적이 흐른다. 카메라는 고속촬영 중이다. 화면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이 공중에 뜬 상태로 저마다 미세한 동작으로 움직이고 있다. 폐객실, 사유리와 호리, 교장과 학교관계자들, 미나토와 유리를 둘러쌌던 모든 사람들과 풀 한 포기에 붙어 있던 빗방울까지, 이 모든 것들이 그렇게 공중에 붕 떠 있는 초현실적 장면이 눈 앞에 펼쳐진다. 거기에는 영화를 관통했던 시간과 공간이 지상으로부터 눈높이만큼 떠올라 현실로부터 이격되어 있다. 그 중심에 미나토와 유리가 해맑은 얼굴의 스톱모션으로 객석을 응시한다.

 이 스톱 모션 위로 고둥소리같은 트롬본과 호른의 원초적 소리가 길게 삐어져 나오며 이물감을 고조시킨다. 이 장면을 우리는 ‘괴물’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쯤 되면 고레에다 감독 자신이 이미 괴물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것을 우리는 말초적 감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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