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인생이 재밌다고 생각한 순간들은 항상 새로움과 도전정신이 함께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 두려움도 같이 생겼었다.
호주로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단신으로 호주로 가는 비행기를 탔었다. 1학년 때 친하게 어울리고, 부모님끼리도 친했던 친구가 호주에 살고 있었는데, 그 친구의 집에서 머물기로 했었다.
내가 겁먹은 모습을 보이면 부모님이 보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굉장히 태연한 모습을 유지했던 걸로 기억한다. 실제로도 그때 느낀 감정이 두려움인지 설렘인지 헷갈리는데, 둘 다 있었지 않았나 싶다. 그래도 나름 긴장을 했었던 터라, 미리 비행기 타는 곳을 알아놓고 돌아다녔던 걸로 기억한다.
호주에는 2달 반 정도 머물렀는데, 동시에 호주에 있는 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호주 친구들과 학교를 다니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홍콩, 대만, 베트남, 혹은 나처럼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모인 학급에서 유일한 네이티브인 선생님을 두고 학교생활을 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 적응을 걱정하신 어머니께서 일부러 국제학급을 신청했다고 하셨다.
그 외의 호주 생활은 전반적으로 새로운 문화, 기후, 환경이었기 때문에 새롭고 즐거웠던 기억이 많이 남아있다.
처음 호주에 간다는 설렘과, 혼자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여행의 두려움 때문인지 호주 여행은 굉장히 좋은 채로 남아있다. 그런데 또 신기하게도 호주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탈 때의 기억은 굉장히 희미하게 남아있다. 아마도 한국으로 돌아가는 데에 있어서 두려움이나 설렘이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을 하고 있다.
진로에 대한 선택
나는 중학교 때 IT 특성화 고등학교를 선택했다. 반에서 4등, 전교에서 14등 정도 됐고, 국영수와 관련된 학원을 다녔기 때문에 부모님의 입장에서는 특성화 고등학교에 진학한다는 것이 우리 집에서 일반적이진 않았다.
특히 상고, 특성화고, 마이스터고는 공부를 아예 하지 않는 학생들이 가는 곳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계셨던 부모님이셨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그럼에도 내 선택을 가지고 싶었다. 내가 선택할만한 다른 길을 찾아보고 싶었다.
다행히도 설득은 어렵지가 않았다. 진학하려는 특성화 고등학교 자체가 공부, 진학을 추구하는 특성화 고등학교였기 때문에 설득하는 데에 써먹을 수 있었다.
학교는 필수 기숙사, 한 달에 한 번은 무조건 본가로 보내는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학교에서의 외출은 허락을 맡아야 했고, 외출 사유가 필요했다. 특별한 외출 사유 없이 나갈 수 있는 날은 일주일에 한 번, 주말 외출이었고, 신청을 통해 외출이 가능했다.
일주일에 기본적으로 6일을 가둬 놓는 이러한 시스템 덕분에, 나는 더 많은, 재밌는 도전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 : 밤을 지새워라
한 달에 한번, 기숙사 청소 및 학생들이 본가로 가서 부모님을 뵙도록 만들기 위한 시스템 덕분에, 매달 학교 기숙사에서 쫓겨났다.
나는 본가에 내려가거나, 혹은 부담되는 교통비 때문에 친구 집에서 잠시 머무는 게 베스트였다. 그러나 매번 친구 집에 가기도 민폐인 거 같고, 그렇다고 집에 가기는 귀찮은 마음에 친구 집이 아닌 밖에서 밤을 새우는 상황도 일어났다.
가장 접근성이 쉬우면서 나름 분위기가 있는 밤새기 목록 중 하나다.
24시간 카페에서 개발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카페 책상에 엎드려 잠들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커피 한잔 시켜놓고 최대한으로 머문 케이스인데, 편하게 쉬지 못했을 아르바이트생에게 약간의 죄송함이 남아있다.
그래서 24시간 스터디 카페를 발견했었는데, 스터디 카페는 일반 카페와 다르게 굉장히 조용하기 때문에 조용히 잠자기에는 최고였다. 대신 일반 카페보다 비용이 조금 더 든다는 단점이 있다.
그리고 겨울에는 은근히 바람이 많이 들어오는 게, 굉장히 추웠다. 겨울에는 이 방법 말고 다른 방법을 많이 이용하려 했다.
아무래도 미성년자다 보니 찜질방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몇몇 찜질방에서는 전화를 통해 부모님이 허락해주시면 머물도록 허락해주셨다.
가장 잠다운 잠을 잘 수 있는 루트였고, 따뜻하게 몸을 데울 수 있는 것도 굉장히 좋은 요소였다. 카페에서 밤을 새우다가도 아침에 찜질방을 이용하곤 했다.
난 가족이랑 어릴 때 갔었던 찜질방에 좋은 추억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찜질방 자체에도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는데, 친구들이랑 이용하니까 또 새롭게 재밌어서 좋았던 기억이 난다.
빈도수가 확실히 적은 편이지만, 대회 참여를 통해 밤을 새우는 경우도 있었다.
해커톤이나 메이커톤 같은 대회를 이틀간 진행하면서 머물 장소를 제공받는 경우였다. 편하게 잠을 자진 않지만, 어쨌든 대회에 참여하다 보면 밤새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고 생산적이기도 해서 굉장히 좋아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게다가 종종 밤에 치킨이나 피자를 시켜주기도 하고, 대부분의 경우 과자나 간식거리를 같이 제공해줬기 때문에 찜질방, 카페보다 훨씬 재밌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밤을 지새우기 위해 PC방에서 미성년자임을 숨기고 밤새 게임을 하면서 밤을 새기도 했다. 가장 성공하기 어려움 밤샘 목록 중에 하나였고, 친구들과 여러 PC방을 돌아다녔다.
심지어는 알바 분 게 사정 설명을 하면서 당당하게 들어가려는 시도도 했었는데, 성공할리 만무했었다. 정말 아주 가끔, 성공할 수 있었는데 그마저도 얼마 못 가서 들통나곤 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 : 나가라
학원을 다니지 않는 이상, 대부분 기본적으로 6일을 갇혀있었다.
그렇게 수감생활 중, 학교 풍경에 익숙해질 무렵, 무단외출이라는 생각이 번뜩 떠오르는데, 억압된 상황에서의 탈출이란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평소 그렇게 자유로울 때 느끼지 못했던 자유의 소중함을 맛보면서 자유에 중독이 되어버렸다.
주로 야간 자율학습 시간이나, 주말 시간에 무단외출을 많이 했다. 밖에 나가면 번화가에서 노래방이나 PC방 같은 곳에서 친구들과 놀기도 하고, 언어교환 모임을 참여하기도 했는데, 특히 매주 목요일 야자시간에 고정적으로 나가는 언어교환 모임은 정말 기억에 많이 남는다.
이 언어교환 모임은 성인이 되어 서울에서 참여할 수 있는 지금도 종종 참여했었는데, 외국인 비율이 더 많아져서 더 유익해졌다.
언어교환 모임은 책을 읽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모임이었는데, 그 책이 '9등급 꼴찌 1년 만에 통역사 된 비법'이라는 책이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총 12년 동안 영어교과를 배우면서도 실제 영어권 사람들을 만나면 한마디도 못하는 교육과정을 비판하면서 자신이 사용한 방법을 공유해주는 책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현재의 시스템을 받아들이지 않고,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에 동요됐었다.
책에서는 매체를 통해 배운 표현들을 실제로 써먹어보는 데에 사용해보라고 권했지만, 언어교환 모임이 큰 설렘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참을 수 없었다. 표현을 배우기 전에 경기도에서 운영되고 있던 언어교환 모임 GLEX(Gyeongi Language EXchange)에 참여하게 됐다.
사실상 이 모임부터가 첫 사회이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던 게, 어린 나이의 무례함을 그대로 가지고 사람들과 교류했기 때문이었다.
처음 나가는 모임이기에, 일찍 도착해서 먼저 도착한 분들과 가벼운 인사를 나눈 뒤, 나는 바로 앞에 있던 분의 직업을 물었다. 당시 나는 '직업이 뭐예요?'라고 물었고, 상대방은 어린 내 나이를 고려해서 '자칫 무례할 수도 있는 질문이다'라고 말하셨던 기억이 난다.
공개적으로 내가 무례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니 부끄럽기도 했고, 누군가에게는 직업을 묻는 행위가 실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나중 가서 생각해보면 단순히 직업을 묻는 것에 있어서 무례함이 있다기보다는 말투 자체에서 무례함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가령 '실례가 안 된다면, 직업을 여쭈어봐도 될까요?'라는 말로 하는 일을 여쭤봤다면 그런 말을 들었을까?
여하튼 감사하게도 사회에서의 간단한 정보들도 들을 수 있었고, 꾸준히 모임에 나가면서 만난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다양한 의견과 생각들을 들어볼 수 있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 : 이글루 짓기
나는 경상북도에서 태어나서 눈이 많이 쌓이는 상황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중학교 때부터 눈이 많이 내려서 이글루를 지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경기도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이글루를 지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입학하고 찾아온 첫겨울, 고등학교 1학년의 겨울방학 때 학교 근처 할인마트에서 플라스틱 통들을 사서 친구들과 이글루를 짓자고 제안했었다. 그렇게 모인 친구들이 약 6명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 자연스럽게 그때 기억이 떠오르고, 사진으로서 남겨놓진 않았나 하면서 갤러리와 내 SNS를 많이 뒤져봤었지만, 아쉽게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같이 이글루를 만든 친구 중에 사진으로 남기는 것을 좋아하고, SNS 활동도 열심히 하는 친구가 떠올라서 혹시 남은 사진이 있는지 물어봤고 결국 사진을 구할 수 있었다.
위의 사진과 같은 모습을 한 이글루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눈이 내리지 않아 큰 진전 없이 마무리했었다. 정말 본격적으로 지은 이글루인 만큼 만들어가는 과정이 정말 재밌었다.
물론 고통은 함께했다. 추운 겨울에 털장갑과 두꺼운 방수장갑을 한 겹씩, 총 두 겹 끼고 작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손이 어는듯한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또, 이글루의 벽돌을 단단하게 만들고자 이글루 가운데에 물을 준비했었는데, 이 물을 다루다 보니 손이 더 시렸던 기억도 난다.
당시 물을 공급받기 위한 커다란 통은 마트에서 구하기가 애매했는데, 다행히도 평소 살갑게 인사해주시던 경비아저씨에게 도움을 구할 수 있었다. 경비아저씨 덕분에 물을 대량으로 공급해줄 통도 구했고, 그 뒤로는 계속 반복적인 작업으로 이글루를 완성시켜 나갔다.
물론 그 사이사이 이글루의 구조를 둥글게 만들기 위한 의논도 있었고, 입구 쪽의 벽돌 제작을 위해 깎는 작업도 있었으며, 이글루 하단을 조금 더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 눈을 덧칠했던 기억도 난다.
여하튼 그렇게 겨울방학 동안 열심히 지었지만, 결과는 미완성. 눈이 더 이상 내리지 않고 날씨가 풀리면서 이글루가 녹아버리기 시작해서였다. 그러나 그렇게 자연의 힘으로 사라지기엔 너무나도 아쉬웠기에, 이글루 만들기에 참여한 사람들 중 한 명이 편안하게 보내주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파괴된 이글루만 남기고, 이글루 만들기 프로젝트는 끝이 났다.
사실 이렇게 여러 사건들을 글로 남길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사건들이 나에겐 도전이었고, 도전을 동반했던 사건들이 기억에 잘 남기 때문이었다.
여느 누구와 다름없는 삶과, 매일 똑같은 수업만을 들었다면 사실 어떤 걸 기억하고 있었을까 의문이 들었다. 자기소개서를 작성할 때도, 이력서를 작성할 때도 다른 사람과는 차별화된 글들을 쓰고 싶어 한다. 그런데 만약 삶에 도전이 없고, 기억할만한, 어필할만한 이야기가 없다면 자신을 차별화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다고 내가 대단한 도전들을 해온 것은 아니기에, 도전의 허들을 높여 멋진 실패를 기록하고 차별화된 인간을 꿈꾸기에, 도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