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선아 SSunalife Jan 18. 2024

밴쿠버에 눈이 온 날

꽈당하고 두 번이나 넘어졌어요! 



밤새 눈이 많이 왔다. 밤새도록 쌓인 눈은 온 세상을 온통 검고 하얗기만 한 흑백의 세상으로 마술을 걸어 놓았다. 거실에서 눈이 쌓인 바깥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당장이라도 뛰어나가고만 싶었다. 이래 저래할 일이 많은 나는 그래도 꾸욱 참고 집에서 열심히 일을 하겠노라 마음먹고 꽤 짙은 마약의 커피를 마셨다. 프로포절 데드라인은 가까워지는데 아이디어는 좀처럼 영글어가지 않고 전화기에서는 수도 없이 많은 문자가 띵동 하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맘을 잡고 책상에 않으니... 


세상에나! 전기가 나갔다. 인터넷이 안 되는 세상에서 나는 부모 잃고 길 잃은 미아가 되어버린다. 내 동료 어느 누구도 전기가 나갔다는 (Power Outage) 얘기가 없는데 내가 사는 이 동네는 왜 매년 눈이 많이 오면 꼭 이런가 하고 궁시렁 거렸다. 지금이 서기 몇 세기인데 이 선진국에서 왜 아직도 전기가 나가고 말고 등등... 그런데 신기한 것은 나는 왜 전기가 나가면 갑자기 일을 더 열심히 하고 싶은 욕구가 솟는지 모르겠다! 


비씨 하이드(BC Hydro)로 맵을 보니 내가 사는 일대가 다 전기가 나간 모양이다. 금방 고쳐질 것을 경험상 잘 알지만 나는 이때다 하고 가방을 챙겨 근처 커피숍으로 나가기로 했다. 자 나가자! 


생각보다 눈이 정말 많이 쌓여있었다. 20센티미터가 넘는 것 같았다. 눈이 쌓인 길을 걷는 것은 워킹머신의 높은 경사를 빨리 걷는 것과는 비교가 안되었다. 괜히 객기를 부리고 밖으로 나왔나 하고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하고 있는 순간 페르시아인으로 보이는 저 앞의 젊은 여자를 보게 되었다. 아이를 태운 큰 유모차가 눈 속에 처박힌 듯 그녀는 그 유모차를 끌어내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착한 척하며 살기 좋아하는 나는 당근 그 여자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나는 "도와줄까"하고 물어보았다. 그런데 그 여자는 괜찮다고 노우 (No)라고 했다. 분명히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데 단호하게 노우라고 하니 이것 참... 남의 대답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수도 없고. 차도 다니고 정말 위험해 보이는데... 나는 "내가 도와줄게"라고 다시 한번 말했다. 그리고 유머차를 끌려고 하지 말고 같이 들자라고 했다. 나는 최근에 열심히 길러온 내 근육의 힘을 힘껏 사용했다. 그러나 그 유모차가 생각밖으로 크고 좀 무거웠다. 난 그 순간에 '그냥 모른 척하고 갈걸'. '아까 노우 할 때 그냥 지나갈 걸'... 등등 그 짧은 순간에 나는 내 호기를 탓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생각해도 정말 웃기는 아줌마다! 내 선의와 선함은 조금만 불편해도 금방 나약해진다. 으구! 


조금 걷고 있는데 다행히도 ㅎㅎㅎ 키가 큰 백인 남자가 "내가 도울까" 하고 다가왔다. 그래서 나는 "그래 좀 도와라. 분명 네가 나보다 힘이 셀 테니 도와주렴" 하고 냉큼 그 남자에게 유모차 뒷부분을 맡겼다. 그렇게 우리 셋 (유모차 안에 있는 아이 포함 넷)은 한참을 함께 걸었다. 유모차는 엄마인 그 여자와 그 키 큰 남자가 들고 나는 옆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거들고. 그 여자는 전화 밧데리를 충전하러 로히드몰이라는 근처 백화점으로 가는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탱규니 괜찮다 등등 인사를 나누고 큰 도로 앞에서 헤어졌다. 


왠지 "조선아 넌 역시 멋있다"는 생각이 들며 우쭐해졌다. 이 미담을 오타와에 있는 딸아이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우린 문자를 통해 서로에게 있는 일상의 즐거움을 자주 서로 나누며 살아가기에... 딸아이에게 문자를 보내려고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빼는 순간 에고.... 꽈당 넘어지고 말았다. 아이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다행히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빨리 일어나기는 했지만 팔꿈치와 다리가 아프다고 생각했다. '난 정말 한심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단한 일도 아닌데 혼자 쉽게 우쭐대고 또 자랑질을 하려 들고 도대체 내 나이가 몇인가 싶고... 


그러다 급 우울해졌다. 아마도 내가 갱년기로 인한 조울증인가 참 나... 갑자기 우쭐했던 어깨가 추욱 늘어지면서 중심을 잃고 다시 한번 꽈당 넘어졌다. 이 무슨... 하도 아파서 눈물이 날 뻔했다. 같은 방향으로 또 넘어지니 팔꿈치와 다리가 더 아팠다. 그런데 이번에는 허리를 좀 삔 것 같았다. 바로 일어나기가 좀 힘들었다. 그때 한 남자가 손을 뻗치며 괜찮냐고 물었다. 장갑을 안 낀 내손에는 눈이 범벅이었다. 젖은 내손으로 그 손을 잡기가 뭐해서 괜찮다며 혼자 일어났다. 그러고 나서 "이젠 나도 나이 들어가나 봐" 라며 씨익 웃어 보였다. 그 남자는 내 웃음을 보고 안심이 되는지 조심하라고 하며 떠났다. 


진짜 아팠다. 그런데 일어날 때 허리가 좀 불편한 것이 느껴졌다. 평소 같으면 10분 만에 갈 수 있는 그 커피숍으로 가는 길이 오늘은 멀고 험란하기만 했다. 


커피숍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사는 콘도 주인들 모임방에서 전기가 왔다고 메시지가 떴다. 커피숍도 문을 일찍 닫는다고 했다. 


다행히 돌아오는 길에는 아는 분께서 라이드를 해주셔서 안전하게 돌아왔다 (Thank you for the ride!). 


저녁을 먹고 앉아 있노라니 허리가 좀 불편함을 느낀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가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씨! 눈을 보고 설레었던 오늘 아침과는 완죤 다른 기분이다. 오늘은 일찍 잠을 청해야겠다. 내일은 조신하게 집 안에서 열심히 주어진 일을 수행하련다. 


발코니에서 본 세상 


매거진의 이전글 갱년기가 무더위를 만나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