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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 달리의 <팬지 자화상>

: 멋들어진 창안가

by 권연희


살바도르 달리, «달리 꽃들 Flora Dallinae» 중 <팬지 자화상>, 1969년, 에칭, 스텐실 채색, 58.5 x 38.5cm


이상한 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커다란 눈망울과 왁스로 추켜올린 콧수염, 멋 부리며 으스대는 몸짓까지, 미술의 역사에서 최고의 나르시시스트이자 괴짜인 살바도르 달리다. 이 판화는 달리가 1969년에 제작한 상상의 꽃화집 «달리 꽃들 Flora Dallinae»에 포함된 <팬지 자화상>이다. 열 점으로 구성된 앨범에서 달리는 장미와 달리아, 백합 등에서 영감을 받은 인간 캐릭터나 몸의 부분을 함께 제시한다. 전통적인 식물삽화와는 다른 기상천외한 달리의 꽃들에 감탄하다 결국 다가가기 어려운 이 화가를 살펴보게 되었다.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피게레스에 태어난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 1904~1989) 풍요로운 가정환경에서 천방지축 금쪽이로 자랐다. 마드리드의 산페르난도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던 시절, 달리는 인상주의와 입체주의 등 아방가르드 미술의 세례를 받으면서 현실에서 괴리된 자기만의 세계 속에 살았다. 고딕 시대의 성모상을 보고 모사하라는 교수의 과제에 달리는 광고지에서 본 저울을 그려 넣었고, 미술사 시험에서는 교수들이 자기보다 잘 알지 못한다며 빈 시험지를 내는 등 기행을 일삼다가 결국 퇴학당했다. 그래도 아카데미에서 만난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와 영화감독 루이스 부뉴엘과 영감을 주고받으며 풍부한 예술적 토양을 쌓았다. 부뉴엘과는 이후 기괴한 장면들을 몽타주한 실험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1929)를 함께 제작하기도 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매혹된 달리는 점차 꿈이나 환상의 세계를 세밀하게 그려나갔다. 결국 1928년에 그는 파리로 가 앙드레 브르통이 이끌었던 초현실주의(surrealism) 그룹에 합류하고, 시인 폴 엘뤼아르의 부인인 갈라를 만나 평생의 연인이자 뮤즈로 삼는다. 프로이트의 연구와 더불어 1차 세계대전의 폭력과 부조리 속에서 탄생한 초현실주의는 이성적인 사고에 지배를 받지 않는 무의식과 꿈의 세계에서 영감을 찾았다. 이를 위해 달리는 스스로 명명한 ‘편집광적·비판적 방법’, 즉 수면과 각성 사이의 선잠 상태로 자신을 유도해 본 이미지를 재빠르게 기록했다. 이상하고 비합리적인 환각의 이미지를 그는 사실적으로 세밀하게 묘사했다. 여기에 주로 등장하는 파편화된 몸이나 변형된 물건, 기괴한 유기체는 주로 억눌린 성적 욕망이나 사회적 금기를 드러낸다.


“나는 마약을 하지 않는다. 내가 마약이다.”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지속>, 1931년, 캔버스에 유채, 24.1 x 33cm, MoMA, 뉴욕


파리의 자유와 명사들과의 교류 속에서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작품 <기억의 지속>이 탄생한다. 황량한 풍경 여기저기에 흐물거리며 흘러내리는 시계의 이미지는 제목처럼 머릿속에서 잘 떠나지 않는다. 왼편에 나뭇가지에 걸린 시계와 좌대에서 흘러내리는 시계, 개미가 모여든 주홍 시계가 눈길을 끈다. 옆 시계에 서성이는 파리처럼 개미는 죽음과 부패를 상징한다. 곤충과 함께한 흐물거리는 시계는 끊임없이 정확하게 흐르는 시간의 속성과 의미를 무력화시킨다. 이는 시간과 공간의 상대성을 논한 아인슈타인의 이론에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의 꿈과 기억, 시간의 유동성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종이 한 장 크기이지만 강한 인상을 준다.


바닥에는 기괴한 옆모습의 얼굴이 바위 위에 걸쳐져 있다. 곤충 같은 긴 속눈썹을 가진 흐늘거리는 피부의 얼굴은 달리의 <위대한 자위행위자>(1929)에서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꿈의 풍경, 특히 성적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달리의 꿈꾸는 자화상으로 해석된다. 얼굴 위에 놓인 시계는 생의 유한성, 즉 죽음에 대한 달리의 집착을 드러낸다. 이 작품은 고향 카다케즈의 해안 풍경을 그리던 달리가 카망베르 치즈를 맛본 후의 꿈 혹은 환각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꿈으로 초대하는 달리의 그림은 "손으로 그린 꿈의 사진"인 셈이다. 특히 자주 등장하는 흐늘거리는 시계와 날아다니는 계란 프라이, 목발과 개미, 메뚜기들은 기억 속에 각인된 매혹과 공포의 오브제들이다.



살바도르 달리, <베이컨이 있는 부드러운 자화상>, 1941년, 캔버스에 유채, 61 x 41cm, 달리 극장 미술관, 스페인 피게레스

초현실주의자들이 추종하던 마르크스주의를 거부하고 히틀러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드러낸 달리는 점차 그룹에서 배제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유럽의 여러 화가들처럼 미국으로 건너갔다. 다음 해 달리는 뉴욕 근대 미술관에서 첫 회고전(1941)을 가졌고, 그 해 36년의 인생을 정리한 자서전을 탈고했다. 태아 시절 어머니의 뱃속에서의 추억에서부터 소년기의 일탈과 꿈, 학창 시절 자위행위와 성인이 되어 품었던 환상까지, 책을 헌정한 갈라를 향한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달리가 얼마나 기인이자 미치광이며 천재인지 깨닫게 된다. 대담하고 독창적인 예술가의 신화는 진실이라기보다 환상이 버무려진 초현실주의 작품에 가깝다.


이때 달리는 가장 유명한 <베이컨이 있는 부드러운 자화상>을 남겼다. 시계처럼 흐물거리는 얼굴은 크고 작은 목발에 겨우 지탱하고 있다. 짙은 눈썹과 커다란 눈망울, 트레이드마크인 콧수염 때문에 누구든 이 형상에서 달리를 본다. 밑에 좌대에는 작품의 제목인 '부드러운 자화상'이 적혀있고, 위에는 튀긴 베이컨 한 조각이 놓여있다. 베이컨은 20여 년간 겨울을 보낸 뉴욕의 세인트 레지스 호텔에서 즐겨 먹은 아침이었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에 그린 <최후의 심판>에서 성인 바르톨로메오가 들고 있는 벗긴 살가죽에 자화상을 남긴 것에 깊은 인상을 받은 달리는 인물을 그리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이나 생명력이 아닌 개성을 드러내는 피부라 여겼다. 자세히 보면 눈과 입가에는 개미들이 서성이고 있는데, 이는 죽음을 가까이 인식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어렸을 때 달리는 죽은 박쥐에 모여든 개미떼를 보고 강렬한 두려움과 매혹을 느꼈다. 태어나기 9개월 전에 죽은 형의 이름 '살바도르'를 물려받은 달리는 부모님이 자신을 죽은 형의 환생이라 여겨 어떻게든 기괴한 행동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했으며 죽음과 건강에 집착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항상 죽음을 의식하면 주변과 삶이 더 짜릿하고 에로틱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던 그 다운 자화상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점차 호황을 맞은 뉴욕에서 달리는 영화와 패션, 광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며 가장 화려한 시간을 보냈다. 부유한 사교계 인물들의 초상화를 그리고 할리우드와 디즈니의 러브콜을 받았다. 텔레비전 쇼에 출현해 사차원의 언변과 몸짓, 화려한 스타일로 웃음을 주며 슈퍼스타가 되었다. 하지만 정작 과학과 신비주의, 종교를 주제로 한 다룬 이 시기의 작품들은 초기의 꿈의 그림들에 비해 비평계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여름을 보냈던 고향 피게레스에서 달리는 그만의 초현실적인 공간을 구축하고 상상을 실현시킨 이벤트와 파티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달리의 기괴함에 헛웃음이 나오면서도 억누름 없이 표현한 그의 자유와 작업에서 더없이 성실했던 그의 태도에 부러움도 들었다.


“사실 나는 일생 동안 ‘정상성’이라는 것에 익숙해지는 게 몹시 어려웠다. 내가 접하는 인간들,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인간들이 보여주는 정상적인 그 무엇이 내게는 혼란스러웠다. 내 생각에는 생길 수도 있는 일들이 절대로 생기지 않는 것도 의문이었다. 나는 인간이 언제나 가장 엄격한 순응주의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인간 존재가 개인화되지 않는 정도가 너무나 심한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달리는 자화상으로 왜 팬지꽃을 골랐을까? 예로부터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게 했던 팬지는 특히 한 여름에 고개를 떨군 모습이 골똘히 생각하는 사람 같아서 '생각'을 뜻하는 프랑스어 'pensée'에서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이제 뒤쪽에 돌 위에 앉아 턱을 괴고 생각하는 인물이 연결된다. 그의 온몸에서 뻗어나가는 선들은 열정적인 탐구와 고뇌의 흔적일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 알브레히트 뒤러의 <멜랑콜리아>(1514)에서 ‘우울’을 상징하는 여인은 창조의 도구들 사이에서 턱을 괴고 앉아 이렇듯 고뇌하는데, 이는 화가의 상징적인 자화상이자 천재적인 이들의 정서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팬지꽃 위로 황톳빛의 불타오르는 뇌는 65세의 예술가가 여전히 열정적으로 꿈꾸고 생각하며 창조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머리카락처럼 뻗어나간 다섯 개의 작은 꽃은 그의 내면에 자리한 다양한 얼굴을 암시한다. 팬지는 여자처럼 가꾸는 남자를 뜻하기도 하는데, 외모에 관심이 많고 유명인처럼 뽐내기를 즐겼던 달리의 성향과도 잘 어울린다. 꽃을 보면서도 자기를 보았던 노년의 달리는 무한한 상상력을 가진 멋쟁이 창안가로 자신을 제시하고 있다. 나는 어떤 꽃으로 어떤 사람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 강준만, 『인문학은 언어에서 태어났다』 참고


Lilium Musicum (백합)과 Dahlia Unicornis(유니콘)
Luna Geminata(달)과 Pisum Sensuale(코베아, 입술)


«달리 꽃들» 이미지 출처

https://www.kollerauktionen.ch/fr/354073-0001-1209-SALVADOR-DAL_.-Flordali-_Flora-1209_531402.html?RecPo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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