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이삭 레비탄, <저녁의 들판>

: 묵묵히 땅을 고르는 준비

by 권연희


어떤 그림이 계속 떠오르는 건 그때 갈망하거나 고민하는 무언가와 맞닿아 있는 경우가 많다. 며칠 전 우연히 마주친 레비탄의 그림도 산책길에 말을 걸었다. 아무 생각 없이 두리번거리며 걷고 싶지만, 자꾸 그러면 어쩔 수가 없다. 상상 속에서 그림을 마주하고 조용히 기다린다. 그림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질문한다.

이삭 레비탄, <저녁의 들판>, 1883년, 카드보드에 유채, 43.3 x 67cm,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모스크바


드넓은 들판과 하늘이 거의 전부인 이 그림은 금세 마음을 잔잔하게 만든다. 물론 이 광경을 돋보이게 하는 건 저기 말을 앞세워 쟁기질하고 있는 농부다. 뒤쪽에 모여든 새들과 멀리 지평선에 솟아오른 뭉게구름도 한적한 풍경에 정취를 더한다. 하늘은 황혼의 빛으로 물들었고, 살짝 기울어진 밭에는 벌써 어둠이 내려앉았다. 이 작품은 19세기말 러시아 제국의 풍경화가 이삭 레비탄(Isaac Levitan, 1860~1900)<저녁의 들판>이다.


거의 아무것도 없는 시골 풍경은 복잡한 마음을 그렇게 비워준다. 결국 눈길은 곧게 선 말과 등이 굽은 농부의 작은 실루엣으로 향한다. 둘은 아침부터 해 질 녘까지 부지런히 일했을 것이다. 고랑으로 울퉁불퉁한 전경의 너른 밭이 이를 증명한다. 일 년의 반을 차지하는 러시아의 길고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농부는 씨를 뿌리기 전에 이렇게 땅을 고르고 뒤집어야 한다. 흙을 갈아엎으면 영양소를 머금은 흙이 신선한 공기를 만나 곡식이 더 잘 자란다.


이른 새벽 이곳에 홀로 선 농부를 떠올려본다. 압도적인 일감 앞에서 막막하고 두려웠을까. 아니면 오랜만에 농사를 시작하는 마음에 바쁘고 설레었을까. 그는 감정과 생각에 잠기기보다 우선 한걸음 한걸음 움직였을 것이다. 자신의 발걸음이 흙을 비옥하게 하고 봄의 온기를 불어넣으며 씨앗을 맞을 준비를 도와주니까. 곡식을 성장시키는 해와 비는 하늘의 뜻이지만, 밭을 어떻게 준비하고 어떤 씨를 뿌릴까는 인간에게 달려 있다. 아직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묵묵히 땅을 고르는 준비의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다. 화가의 지속적인 드로잉, 피아니스트의 반복적인 연습, 축구선수의 수많은 슈팅처럼. 그 긴 준비의 시간이 그만의 캐릭터를 만든다. 그리고 말처럼 힘이 되는 누군가가 곁에 있다면 그 여정은 더 수월할 것이다.


이 그림은 핍박받는 유대인이자 십 대에 고아가 된 레비탄이 주변의 도움으로 십여 년간 모스크바 예술학교를 근근이 다니며 졸업할 때 완성한 작품이라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이동파 전시에 출품해 상을 받고, 대부호 트레티야코프가 컬렉션 하기도 했다.) 이제 그도 본격적으로 씨를 뿌릴 때가 되었다.


그림은 또한 시간의 흐름과 삶의 순환을 성찰케 한다. 해는 저물어가고, 황량한 들판에 새들이 모여든 곳에는 먹잇감인 사체가 있을 것이다. 높이 솟아오른 구름은 끊임없이 변할 것이고, 지평선에서 등대처럼 반짝이는 러시아 정교회 성당의 금빛 종탑은 영적인 삶을 묵상하게 한다. 이 황량하고 광활한 풍경은 말한다. 죽음은 멀지 않고 모든 것은 때가 있으니 성실히 움직이라고. 봄의 온기가 스며드는 시기, 땅과 하나 되어 묵묵히 일하는 농부의 모습이 아름다운 이유다. 해가 지면 농부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고,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런 존재를 은유하듯 여기 생명은 흙빛을 띄고 있다.




이삭 레비탄(Isaac Levitan, 1860~1900)은 19세기 러시아 제국의 풍경화가. 스승 알렉세이 사브라소프(1830~1897)가 창시한 '무드 풍경화(mood landscape)'를 발전시켜 서정적이고 시적인 풍경화로 이전에 다룬 이반 시슈킨(Ivan Shishkin, 1832~1898)의 자연주의 풍경화와 함께 러시아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https://brunch.co.kr/@imlostinart/76


* 이삭 레비탄의 나무 그림들을 다음에 자세히 다룰 예정입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