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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보나르, <잠든 여인>

: 젊은 날의 몽상으로

by 권연희


청년 시절의 환락과 불안이 뒤섞인 꿈을 꾸다가 문득 깬 날이 있다. 쉬이 잠들지 못한 새벽에, 최근에 본 보나르의 그림이 떠올랐다. 꿈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오후에 본 영화 때문이었을까. 내가 태어날 즈음, 부모님의 청년기가 궁금해 골라본 영화 <바보들의 행진>(1975)은 여러모로 긴 여운을 남겼다. 맥주에 담배 연기 자욱하고 이상과 현실 사이 고민의 말들이 허공을 맴돌고 객기와 어리숙함이 버무려진 대학시절은 놀랍게도 우리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두운 유신 시대라는 배경 때문에 이들의 명랑함과 방황이 좀 더 무력하고 가련하게 보였을 뿐. 그럼에도 청춘이란, 그때의 몽상과 좌절조차도 얼마나 아름다운가, 절감할 수 있었다.


뮤즈/

피에르 보나르, <잠든 여인>, 1928년, 캔버스에 유채, 50 x 71cm, 개인소장

신비라는 이름의 뮤즈/

창가에 앉아 단잠에 빠진 여인이 있다. 짧은 머리, 민소매 차림의 여인은 팔에 얼굴을 기댄 채 따사로운 여름 햇살을 맞고 있다. 그녀가 빨리 깨지 않기를 바랄 정도로 화면은 달콤하고 몽환적이다. 나른하고 조용한 오후, 창 너머에서 새의 지저귐이 들려온다.


평범한 이 장면을 섬광처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오묘한 색채와 조화로운 구성이다. 특히 화면 구석구석에 스며든 노랑은 빛을 내뿜으며 진동한다. 등나무 의자와 기댄 팔에서 불타오르는 진노랑, 민소매 옷의 레몬빛, 여인의 살과 벽에서 일렁이는 노란빛은 보라와 연두, 갈색과 회색 등과 어우러져 화면을 신비롭고 황홀하게 만든다. 주황과 보라, 하늘색의 창틀과 하얀 라디에이터도 구성을 조화롭게 만든다. 뭉툭한 붓질을 천천히 쌓아 올려 구축한 이미지는 옛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하고, 흐릿한 기억을 불러오듯 아련하다.


이 그림은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 1867~1947)가 남프랑스 르 카네의 시골집에서 졸고 있는 부인 마르트의 모습을 담아낸 것이다. 부유하고 교양 있는 가문 출신의 보나르는 자유분방한 예술가의 삶을 열망하며 법학도에서 화가의 길로 전환했고, 1893년 파리에서 만난 아가씨 마르트는 평생의 연인이자 뮤즈가 되었다. 보나르가 자주 그린 실내 풍경에서 그녀는 차를 마시거나 상념에 잠겨 있고, 몸을 씻거나 단장하는 등 친밀하고 일상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대체로 얼굴이 잘 보이지 않거나 불분명하게 묘사되어 나이나 감정을 가늠하기 어려운 편이다.


마르트는 미스터리의 여인이었고, 보나르는 그런 그녀의 신비에 이끌렸다.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을 열여섯 고아, 마르트 드 멜라니(본명 마리아 부르생, 1869~1942)라 소개했지만, 수십 년 후 혼인 신고할 때 모두 거짓임이 드러난다. 신경성 결핵(혹은 천식)을 앓았던 그녀를 위해 보나르는 시골을 자주 여행했고, 결국 1912년 파리 북부 센 강변에 정착했다. 보나르는 나비파 화가들은 물론 마티스와 근처 지베르니에 있는 모네와 교류하며 자기만의 양식을 찾아나갔다. 1920년대 초 중년의 화가는 한 젊고 발랄한 모델이자 화가와 사랑에 빠진 적이 있다. 하지만 관계를 정리하고 1925년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오랜 동반자이자 뮤즈인 마르트와 결혼했다. 다음 해 부부는 남프랑스로 내려와 '작은 숲'이라 이름 붙인 집으로 이주해 남은 여생을 보냈다. 그런데 몸과 마음의 병이 악화된 마르트는 신경쇠약과 인간 혐오로 폐쇄적인 삶을 살았고, 보나르는 어쩔 수 없는 은둔 생활에 고통받았다. 마르트는 치료를 위해 목욕과 위생에 더욱 집착했고, 보나르는 이런 그녀를 계속 캔버스에 담아냈다.


이 즈음 제작된 <잠든 여인>을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60세경의 보나르가 담아낸 마르트의 모습이다. 그녀는 노년이 아닌 소녀처럼 앳된 모습이다. 빛과 인상에 대한 관심으로 최후의 인상파 화가로도 여겨지는 보나르는 그들처럼 현장에서 작업하지 않고, 드로잉과 기억에 의존해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은 특이하게 작업실에서 잠든 마르트를 관찰해 그리면서 옛 기억을 떠올려 젊은 날의 얼굴을 담았다.


잠 못 드는 새벽에 보나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최근에 부쩍 흰머리가 늘고 체력도 예전 같지 않은 데다 눈이 금방 침침해져서 의기소침한 순간들이 있었다. 전날 옛 영화를 보면서 찌질하고 바보 같은 질풍노도의 청춘일지라도 얼마나 그립던지. 그 시절의 사랑과 이상, 방황과 좌절, 실수와 질문들은 어리숙하면서도 거침없고 활기 가득해 얼마나 푸르던지. 노년의 화가도 지금과는 달랐던 어린 날의 마르트가 그리웠을까. 작업실 창가에서 잠든 부인을 바라보다 옛 모습이 섬광처럼 스쳐갔던 것일까. 젊은 날 그림들에서 그녀의 몸짓과 표정은 자유롭고도 신비롭다. 어쩌면 그런 그녀를 마주했던 그 시절의 자신, 청춘의 감정과 이상이 그리웠을 것이다.


보나르는 그립지만 돌아갈 수 없는 과거, 플래시백과 같은 회상을 오묘한 색채 언어를 통해 표현했다. 여름날 오후의 일렁이는 햇살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젊은 날의 몽상으로 화가를 이끌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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