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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연희 Jan 12. 2024

에드바르 뭉크의 나무

: 살아 진동하는 내면의 풍경


연이어 내린 눈은 연말을 특별하게 만들면서 뭉크가 자주 그린 겨울 풍경화를 떠올리게 했다. 뭉크는 인간의 불안과 고통, 죽음을 표현한 그림으로 유명하지만, 북구의 자연과 나무를 소재로 한 작품도 상당수에 달한다. 불행한 가정환경과 관계는 그를 인간 실존의 어두운 면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40대에 몸과 정신이 완전히 무너졌을 때 뭉크는 자연의 생명력과 건강에 주목하고 회복하면서 80세까지 왕성하게 작업했다. 최근에 뭉크의 자연 풍경화가 전시되며 그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후반기 작품이 재조명되고 있다. 뭉크가 조금씩 다른 결로 이야기한 나무, 좀 더 폭넓게는 자연을 어떻게 인식하고 표현했는지 그 변화를 따라가 보려고 한다.


에드바르 뭉크, <백야>, 1901년, 캔버스에 유채, 115.5 x 111cm, 뭉크 미술관, 오슬로


눈 내린 겨울밤의 풍경은 한기로 가득하다. 전면에는 파수꾼처럼 우뚝 선 소나무 몇 그루가, 중경에는 톱니 같은 가문비나무 숲 사이로 작은 집이 보인다. 그 뒤 바다와 멀리 보이는 언덕으로 형성된 만은 이곳이 뭉크의 나라 노르웨이의 피오르드임을 짐작케 한다. 하얀 눈은 파란 밤 풍경에 밝기를 더한다. 노르웨이의 겨울은 해가 금방 지고 눈이 잦은 데다 제목처럼 백야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몽글몽글한 소나무, 뾰족뾰족한 가문비나무는 추위에도 끄떡없는 나무의 생명력을 전한다. 나무의 그림자를 보면 왼쪽 하늘에서 달이 밝게 빛나고 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과 얼어붙은 바닷물, 살아 일렁이는 듯한 나무는 겨울밤의 고요와 신비를 전한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는 가족의 질병과 광기, 죽음으로 얼룩진 불행한 유소년기를 보냈다. 5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9년 뒤 목격한 누이의 죽음은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군의관이었던 아버지는 점점 광적인 신앙으로 다섯 아이를 훈육했고, 이후 아버지와 정신병을 앓던 여동생(1889), 남동생(1895)도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허약한 체질에 병을 자주 앓았던 뭉크는 학창 시절에도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 초기작은 실내를 배경으로 그가 경험한 죽음과 공포를 주로 다루고 있다.   

  

“내 예술은 실제로 질병에 대한 성찰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내게 공포와 고통이 없었다면 방향키 없는 삶과 같았을 것이다”  - 에드바르 뭉크



에드바르 뭉크, <달빛에 사이프러스>, 1892년, 캔버스에 유채, 81 x 54cm/ 빈센트 반 고흐, <사이프러스>, 1889년, 93.4 x 74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뭉크는 미술을 공부하면서 크리스티아니아(현 오슬로)의 보헤미안 지식인들과 교류했다. 부르주아 사회의 도덕과 관습을 비판하며 독자적인 삶을 추구했던 이들의 태도는 화가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 19세기말 후원을 받아 간 파리에서 뭉크는 다양한 미술 사조를 접하며 감각을 일깨운다. 특히 고흐의 밝고 격렬한 붓질, 고갱의 상징적인 언어와 채색은 뭉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뭉크가 파리 시절에 그린 <달빛의 사이프러스>는 이 나무를 반복적으로 그렸던 반 고흐의 영향을 보여준다. 고흐는 발작으로 요양원에 있을 때 시골의 사이프러스를 여러 차례 그렸다. 하늘과 구름, 주변의 풀과 함께 요동치며 솟구쳐 오르는 사이프러스는 불꽃처럼 타오르는 화가의 열정을 드러낸다. 반면 뭉크는 깊은 밤 달빛 아래 도시의 사이프러스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창틀에는 두 화분이 나란히 놓여있고, 맞은편 건물의 창들에선 따듯한 빛이 새어 나온다. 길쭉하고 가는 몸체의 사이프러스는 마을에 홀로 서 있어 왠지 고독해 보인다. 힘을 뺀 붓질로 파랗게 물든 화면은 창가에서 바라보는 이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전한다.   



에드바르 뭉크, <절규>, 1893년, 91 x 73.5cm, 노르웨이 국립미술관

청년 시절 뭉크는 고통의 진원지였던 고향을 떠나 여기저기를 떠돌았다. 주로 베를린에서 지내며 지식인들과 교류하고 자신의 언어를 확립해 나간다. 1892년의 전시에서 뭉크의 거칠고 음울한 그림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며 일주일 만에 막을 내렸다. 이 스캔들로 뭉크는 오히려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유명세를 떨치게 된다. 이어 <절규> <불안>, <우울> 등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이 탄생한다. 특히 <절규>는 자연을 관통하는 비명을 느꼈던 화가의 경험을 표현한 것이다. 다리를 건너는 인물은 고독과 공포에 괴로워하는데, 이는 굽이치는 피요르드와 핏빛 하늘에서도 느껴진다. 뭉크에게 주변 환경은 화가 혹은 등장인물의 감정과 영혼의 상태를 반영하며, 외부의 풍경은 내면의 풍경인 셈이었다.


 


에드바르 뭉크, <신진대사>, 1898-9년, 캔버스에 유채, 175 x 143cm, 뭉크 미술관, 오슬로

뭉크는 “삶과 사랑, 죽음을 노래한 시”로 요약한 생의 프리즈 연작을 30년에 걸쳐 그렸다. 여기서 여성은 <흡혈귀>나 <살로메>처럼 강력한 유혹의 힘으로 남성을 무너뜨렸고, 사랑의 줄다리기를 하며 수많은 <질투>의 노예가 되게 만들었다. 오슬로와 베를린에서 자유분방한 여인들과의 연예가 비극으로 끝나면서, 뭉크의 육체와 정신은 점점 망가져갔다. 세기말은 그가 교류했던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1879)에서처럼 여성 해방의 물결이 일던 시기이기도 했다. 결국 뭉크에게 여성과 사랑은 고통과 파멸의 근원으로 자리 잡는다.


뭉크가 생의 프리즈 연작에서 가장 핵심적인 작품이라 말한 <신진대사 Metabolism>는 뭉크의 생명관과 남녀관을 담고 있다. 알몸의 남녀는 한눈에도 선악과를 사이에 둔 아담과 이브를 연상시킨다. 독특한 목제 프레임 하단에는 나무뿌리 양 옆으로 인간과 동물의 해골이 있다. 작품 제목처럼 나무는 죽음의 잔해 속에서 뿌리로부터 영양을 얻어 물질대사를 통해 생명을 유지하고 성장한다. 나무 몸통에는 희미하게 태아가 보이는데, 남녀의 결합을 통한 생명의 탄생을 암시한다. 나무가 중심에 있는 이 그림은 여러 생물의 연결성, 삶과 죽음의 순환을 상징적으로 이야기한다.



에드바르 뭉크, <새 눈>, 1900-1년, 캔버스에 유채, 73 x 83cm, 뭉크 미술관, 오슬로

1880, 90년대 애증의 아버지와 정신병을 앓던 여동생, 유일하게 결혼한 남동생까지 세상을 떠났다. 생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 뭉크는 판화 작업을 시도했다. 순탄하지 못한 연예 때문에 그는 더욱 술에 의존했고 정신도 쇠약해졌다. 그런 와중에 1900년경 오슬로에 온 뭉크는 고향의 자연에서 큰 위안과 영감을 얻는다. 이때 노르웨이만의 피요르드와 겨울 풍경화가 다수 제작된다.    


<새 눈>은 막 눈이 내린 가로수길의 풍경이다. 인적 없는 굽이진 길에 높이 솟은 가문비나무는 도도한 초록의 활기를 전한다. <겨울밤>은 앞서 살펴본 <백야>처럼 하얀 눈과 나무, 피요르드의 바다가 어우러진 매혹적인 풍경화다. 1890년대 뭉크는 파란 톤의 밤풍경을 많이 그렸는데, 삶의 고뇌와 우울로 잠 못 들던 화가의 마음을 반영한다. 이는 뭉크가 좋아하고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던 상징주의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1842~1898)의 시 <쪽빛 L'azur>(1864)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도 지적된다. 푸른색에서 검정으로 변하는 밤하늘을 보고 시인이 느낀 갈망과 죽음의 두려움을 뭉크도 공감했다는 것이다.


에드바르 뭉크, <겨울밤>, 1900년경, 캔버스에 유채, 81 x 121cm, 취리히 미술관


에드바르 뭉크, <기차 연기>, 1900년, 캔버스에 유채, 109 x 84cm, 뭉크 미술관, 오슬로


<기차 연기>는 다른 계절과 분위기의 피요르드 풍경화다. 전면에 초록 소나무와 기차의 연기는 풍경에 생기와 활기를 더한다. 해 질 녘 오묘한 색채로 물든 하늘과 바다는 그 아름다움에 계속 음미하게 된다. 이 그림은 독특하게 나무와 흙, 공기, 물 등 자연을 구성한 여러 요소들이 각각의 생명력을 발산한다.  


 “자연은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영혼 안의 그림, 눈 뒤에 그림인 것이다."

- 에드바르 뭉크



에드바르 뭉크, <튀링겐 숲>, 1904년, 27.5 x 20.8cm, 달라스 미술관/  <가로수길의 새 눈>, 1906년, 80 x 100cm, 뭉크 미술관


1900년대 초 독일에서 뭉크의 작품이 판매되고 초상화를 포함해 주문도 늘어난다. 하지만 알코올 중독과 발작이 계속되자 뭉크는 자연 속에서 휴양하며 몸을 회복하기 위해 힘쓴다.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의 추종자이자 그의 사후 초상화(1906)를 그리기도 했던 뭉크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5)를 반복해서 읽었다고 한다. 몸과 삶을 긍정하고 초인의 이상을 가르쳤던 책은 뭉크에게 치유의 의지를 더해주었다. 1907년 뭉크는 독일의 온천지 바르네뮌데에서 요양하면서 해수욕하는 남성들을 그리며 강한 남성성을 예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해 쓰러져 코펜하겐의 병원에서 8개월간 정신 치료를 받는다.


건강이 악화된 시기의 (위의) 풍경화에서 자연은 날 것의 힘이나 유령 같은 어두움으로 보는 이를 불안하게 한다. 뭉크는 보통 오랜 관찰을 통해 이런저런 인상들을 자기 내부에 흡수하다가 모든 것을 쏟아내며 며칠 혹은 몇 시간 만에 작품을 완성했다. 화가의 경험과 감정에 따라 형태는 단순화되고 선은 마음 따라 흐르며 색채는 강화되었다. 채색은 평면적이지만 공간은 원근의 깊이감을 주어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자연의 깊이를 강조했다. 뭉크는 계절과 분위기적인 요소를 특히 중시했고, 풍경을 통해 내면의 상태나 심리를 전달했던 것이다.  



에드바르 뭉크, <눈 내린 숲>, 1912년, 캔버스에 유채, 109 x 129cm, 뭉크 미술관, 오슬로

1909년 노르웨이에서의 전시가 주목을 받으며 뭉크는 고국에서도 인정받는다. “자연이 나의 예술에 중요하기 때문에 나는 노르웨이에 가지 않을 수 없다”며 그는 오슬로 근교의 크라게뢰에 정착한다. 이후 뭉크는 이름이 의미하듯 술을 끊고 여자들을 멀리하며 수도승처럼 지냈다. 본능적으로 자연과 인간의 생명력에 몰두하면서 점차 원기도 회복되었다. 오슬로 대학의 대강당 아울라 벽화 프로젝트(1911-16)에서 생명의 근원인 광대한 <태양>을 중심에 두었다. 또한 자연과 교류하는 시골의 농부와 인부들을 그리면서 노동의 기쁨과 건강한 삶을 노래했다. 이때의 작품 <눈 내린 숲>을 보면 뭉크의 시선은 단순하고 풍경은 편안해졌다.





에드바르 뭉크, <바람 속에 만개한 과일나무들>, 1917-9년, 캔버스에 유채, 75.5 x 115.5cm,  뭉크 미술관, 오슬로


1916년 53세의 뭉크는 오슬로 외곽 에켈리에 거대한 영지를 구입해 남은 생을 보낸다. 온갖 나무와 꽃, 가축이 함께한 이곳은 그에게 생명이 가득한 피난처였다. 말년까지 화가는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정원과 근처 숲 풍경을 자주 다루었다. <바람 속에 만개한 과일나무들>을 보면 뭉크의 내면이 더 밝고 풍요로워졌음을 느낄 수 있다. 풀과 나무를 뒤흔드는 바람으로 인해 분출하는 생명의 에너지가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바람이 불어야 식물이 잘 자라듯이 뭉크도 간혹 찾아오는 마음의 풍파 속에서 흔들리며 생산력을 높였다. 에켈리에서 그는 비바람이 불어도 노천에서 작업하기를 즐겼다. 뭉크는 작품을 자식으로 여길 만큼 아껴 판매도 제한했지만, 작품이 거친 환경과 날씨에 상하는 과정 또한 작품의 일부로 여겼다.



에드바르 뭉크, <봄의 느릅나무 숲>, 1923-25년, 캔버스에 유채, 154 x 165cm/ <가을의 느릅나무 숲>, 1919-20년, 100 x 120cm


뭉크는 1919년 유럽을 휩쓴 스페인 독감에도 살아남았다. 청년 시절 유럽을 방랑하던 화가는 에켈리에서 거의 은둔하며 작업에만 몰두했다. 주변의 숲을 자주 산책했고, 특히 울퉁불퉁한 느릅나무(elm) 몸통을 즐겨 그렸다. 때때로 그 형상에서 동물이나 사람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도 한다. 이는 자연의 순환적 재생과 변형(metamorphosis)에 대한 뭉크의 관심을 반영한다. 색채의 스펙트럼이 가장 넓은 가을의 숲은 그의 그림에서 색과 선의 놀이가 펼쳐지는 장이 되었다. 같은 계절도 무수히 다른 형과 색으로 표현되어 자연의 변화무쌍함과 생명력을 전한다.  



에드바르 뭉크, <겨울밤>, 1923년, 캔버스에 유채, 100 x 80cm, 뭉크 미술관, 오슬로


그가 여전히 즐겨 그린 겨울밤 풍경은 어두운 푸른 색채 때문인지, 아니면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 때문인지 은둔자로 살았던 노년 화가의 쓸쓸함이 전해진다. 뭉크의 영혼은 여전히 떠돌며 그림을 통해 자연과 인간, 자기 자신(자화상)을 탐험해 나갔다. 그의 그림은 세기말의 불안과 비관의 시대를 거쳐 20세기 엄청난 산업화와 이어진 전쟁과 혁명, 파시즘 등 불안한 시대도 반영하고 있다. 개인적인 고통과 감정에서 시작한 작업은 점차 시대를 넘어선 보편의 이야기가 되었다.  

 

에드바르 뭉크, <정원의 사과나무>, 1932-42년, 캔버스에 유채, 100.5 x 77.5cm, 뭉크 미술관, 오슬로


말년의 <정원의 사과나무>에서 열매 가득한 사과나무는 공작새처럼 자태를 뽐낸다. 뒤쪽에 뭉크의 빌라와 그 앞에 한 커플이 보인다. 에켈리의 풍요로운 자연 풍경은 마치 에덴동산을 떠올리게 한다. 이때쯤 뭉크는 시력이 악화되어 한쪽으로 흐릿하게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명랑하고 장식적인 풍경화는 생명이 주는 풍요와 그리기에 몰두한 화가의 기쁨을 전달한다.  


뭉크는 20세기 초 인상주의와 상징주의, 표현주의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표현을 추구했던 화가다. 독일을 기반으로 그곳의 컬렉터와 화가들의 찬사를 받으며 독일 표현주의를 탄생하게 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후 나치에 의해 퇴폐미술로 규정되며 작품이 수난을 겪기도 했다. 다행히 뭉크가 소유했던 작품은 모두 오슬로 시에 기증되었고, 최근 신축한 미술관은 그의 전작품을 활용해 다양한 전시를 풀어내고 있다. 고통으로 절규하는 자신을 그렸던 병약한 화가가 긴 생애 동안 활기차게 작업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연 속에서 살며 그 생명력을 그려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에드바르 뭉크, <붉은 집과 가문비나무> 1942-3년, 캔버스에 유채, 93.5 x 118cm, 뭉크 미술관, 오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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