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닐은 이 한 점의 자화상을 통해 알게 된 작가다. 단번에 이 화가도, 그녀의 작품도 대단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웃집 할머니처럼 포근한 얼굴인데 아무렇지도 않게 옷을 벗고 앉은 부조화가 흥미로웠다. 강렬한 색채의 조화와 흔들리면서도 힘 있는 터치로 슥슥 그려낸 듯한 솜씨는 오랜 작업으로 쌓은 내공일 터였다. 인상으로 보아 화가는 긴 생애 동안 작업을 꽤 즐기며 느긋하게 살아왔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결론적으로 내 예감의 반은 빗나갔다.
노년의 화가는 선명한 군청색 줄무늬 소파에 앉아 있다. 하얀 솜털 같은 머리는 단정하게 말아 올렸고, 안경을 쓴 얼굴은 붉게 물들었다. 평범한 할머니 같은데 옷을 전혀 걸치지 않고 태연하게 앉아 있다. 어깨는 앞으로 말렸고 가슴은 길게 늘어진 데다 두리뭉실한 배는 푸근한 인상을 더한다. 유일하게 두 손에 든 붓과 하얀 헝겊은 그녀가 여전히 작업하는 화가임을 말해준다. 두 발을 디딘 바닥은 독특하게 각각 노랑과 초록으로 나뉘어 채색되었다.
앨리스 닐(Alice Neel, 1900~1984)은 20세기가 시작되는 1900년 필라델피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20대에 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이때 만난 쿠바 태생의 화가와 결혼해 두 딸을 낳았다. 한 살도 안된 첫 딸을 디프테리아로 잃고, 얼마 후에 남편은 작은 딸을 데리고 쿠바로 돌아가 버렸다. 홀로 남게 된 닐은 신경쇠약으로 여러 차례 자살을 기도하다 1년을 요양원에서 보낸다.
대공황 시기인 1930년 초반 뉴욕에 정착한 닐은 공공사업진흥국(WPA, Works Progress Administration)에 소속되어 도시 풍경을 기록하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그녀는 뉴욕의 거리와 사람들을 그리면서 사회 현실에 눈뜨고 주변부의 다양한 삶을 들여다보게 된다. 이때 만났던 남자들과의 관계도 순탄치 않았다. 3년을 함께 살았던 뱃사람은 홧김에 그녀의 그림을 불태워버렸다. 이후 닐은 나이트클럽 가수, 유부남인 영화감독과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낳았다.
1939년 닐은 스페인 할렘(뉴욕 북동부)으로 이사했다. 그녀는 평생 작업실 없이 집에서 아이를 돌보며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첫째 아들 하틀리가 흔들 목마를 타는 모습(1943)은 누가 봐도 사랑스럽다. 그런데 어딘가를 응시하는 흔들리는 눈빛은 불안한 인상도 남긴다. 뒤쪽 거울에는 연두색 옷을 입은 여인이 보인다. 닐은 벨라스케스의 유명한 걸작 <시녀들>(1656)을 인용해, 화면 앞에서 그림을 그리는 자신을 암시했다. 그녀는 거의 홀로 두 아들을 키우면서 늘 육아와 생계, 작업 사이에서 분투했다. 스페인 할렘에서 20여 년을 살면서 닐은 가까운 이웃들, 특히 동네 엄마와 아기들, 거리의 노동자와 활동가들을 그렸다. 빈민가인 데다 대공황으로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에 풍경도 사람도 우중충하고 심각한 분위기다.
1960년대 닐은 뉴욕의 어퍼 웨스트사이드 구역으로 이사한다. 이제 이 지역에 거주하는 예술가나 갤러리스트, 엘리트 작가 등이 초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더불어 인권 운동가나 페미니스트 등 카운터 컬처의 활동가나 퀴어 아이콘, 게이 커플, 성산업 종사자 등의 주변인들도 그녀 앞에 앉았다. 사회 분위기와 모델이 바뀌자 닐의 초상화는 밝고 감각적이면서도 세련되게 변한다. 닐은 그들을 자신의 아파트로 초대해 무의식적으로 그들 특유의 포즈를 취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며 편안하고 거리낌 없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모델을 섰던 사람들은 그녀의 마법에 걸려 홀린 듯이 의자에 앉아 포즈를 취하거나 옷을 벗었다고 고백한다. 닐은 그들의 녹록지 않은 삶, 열망과 좌절을 들었고 이를 초상화에 녹여냈다.
앨리스 닐은 초상화에 각 사람만의 스타일과 성격, 그의 세계와 관계를 담아냈다. 사랑하는 가족은 가장 자주 그렸던 대상이다. 흔들 목마를 탄 꼬마 하틀리는 (중간에) 이제 멋진 남성으로 성장해 고양이와 함께 앉았다. 그가 사귀었던 (노란 옷의) 여자 친구도 친구와 함께 <웨즐리 소녀들>의 모델이 되어주었다. 둘의 개성이 드러난 포즈와 호기심 어린 눈빛, 패셔너블한 스타일로 인해 이 초상화는 전시장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오른쪽에 <재키 컬티스와 리타 레드>도 독특한 매력을 풍기는 2인 초상화다. 오른쪽에 화려한 화장에 튀는 여성은 한눈에도 여장 남자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시인이자 드래그 퀸(여장 차림을 좋아하는 남성 동성애자) 퍼포머, 앤디 워홀의 슈퍼스타인 재티 컬티스다. 금발의 친구 리타 레드를 한 발로 밀어내며 앞쪽으로 나와 스타일을 뽐내는 그의 모습은 어디서든 주인공이고자 하는 욕구를 드러낸다.
미완성으로 남은 <흑인 소집병>은 그 사연이 의미를 더해준다. 1965년 닐은 제임스 헌터라는 청년을 길에서 우연히 만나 모델이 되어 줄 것을 부탁했다. 그 해 베트남 전쟁에 징집된 그는 한 손으로 턱을 괘고 복잡한 생각에 빠져있다. 첫날 닐은 전체적인 윤곽을 잡고 얼굴과 한 손을 채색했다. 그런데 헌터가 갑자기 그 주에 베트남으로 떠나게 되었고, 두 번째 만남을 기대하던 닐은 이대로 초상화를 끝냈다. 전쟁 이후 그를 여러모로 수소문해 보았지만 어떤 소식도, 단서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결국 청년의 몸은 실체를 온전히 감각할 수 없는 윤곽으로 남게 되었다.
닐의 모델은 무명의 사람에서 유명인까지 망라한다. 1970년 팝 아트의 제왕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이 놀랍게도 옷을 벗고 그녀의 모델이 되었다. 워홀은 항상 가발과 메이크업, 선글라스로 자신을 포장하고 무심한 듯 도도한 페르소나를 유지해 온 유명인사였다. 여러 자화상에도 시대의 아이콘들처럼 기억되고 싶은 그의 욕망이 담겨있다. 그런 워홀이 항복하듯 상체를 드러낸 것이다. 창백한 피부와 늘어진 가슴, 토르소를 좌우로 가르는 큰 수술 흉터와 허리를 감싼 보호대가 눈에 띈다. 이년 전에 워홀은 팩토리(공동 작업실)의 일원이자 급진적 페미니스트에게 저격당해 거의 죽었다가 살아났다. 숨기고 싶은 부분을 열어 보이고 눈을 감아 내면으로 침잠한 모습은 대중매체에서 셀럽처럼 행사하던 것과는 다른 고립되고 상처 입은 내향적인 예술가를 보여준다.
아기를 병으로 잃고 빼앗기고 또 낳고 키워온 닐은 평생 모성을 주제로 다루었다. 그림에서 수유하거나 아기를 돌보는 여성들은 생명을 기르는 위대한 존재이면서도 고달프고 연약한 인간으로 묘사된다. 닐은 특히 벌거벗은 만삭의 몸을 종종 그렸다. 짧은 머리에 출산을 앞둔 화가 마가렛 에반스(1978)도 여느 모델처럼 의자에 앉았다. 다만 포즈를 취하기 어려워 중심을 잡기 위해 두 손으로 의자를 잡고 있다. 유두 주변은 짙어졌고 배는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피가 쏠린 다리는 붉게 물들고 몸 여기저기엔 핏줄이 곤두섰다. 그녀의 얼굴에는 새로 펼쳐질 세계에 대한 기대감과 두려움이 교차한다. 엄청난 몸의 변화와 모성이 뭔지도 모르고 아이를 맞이했던 그 어리둥절하고 힘겨웠던 시절이 떠오른다. 이례적으로 뒤쪽에 배치된 거울이 눈에 띈다. 그런데 거울은 현재가 아닌 세월이 훌쩍 지난 후의 그녀를 보여준다. 이처럼 닐은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순백의 볼륨 있는 전통적인 누드, 즉 남성의 시선에 대상화된 몸이 아닌, 공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여성의 몸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묘사했다.
자신을 ‘영혼의 수집가(collector of souls)’라 칭한 닐은 격변의 20세기인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 경제 호황과 대중문화의 물결, 저항의 비트 세대 등 흥미진진한 뉴욕의 다양한 계층과 부류의 초상을 남겼다. 인터뷰에서 “사람이 먼저다(People comes first)”라고 말했던 화가는 특히 자본주의와 정치적 이념, 주류 문화에 희생된 인간성, 개인에 집중해 왔다. 194,50년대 미술계에서는 거대한 캔버스에 액션 혹은 색면으로 감성을 담아낸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가 가장 미국적인 회화로 여겨지며 비평의 중심에 있었다. 196,70년대에는 팝아트와 미니멀리즘, 개념미술이 화단을 휩쓸었지만, 닐은 주류에 편승하지 않았다. 그녀는 “추상은 인간을 외면한다. 나는 휴머니즘을 지향한다”며, 초상화를 통해 “인간 존재의 위엄과 영원한 가치를 주장하려고 노력”했다. 닐은 사람을 사랑했고, 사람들을 통해 시대와 문화를 증언했다. 무엇보다 그녀의 초상화는 인물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 녹아있어 잔잔한 감동을 전달한다.
앨리스 닐은 1970년대부터 점차 평단에서 인정받기 시작해, 1974년 뉴욕의 휘트니 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 가졌다. 다음 해 그녀는 생애 최초의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을 그려온 75세의 화가는 어떤 자화상을 남길 것인가 무척 고민했을 것이다. 닐은 미술의 전통이나 사회적 인습에 순응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옷을 벗었다. 평생 이상화된 여성성에 대해 도전하며 여성의 몸을 있는 그대로 담아냈듯이, 화가도 늙어가는 자신을 솔직하게 내보인 것이다.
보통 모델을 앞에 두고 그렸던 닐은 (연필이 아닌) 자화상에 들고 있는 얇은 붓으로 바로 드로잉 했다. 자화상은 그녀의 시그너처 컬러인 아콰마린으로 외곽선을 그렸고, 좋아했던 줄무늬 의자를 선택했다. 붓을 닦을 때 쓰는 하얀 헝겊은 여기서 백기 마냥 항복의 의미로 읽히기도 한다. 닐은 “모델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나면 너무나 허전하고 두려워진다. 마치 폐허에 버려진 느낌이다.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이 가끔은 너무 어려웠다.”라고 고백했다. 평생 자신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기를 피했던 화가는 그 저항에 항복했다. 이제야 자신을 탐험해 볼 요량으로 모델로서 앉은 것이다. 별 어려움 없이 슥슥 그렸을 거라고 예상했던 자화상이 5년여에 걸쳐 완성된 것도 놀라웠다. 닐은 자화상의 얼굴이 이렇게 분홍인 것은 그리면서 거의 죽을뻔할 정도로 힘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자화상 작업은 그녀에게 큰 도전이었고, 자신을 돌아보는 과정은 고통의 시간이기도 했다. 누군가의 연인이었고 엄마이자 화가인 그녀의 긴 역사를 마주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담하고 사랑스러운 그녀의 인상은 긴 세월을 헤쳐온 내면의 강인한 힘을 전달한다.
처음에는 그냥 스쳤던 그녀의 발도 눈길을 끈다. 그녀의 왼쪽 발은 초록의 지평에 굳건히 내디뎠고, 노란 쪽에 놓인 오른쪽 발은 살짝 들려있다. 이제야 인정을 받고 성공의 영역에 들어섰지만 그녀는 여전히 붓을 놓지 않는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기에.
런던 바비칸 갤러리에서 올해 개최된 개인전 소개 영상에서 닐의 많은 작품을 보다 생동감 있게 볼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2g4GbxPmRqI
오슬로에 있는 뭉크 미술관에서의 최근 전시 <앨리스 닐 - 모든 인간은 하나의 우주>가 궁금하다면,
https://www.munchmuseet.no/en/exhibitions/archive/2023/alice-ne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