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는 실내 선반 위에 놓인 동그란 석조 프레임 안에 자신을 그려 넣었다. 화면 밖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차분하면서도 약간의 슬픔이 깃들어 있다. 살짝 벗어진 머리, 희끗한 눈썹과 콧수염은 노년으로 가는 그의 나이를 짐작케 한다. 하얀 레이스 칼라가 달린 검은 튜닉은 당시 부유한 사람들이 입던 단정한 차림새다. 그런데 뭔가 기묘한 점이 눈에 띈다. 그림 공간에서 뻗어 나온 화가의 오른손이 프레임 하단에 올려져 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이 세팅에서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아래 선반에 놓인 물건들은 이 초상화의 주인공이 화가임을 말해준다. 왼쪽에는 붉은 초크로 그린 드로잉과 자, 초크 홀더와 컴퍼스가, 오른쪽에는 팔레트와 붓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프레임 아래 라틴어로 쓰인 명문은 무리요가 아이들의 바람과 기도를 이행하기 위해 자기의 초상을 남겼다고 설명한다.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Bartolomé Esteban Murillo, 1617-1682)는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1599~1660)와 함께 17세기 스페인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다. 둘 다 세비야 출신으로 선배 벨라스케스가 마드리드에서 궁정화가로 일했다면, 무리요는 종교화로 명성을 떨치며 세비야의 대표 화가가 되었다. 무리요는 열 살경에 고아가 되어 불운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먼 친척에게 보내져 그림을 배워 화가가 되었고, 주로 세비야의 교회나 종교 단체의 주문을 받았다. 그래서 그의 대표작은 성경과 성인 이야기, 그리고 성모 마리아를 주제로 한다.
무리요가 유명해지기 시작했던 1650년경의 <작은 새가 있는 성가족>을 살펴보자. 작은 새를 손에 쥔 귀여운 아기 예수는 아버지 요셉에게 기대어 강아지와 놀고 있다. 오른쪽에 놓인 장비들은 요셉이 목수임을 알려주는 동시에 예수가 미래에 겪게 될 고난을 암시한다. 반짇고리를 앞에 두고 실을 잣는 마리아는 근면하고 자애로운 어머니로 묘사되었다. 이 그림은 위엄 있는 성화라기보다 당시 이상적인 서민 가정의 모습을 담아낸 것처럼 보인다. 5년 전에 결혼해 여러 자녀를 두었던 화가에게 이런 풍경은 낯설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성가족의 일상을 자연스럽고 따듯한 시선으로 그리면서 부모의 사랑과 역할을 표현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무리요가 여러 번 그렸던 ‘무염시태(immaculate conception)’는 그를 유명하게 만든 대표작이다. 보통 동정녀 마리아가 자욱한 구름 속에 뜬 초승달 위에 우아하게 서 있는 모습인데, 원죄 없이 잉태된 성모라는 가톨릭의 교리를 가시화한 것이다. 이런 그림은 가톨릭이 위세를 떨쳤던 스페인과 중남미 교회에서 종종 만날 수 있다. 다른 화가들에 비해 무리요는 성모와 어린 천사들을 아름답게 친근하게 묘사해 암울한 시기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그의 성화처럼 사실적이고 단순한 해석, 정서를 자극하여 신앙심을 북돋는 표현은 (종교개혁에 대항해) 가톨릭이 미술에서 추구했던 언어이기도 했다.
무리요의 작품 세계에서 이례적이면서도 사랑받는 그림들이 있다. 큰 캔버스에 소위 거리의 아이들을 가까이에서 묘사한 것인데, 누더기 차림의 아이들은 보통 보잘것없는 음식을 먹거나 놀고 있다. 그 가운데 초기의 걸작 <거지 소년>은 폐허로 보이는 자기만의 안식처에서 햇살을 맞으며 이를 잡고 있다. 덧대고 덧댄 옷과 시커먼 발바닥은 빈곤을 드러낸다. 주변에 놓인 항아리와 바구니 안의 과일, 먹다 버린 새우 껍질은 소년이 이 상황을 그럭저럭 버텨내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런 그림은 당시 세비야의 현실과 무리요의 경험을 반영한다. 16세기 후반부터 신대륙 무역을 독점하며 융성했던 세비야는 무리요가 활동하는 17세기 중반부터 거점이 카디즈로 옮겨가며 쇠락하게 되었다. 게다가 1649년 흑사병의 유행으로 세비야 인구의 절반이 사망했는데, 무리요도 이때 두 아이를 잃었다. 1651년에는 기근까지 이어져 거리에는 빈민과 버려진 아이들이 흔했다. 이에 교회에 부속된 병원이나 자선 단체의 역할이 부각되며 빈곤과 자선을 주제로 공간이 장식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고아로 자랐던 무리요에게 이런 광경은 익숙한 세계였을 것이다. 그는 평생 부랑아의 모습을 (미화했다고 비판받기도 하지만) 사실적이면서도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려냈다. 이러한 그림들에선 참혹한 비극을 넘어 희미한 희망도 스며있다.
무리요는 평생 딱 두 점의 자화상을 남겼는데, 이전 것을 보면 후의 자화상이 더 선명해진다. 유명해지기 시작한 1650년대 30대의 무리요는 다듬은 돌 표면에 자신을 그렸다. 생기 가득한 피부와 풍성한 머리카락, 정돈된 수염까지, 역시 더 젊고 패기에 찬 얼굴이다. 빳빳하게 솟은 칼라에 볼륨 있는 소매가 달린 패셔너블한 옷차림은 부유하고 우아한 신사로 자신을 제시한다. 화가라는 단서는 어디에도 없지만, 사후에 써넣은 아래 명문은 “1618년 세비야에서 태어나 1682년 4월 3일에 사망한 유명한 화가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뮤리오의 진정한 초상화”라 알려준다.
이에 비해 50대의 자화상에서 무리요의 외모나 차림은 수수하면서도 멜랑콜리의 분위기가 스며있다. 물론 가장 큰 차이는 선반에 놓인 오브제를 통해 화가로서의 정체성과 성취를 드러냈다는 것이다. 10년 전인 1660년 무리요는 세비야에 미술 아카데미를 창설하여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무리요의 입장에서 오른쪽(중요하거나 긍정적인 방향)에 놓인 초크 드로잉, 컴퍼스와 자는 드로잉과 관련된 도구로, 아카데미에서 가장 중요시했던 교육은 드로잉이었다. 왼쪽에 놓인 붓과 팔레트는 채색 작업을 함축하는데, 흥미롭게도 무리요의 오른손이 이쪽을 향해 있다. 1658년 마드리드 여행 이후 무리요는 벨라스케스와 티치아노, 루벤스 등 여러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더욱 자유분방한 붓질과 풍부한 색채를 사용했다. 무리요의 후기 작품을 보면 드로잉보다 색채와 붓질의 활용에 더욱 집중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두 번째로 50대의 자화상은 인물이 살아있는 듯한 생생한 표현이 눈에 띈다. 은은하게 빛나는 따듯한 색조의 얼굴, 그림 공간에서 나와 프레임에 걸친 손으로 인해 마치 살아 움직일 것처럼 보인다. 무리요가 이 그림을 그렸을 당시 9명의 아이들 중 4명 만이 생존했고, 안타깝게도 부인은 7년 전에 열 번째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화가의 얼굴에 깃든 고단함과 슬픔의 이유일 것이다. 결국 아버지가 떠난 후에도 계속 보고 싶다는 아이들의 소망으로 이 자화상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이 발명되기 전, 수많은 초상화가 비슷한 이유로 제작되지 않았을까. 수수께끼 같은 그림 속에서 무리요는 액자 안의 그림도 아니고 거울 안의 비친 상도 아니다. 오히려 시공간을 넘어 살아있는 영혼에 가깝다고나 할까. 그는 이 그림을 바라볼 아이들에게 말하는 듯하다.
“얘들아, 너희의 소망과 기도에 따라 나의 초상을 그렸다.
다섯 형제들과 엄마까지 하늘로 갔지만 지금까지 이 아빠는 열심히 일했단다.
화가로서 성공했고, 세비야에 미술 아카데미도 세워 제자들도 많아졌지.
그림에서 드로잉도 중요하지만 색채의 힘이 대단하다는 걸 깨닫고 있어.
나는 언제 떠날지 모르지만, 꼭 기억해라. 항상 너희와 함께하며 지켜보고 있다는 걸.
자 봐. 너희가 있는 곳에 언제든지 손을 뻗을 수 있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