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보여주는 그림이 있다. 미국의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노먼 록웰(Norman Rockwell, 1894-1978)의 <삼중 자화상>(1960)이다. 우리에게 등을 보이고 앉은 노화가는 큰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며 그 모습을 화폭에 옮긴다. 참고하려고 유심히 살펴본 거울 앞의 도록, 캔버스 왼쪽에 이런저런 각도로 그려본 얼굴 드로잉, 오른쪽에 역사상 유명한 뒤러와 렘브란트, 피카소와 고흐의 자화상, 그 아래 쓰레기통에서 타오르는 담배의 연기까지. 모두 화가가 캔버스에 자화상을 그리기 전, 연구하고 고민한 흔적들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 점이 눈에 띈다. 거울에 비친 안경을 쓴 수척한 노년의 화가는 캔버스에서 안경을 벗고 더 젊고 자신만만한 모습이다. 거울 속 화가는 뿌연 안경으로 우리와의 눈 맞춤을 피하고 있지만, 캔버스의 화가는 화면 밖을 응시하며 ‘이게 나다’라고 말한다.
탁월한 연출자이자 이야기꾼인 록웰은 여기서도 작은 단서들을 통해 자화상의 작업 과정과 실체를 주저 없이 공개한다. 다시 말해 자화상은 즉흥적인 그리기가 아닌 오랜 연구와 고민의 결과이며, 순수하게 실재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왜곡되고 미화된 모습 속에 화가의 기대와 욕망이 녹아 있기 때문에, 자화상은 더욱 흥미로운 진실도 전달한다.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 호황과 60년대의 민권운동까지, 긴 생애 동안 미국인들의 일상을 따듯하고 익살스럽게 담아낸 록웰의 그림들은 수많은 잡지와 책을 장식하며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그의 친절한 그림은 미술계에서 진지한 예술로 인정받지 못했다.
다시 자화상으로 돌아가보자. 록웰을 비춘 거울에는 그의 국적을 상징하는 독수리와 성조기 문양이 새겨져 있고 밑에 (아닐 수도 있지만 미국을 상징하는) 콜라도 놓여 있다. 캔버스 쪽에는 유럽에서 샀던 앤틱 투구가 걸려 있고, 언급했듯이 그가 선망했던 옛 대가들의 자화상이 붙어있다. 채색 전인데도 그는 유난히 많은 붓과 팔레트를 들고 캔버스에 손을 걸치는 스틱까지 걸쳐놓고 작업 중이다. 이제 화가의 욕망이 보이기 시작한다. 록웰은 더 젊고 당당한 모습으로, 삽화가를 넘어 유럽의 옛 대가들처럼 위대한 예술가로 기억되고 싶은 바람을 솔직히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자화상은 화가에 대한, 화가에 의한, 화가를 위한 작품이다. 다시 말해 화가는 보이는 대상이자 보는 주체로 이분되어 자신을 해석하고 자유롭게 표현한다. 자화상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화가가 자기를 의식하고 표현하려는 충동이나 필요가 있어야 하고, 사회에서도 그 이미지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어야 한다. 자연스럽게 자화상은 개인에 대한 자각이 시작된 르네상스 시대에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특히 여성은 18세기까지도 남성과 동등한 미술교육을 받을 수 없어 화가가 드문 데다가, 자화상에도 사회의 미적, 도덕적 예법이 더욱 철저하게 적용되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초상화를 그릴 때 화가는 주문자의 지위와 취향, 요구를 반영해야 했지만, 화가의 의지로 그린 자화상은 과감하고 창의적이며 실험적인 표현이 가능했다. 몽테뉴의 말처럼 자화상은 “정말로 특이하게도 직접적이고, 생생하고, 은밀하면서도 정직하다.” 여기에 자화상의 매력이 있다.
모든 위대한 화가들이 자화상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고, 때론 잘 알려지지 않은 화가가 정말 놀라운 자화상을 남기기도 했다.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과연 무엇이 그들을 거울과 캔버스 사이에 앉게 만든 것일까? 많은 경우 화가에게 자신은 다양한 표정과 자세를 연구하고 인물 유형과 형식을 실험할 수 있는 가장 간편한 모델이었다. 나르시시스트적인 자기애나 우연히 자기를 기록하고 싶은 욕구에서 자화상을 그리기도 했다. 간혹 무언가를 기념하거나 감사의 선물로 자화상을 제작하기도 했다. 나는 누구인지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때론 주체할 수 없는 감정과 욕망 혹은 풀지 못한 의문이나 고민이 붓을 들게도 했다. 아무리 꾸밈없는 모습의 자화상이라도 화가가 특정 시기에 세상을 향해 자신의 어떤 모습을 ‘선택’해서 그렸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사진이 발명되기 전까지 자화상을 그리는데 거울은 필수품이었고, 그 시작은 거울을 바라보는 것이다. 고대로부터 평면거울이 등장하는 16세기까지 화가들은 필사본의 삽화처럼 한 손에 들 수 있는 볼록한 거울을 사용했다. 거울을 본다는 것은 외모를 확인하는 것을 넘어 시대와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를 품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에서 거울은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명언처럼 나이와 신체에 맞는 행동과 도덕적 의무를 성찰하는 도구였다. 중세 시대에 거울은 마음의 선과 악을 깨닫는 영적 성찰과 모든 종류의 지식을 은유하기도 했다. 미술에서 거울 보는데 몰입한 화려한 여성은 허영(vanity)을 상징하기도 했지만, 전통적으로 거울은 자기 인식과 내면의 성찰을 의미했다.
거울과 캔버스 사이의 화가는 자기와의 대면과 표현을 오가면서 질문하고 대답한다. 어떤 모습이 좋을까? 나의 어떤 면을 부각할까? 정말 나다운가? 변신이나 실험을 해볼까? 이게 세상에 드러내고 싶은 모습인가? 대부분의 화가들은 자세와 표정은 물론 의상과 소품, 배경까지 구상하고 조정한다. 거울(에 비친 상)과 욕망의 줄다리기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화가가 타인에게 드러내고 싶은 욕망, 건네고 싶은 이야기가 자화상에 응축된다. 결과적으로 자화상은 한 영혼이 자기와 대결하며 미래의 관자에게 말을 거는 살아있는 얼굴이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자기 관찰과 고백에서부터 과시와 홍보, 연출과 분장, 자조와 연민, 공적 발언에 이르기까지 그 이야기와 수사는 참으로 다채롭다.
어떻게 보면 우리 모두는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자화상을 만들어간다. 오늘 내가 보고 듣고 먹고 움직이고 읽고 말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들, 순간순간의 선택들이 나를 켜켜이 빚어가는 것이다. 밀레니엄 이후 스마트폰의 출현으로 셀피의 전성시대를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남을 보느라 정작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게 되었다. 수많은 피드와 미디어의 조종 속에서 남의 욕망을 쫓느라 주체적으로 생각하는 힘도 점차 잃어가고 있다. 한 때 나 역시도 그 속에서 방황하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기도 했다. 몇 년 전에 화가의 자화상을 주제로 오래 강의하면서, 여러 화가들의 삶과 시대 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속삭이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과정에서 먼지 쌓인 거울을 닦으며 나를 보다 선명하게 바라보고 이해하며 받아들이게 되었다. 물론 나다운 모습을 향해 가는 여정은 죽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화가의 자화상이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되었듯이, 여러분의 내면을 탐험하는 여정에도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연도나 주제에 관계없이 그때그때 마음에 찾아오는 자화상 한 점을 골라 깊게 읽어볼 예정입니다.
글이 많이 쌓이면 몇 개의 카테고리로 나누어볼 수 있을 거 같아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