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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연희 Dec 30. 2023

마르크 샤갈_나의 뿌리, 나의 사랑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는 화가의 그림들은 익숙해서 오히려 제대로 보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내게는 동화처럼 사랑 넘치는 샤갈의 그림들이 그랬다. 별 흥미를 끌지 못했던 샤갈이 많은 자화상에 자서전까지 남긴 것을 알고 하나둘 살펴보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의 고백을 읽고 그가 갑자기 가깝게 느껴졌다. 청어 도매상인 아버지와 잡화상 어머니의 아홉 자녀 중 맏이였던 샤갈은 노동자 부모님과는 다른 삶을 꿈꾸었다. 나도 그랬던 거 같다. 정치인으로 어두운 시절을 온몸으로 맞으신 아버지와 밤낮으로 일하며 생계를 도맡으신 어머니, 그 삶의 무게와 비교하면 내가 꿈꾸는 것은 깃털처럼 가볍게 여겨졌다. (유대교 경전인) 구약 성서를 사랑하게 되고 샤갈과 더 가까워지면서 점차 그의 그림도 예전과 다르게 보였다. 러시아 태생의 유대인 샤갈은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유랑하는 이방인으로 살면서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를 물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늘 일을 하고 기도를 했고 말이 없었다... 나는 특별한 직업을 찾아야 했다. 하늘과 별을 외면하지 않아도 되는, 그래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일... 그러나 집에서는 절대 ‘예술’이나 ‘예술가‘ 같은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못했다. ‘예술가란 무엇인가?’하고 나는 내게 물었다.”   -마르크 샤갈 『인생』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은 1887년 러시아(현 벨라루스) 비테프스크에 있는 유대 공동체에서 태어났다. 신앙심이 깊고 무뚝뚝한 아버지와 자신을 격려해 주는 어머니, 아홉 남매가 북적이는 집은 가난하지만 따듯한 곳으로 그는 기억했다. 다방면에 재능이 있었던 샤갈은 음악가, 시인, 화가를 꿈꾸며 주변을 세심하게 관찰했다. 결국 19살에 화실을 찾아가 그림을 배웠고, 1907년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떠난다.


마르크 샤갈, <붓을 든 자화상>, 1909-10년, 캔버스에 유채, 57 x 48cm,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미술관, 뒤셀도르프

배고픈 시절 샤갈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후원자의 도움을 받아 미술학교에 다녔다. 이때 그린 <창문, 비테프스크 풍경>, <안식일>, <러시아 결혼식> 등은 그리운 고향의 풍경과 삶을 담고 있다. 샤갈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2500년 넘게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도 유대교의 관습을 지켜온 이 민족의 디아스포라(Diaspora)를 이해해야 한다. 특히 당시 제정 러시아에서 유대인들은 포그롬(pogrom)이라는 조직적인 박해와 학살의 희생양이었고, 거주 구역을 벗어날 수 없었다. (아버지의 배달 증명서를 이용해 샤갈은 편법으로 수도에 갈 수 있었다.) 유대 공동체 슈테틀은 유일신 하느님을 믿고 토라(구약의 모세 5경)의 율법을 따르며 유대교의 절기와 관습을 지켜나갔다. 그 안에서의 성장 과정은 샤갈의 정체성은 물론 그의 작품 세계의 토양과 뿌리가 되었다.  


이 시절 자화상을 보면 어두운 파란톤이 화면을 지배한다. 마치 피카소의 청색 시대처럼 빈곤이 전해지지만, 붓을 쥐고 베레모를 쓴 다부진 표정의 샤갈에게선 화가로서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가난한 청년 화가는 이때 인생의 여인 벨라를 만난다. 하지만 미래를 기약하며 1910년 서구 예술의 중심지인 파리로 향한다.


샤갈은 ‘러시아에서 그의 것들을 가져왔고 파리는 그것들에 빛을 비춰주었다.’ 낮에 루브르 미술관에 가서 서구 미술의 전통을 연구했고, 살롱전과 화랑을 다니며 인상파 미술을 흡수했다. 이때 파리에서는 색채를 해방시킨 야수파와 다시점으로 형상을 해체한 입체파 등 여러 사조가 부상하고 있었다. 몽파르나스의 예술가촌 라뤼슈에서 그는 전 세계의 예술가들과도 교류했다. 이런 파리의 환경은 샤갈에게 눈부신 색채와 자유의 감각을 선사했다. 파리 시절 고향의 기억과 상상이 어우러진 환상적인 걸작들이 탄생한다.  



마르크 샤갈, <나와 마을>, 1911년, 캔버스에 유채, 192.1 x 151.4cm, MoMA, 뉴욕


대표작인 <나와 마을>은 샤갈의 상징적인 자화상이다. 서로를 바라보는 거대한 하얀 소(혹은 염소)와 초록 얼굴의 나가 중심에 있다. 두 눈망울을 잇는 가는 선은 동물과 화가의 연결과 교감을 나타낸다. 소의 얼굴에는 젖을 짜는 여인의 모습이 중첩되었다. 십자가 목걸이를 한 화가는 하단의 나무를 손으로 감싼다. 다채로운 잎과 꽃이 핀 독특한 나무는 창세기 에덴동산의 생명 나무일 것이다. 상단에는 고향 마을의 집과 사람들이 자유롭게 묘사되었다.  


대각선으로 마주 보는 구성은 각각 동물과 인간, 자연과 문명을 상징한다. 태양 같은 원적 구성을 통해 이것들은 모두 연결되고 통합된다. 동식물과 교감하는 화가의 얼굴은 자연의 색이자 부활을 상징하는 초록으로 물들었다. 이는 유대교 하시디즘(Hasidism) 문화에서 자란 샤갈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18세기 초부터 동유럽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진 하시디즘은 신비주의 경향의 신앙 부흥 운동으로, 신성의 불꽃이 깃든 모든 존재에 대한 사랑을 강조했다. 샤갈의 그림에서는 소나 염소, 수탉 등의 가축이 인간과 교감하는 경우가 많은데, 동물에 대한 배려를 특히 중시하는 하시디즘의 문화를 반영한다.   



마르크 샤갈, <자화상>, 1914년, 캔버스에 유채, 50.5 x 38cm, 바젤 미술관

파리에서 샤갈은 화가보다 시인들과의 교류를 즐겼다. 스위스 출신의 동갑내기 시인 블레즈 상드라르와 동고동락했고, 그의 작품을 보고 ‘초자연적’이라 감탄했던 아폴리네르와도 영감을 주고받았다. 샤갈의 상상력, 함축적이면서 부유하는 형상은 시적 은유와 언어에 가깝다. 파리에서 샤갈은 강렬한 색채, 자유로운 구성과 형태로 내면의 이미지를 늘어놓는 그만의 시적 언어를 구축하게 된다.


파리 시절의 자화상을 보면 샤갈이 얼마나 자유롭고 능숙하게 형과 색을 구사하게 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하얀 카라가 달린 초록 옷, 곱실거리는 풍성한 머리카락과 도도한 표정에서 화가의 자신감이 느껴진다. 자세히 보면 ‘색채의 마법사’ 답게 원색과 세부의 미묘한 색채들이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1914년 독일이 러시아에 내린 포고령으로 샤갈은 걸출한 작품을 남겨둔 채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마르크 샤갈, <누워있는 시인>, 1915년, 판지에 유채, 77.2 x 77.5cm,  테이트, 런던


불안한 정세 속에서 비테프스크에 온 샤갈은 자기 민족과 신앙의 뿌리를 되돌아보며 유대 공동체의 전형적인 인물들, 회당과 거리의 풍경을 기록한다. 곧 자신을 기다려준 벨라 로젠펠트와 결혼(1915)한다. 시골 마을에서 보낸 신혼여행의 추억은 몇몇 작품으로 남아있는데, 자신을 몽상에 빠진 시인으로 묘사한 이 자화상이 특히나 인상적이다. 라일락색으로 물든 하늘, 전나무숲을 배경으로 아담한 시골집 앞엔 말과 돼지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한적한 초원에 홀로 누운 화가는 무슨 생각에 빠져있을까. 목가적인 풍경이 평화로워 보이지만,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채 눈을 가늘게 뜬 회색빛의 얼굴은 그렇게 달콤해 보이지 않는다. 1차 세계대전의 폭풍우 앞에서 행복한 결혼과 화가로서의 앞날이 불투명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마르크 샤갈, <산책>, 1917-8년 마분지에 유채, 170 x 183.5cm, 러시아 미술관, 상트 페테르부르크


마르크 샤갈, <마을 위에서>, 1918년 캔버스에 유채, 220 x 127cm, 조르주 퐁피두 센터, 파리


벨라 로젠펠트(Bella Rosenfeld, 1895~1944)는 샤갈에게 아내이자 영감의 뮤즈, 어머니 같은 존재가 된다. 유대인 보석상의 딸로 문학과 예술에 조회가 깊었던 그녀와의 교감은 샤갈의 작업에 자양분이 되었다. 샤갈은 평생 벨라를 향한 특별한 사랑을 노래했다. 신혼 때 유명한 <생일>, <와인잔을 든 이중 초상화> 등 달달한 사랑의 그림들이 제작된다. 그 가운데 위의 두 작품은 고향 마을을 배경으로 행복한 커플이 묘사되었다.    


<산책>에서 소풍을 즐기던 샤갈은 붕 떠오른 벨라를 붙잡았다. 원색의 밝고 강렬한 색채는 커플의 사랑과 환희를 강조한다. <마을 위에서>에서 이제 둘은 함께 마을 위를 날고 있다. 샤갈의 그림에 종종 배경이 되는 비테프스크는 유대인과 러시아인이 공존하는 작은 도시로, 저 멀리 보이는 우스펜스키 대성당이 랜드마크다. 그림에서 중력을 거슬러 떠오른 인물은 사랑에 들뜬 행복감을 전한다. 유대 문학에서도 이렇게 공중을 떠다니는 인물이 종종 등장하는데, 이는 떠돌며 살아가는 유대인의 상징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동의 자유가 제한된 그들에게 이것은 또한 자유를 향한 갈망으로도 여겨진다.   


샤갈은 자신을 주제로 한 그림에서 고향의 풍경을 자주 배경으로 삼았다. 또한 사랑하는 벨라와 함께 등장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의 말처럼 벨라는 작업에 거대한 중심 이미지였다. 샤갈은 처가의 도움으로 다행히 징집은 피했지만, 전쟁은 반유대주의를 고조시키는 불안한 상황이었다. 낭만적인 청춘의 사랑을 담아낸 샤갈의 그림들을 보면, 전쟁이 와도 사랑은 꺼지지 않는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샤갈은 비극 가운데서도 삶의 환희와 희망을 표현하는 힘이 있었다.  



마르크 샤갈, <달로 가는 화가>, 1917년, 종이에 구아슈와 수채, 32 x 30cm/ <여행자>, 1917년, 종이에 구아슈와 흑연, 38.1 x 48.7cm


유명하진 않지만 샤갈이 자신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사랑스러운 그림도 소개하고 싶다. 둘 다 하단에는 아주 작게 고향의 풍경이 보인다. <달로 가는 화가>에서 붓과 팔레트를 든 화가는 지구별을 떠나 상상의 우주를 유영한다. 머리의 월계관은 그가 명예의 시인임을 알려준다. 화가는 영감의 원천이자 창조적 생명력을 상징하는 달로 향한다. ‘화가의 날개를 지닌 시인’이라는 샤갈의 정체성을 담아낸 자화상인 셈이다. <여행자>에서 멋쟁이 청년은 화면을 가로지르며 마을 위를 한 걸음에 건넌다. 유대 민족에게 이름은 인물의 성격이나 운명, 정체성을 담아낸 중요한 지표다. 샤갈의 본명인 모이셰 세갈(Moyshe Shagal)은 유대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와 이 여행자가 내딛는 ‘큰 걸음’을 의미한다. 가족의 기대를 담아낸 이름처럼, 샤갈은 피카소, 마티스와 함께 20세기 미술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게 된다.  



마르크 샤갈의 자서전 『나의 인생』(1931)/ <웃는 자화상>, 1924-5년, 에칭과 드라이포인트, 27.6 x 21.8cm


1917년 10월 혁명은 러시아에서 차르 시대를 마감하고 노동자와 농민 정부를 내세운 사회주의 혁명으로, 샤갈의 삶에 큰 획을 그었다. 이로써 유대인들은 러시아인들과 동등한 시민권을 누리게 되었고, 다음 해 샤갈은 비테프스크의 미술학교를 통솔하는 직책을 맡는다. 하지만 절대주의라는 극단적인 추상의 언어를 창시한 화가 말레비치(Kazimir Severinovich Malevich, 1878~1935) 등의 아방가르드 화가들의 압력으로 파면되기에 이른다. 이때 샤갈의 작품을 보면 자신의 문학적인 표현과 추상의 언어 사이에서 고민한 흔적이 남아있다.


결국 1920년 샤갈은 새로운 수도 모스크바로 떠났고, 괴로운 와중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자서전을 쓴다. 그리고 사랑하는 화가 렘브란트처럼 자신을 마주하며 다양한 표정의 판화 자화상을 남겼다. 파리에서 출판(1931)된 자서전의 자화상을 보면, 불타오르는 듯한 머리카락과 뒤틀린 표정에서 샤갈이 겪은 고뇌를 엿볼 수 있다. 이 시절의 <웃는 자화상>에서 30대 화가는 노인의 얼굴을 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마치 잔주름처럼 무척 섬세한 필치로 묘사된 얼굴에서는 인생을 달관한 잊을 수 없는 웃음이 번진다.      



마르크 샤갈, <연인들>, 1928년, 캔버스에 유채, 117.3 x 90.5cm

러시아 혁명 정부 하에서 인정받지 못한 샤갈은 결국 망명을 결정하고 1923년 예술과 자유의 도시 파리로 향한다. 이때부터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까지 샤갈은 벨라, 딸 이다와 함께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낸다. 사라진 작품들을 다시 제작하고 성경과 문학 작품의 삽화를 그리거나 판화 작업에 몰두하며 작업의 폭을 넓혀갔다. 국제적인 전시로 점차 유명해지면서 경제적으로도 안정된다. 또한 성서의 배경이 되는 팔레스타인 지역은 물론 네덜란드와 스페인 등의 여행을 통해 여러 예술적 자산을 쌓는다.

 

샤갈의 삶이 가장 풍요로웠던 시기, 연인과 서커스 등을 주제로 한 가장 달콤하고 눈부신 그림들이 탄생한다. 그 가운데 1928년의 <연인들>은 화가와 벨라가 모델이다. 샤갈은 몽롱한 얼굴로 어머니의 품에 안기듯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 벨라의 치마는 보름달과 새 한 마리가 날아든 밤하늘이 되었다. 쨍한 분홍과 빨강, 초록과 파랑의 채색에서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짙어졌는지 느낄 수 있다. 40대 부부의 원숙된 사랑과 신뢰가 환상적인 색채와 신비로운 분위기로 표현되었다. 샤갈이 말했듯이 사랑의 힘은 그의 그림과 색채에 무한한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마르크 샤갈, <예술가와 노란 그리스도>, 1938년, 종이에 구야슈와 파스텔, 56.8 x 46.3cm/ <시계가 있는 자화상>, 1947년, 캔버스에 유채, 86 x 71cm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하고 반유대주의 물결이 거세지며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전쟁 전후로 샤갈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로 고통받은 유대 민족을 은유하는 그림을 자주 그렸다. <예술가와 노란 그리스도>에는 그 비극을 표현하는 화가의 고뇌가 녹아있다. 캔버스에 묘사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유대인이 기도할 때 머리에 쓰는 탈리스를 허리에 두르고 있다. 뒤쪽에는 유대인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걸어간다. 캔버스와 화가가 온통 주황으로 채색되어 무척 불안한 분위기다. 나치 세력이 프랑스까지 뻗치자 위기를 느낀 샤갈은 남부로 피신했고, 결국 뉴욕으로 도피(1941)한다. 독일의 고향 러시아 침략, 강제수용소에서의 유대인 대학살 소식이 들려오면서, 샤갈은 참혹한 전쟁과 예수 수난을 주제로 어두운 그림들을 그려나갔다.  


비극은 연달아 온다고 했던가. 1944년 뉴욕에서 벨라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샤갈은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 몇 년 후의 <시계가 있는 자화상>에서 작업하는 화가는 붉은 염소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 위로 한 몸과도 같은 파란 벨라가 포개져있다. 캔버스에는 역시나 고통받는 유대인을 상징하는 십자가의 예수가 묘사되었다. 그 옆에 벨라를 암시하는 신부가 예수를 위로한다. 위쪽에 두 팔이 달린 괘종시계는 벨라를 죽음에 이르게 한,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을 암시한다.  


1948년 샤갈은 제2의 고향인 프랑스로 돌아온다. 같은 해 팔레스타인에서는 대거 이주한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을 건국한다. 1950년 방스에 정착한 샤갈은 곧 러시아 여인 발렌티나 브로드스키와 결혼한다. 샤갈이 몇십 년에 걸쳐 작업했던 성서 삽화가 1957년 출판된다. 그의 영혼을 자극했던 구약의 사람들을 담아낸 대형 유화 성서 메시지 연작(1955~66)이 제작되고, 연작이 상설 전시되는 국립샤갈성서메시지 미술관이 1973년 니스에 개관한다. 말년에 샤갈은 유수의 성당과 공공 공간에서 의뢰한 스테인드글라스와 천정화, 모자이크 등에 특정 종교를 넘어선 평화로운 세계와 인류애를 담아냈다.   


“샤갈이 그림을 그릴 때는, 그가 잠들었는지 깨어있는지 알 수 없다. 그의 머릿속 어딘가에 혹은 그 밖의 다른 곳에 천사가 있음에 틀림없다.” - 파블로 피카소



마르크 샤갈, <또 다른 빛을 향해>, 1985년, 석판화, 62.9 x 47.9cm

<또 다른 빛을 향해>는 샤갈이 생폴드방스에서 죽기 전에 완성한 마지막 석판화다. 마치 아이의 그림 같은 97세 화가의 최후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가 작업 중인 그림이 꽃을 든 한 쌍의 연인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젤 아래에는 수탉이 화가를 향해 있다. 피카소의 말처럼, 위에서 내려온 천사는 화가에게 영감을 주듯 그의 머리를 어루만진다. 샤갈은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했던 것일까. 화면은 맑은 하늘빛으로 물들었고, 그의 등에는 또 다른 빛을 향해 가기 위한 날개가 달려있다.


어린 시절의 고백처럼 샤갈은 작업에서 삶의 의미를 질문하고 추구해 나갔다. 러시아 태생의 유대인,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고 미국 망명과 이스라엘 건국을 목격하며, 긴 생애동안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모호한 이방인으로 살아왔던 그는 자신의 뿌리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되새겼다. 20세기의 굵직한 사건들을 온몸으로 거치며 샤갈은 독특하게 삶의 환희와 비극의 양극을 모두 그려나갔다. 그런 화가에게 삶의 의미를 주는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었다. 물론 그의 반쪽이었던 벨라를 향한 낭만적인 사랑이 큰 축을 이루지만, 그것은 가족과 이웃, 인류를 향한 보편적인 사랑의 노래로 확대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로도 연결되며, 샤갈은 자신의 답을 찾은 것이다.



“인생에서나 예술에서나 모든 것은 변할 수 있다. 우리가 아무 스스럼없이 사랑이라는 말을 입 밖에 낼 때, 모든 것은 변하게 된다.... 진정한 예술은 사랑 안에서 존재한다. 그것이 나의 기교이고 나의 종교이다.”

- 1958년 강연에서 마르크 샤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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