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라
예수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면서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제자를 삼은 것이다. 두 복음서(마태 4,18-22; 마르 1,16-20)는 예수가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다가 시몬 베드로와 동생 안드레아, 이어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동생 요한을 부른 것을 간략하게 전한다. 한편, 루카 복음(5, 1-11)은 고기잡이 기적을 통해 네 어부가 예수를 따르게 된 사건을 상세하게 다룬다. 호숫가에서 말씀을 전하던 예수는 베드로의 배를 타고 그에게 깊은 데로 가 그물을 내려보라고 말한다.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했지만 베드로는 예수의 말에 순종했고, 그물이 찢어질 만큼의 물고기를 잡았다. 두 배를 가득 채운 물고기를 보고 놀란 이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다.
온통 파란 호수에 두 척의 배가 떠 있다. 왼쪽에는 뱃머리에 앉은 예수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 베드로, 두 팔을 벌린 채 선 안드레아가 있다. 오른쪽에는 노를 든 제베대오와 그물을 힘겹게 들어 올리는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보인다. 두 배는 그들이 잡은 가지각색의 물고기로 가득 차 있다.
차분한 예수의 자태와 대조적으로 어부들의 몸짓과 표정은 동적이면서도 다채롭다. 오른쪽에서부터 노를 든 제베대오와 두 아들은 물고기 잡는 것에 몰두해 있고, 근육질의 몸도 드러냈다. 중앙에 안드레아는 기적에 놀라 어리둥절하지만, 베드로는 예수의 신성을 깨달은 계시와 믿음의 순간에 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 8)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 모습은 그의 겸손을 드러낸다. 이에 예수는 축복하는 손짓으로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 5, 10)라고 말한다. 후경에 보이는 사람들과 마을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 이들이 향해 가야 할 곳을 암시한다. 전경에 등장한 학은 사도로서 필요한 지속적인 경계와 조심의 덕목을 상징한다.
이 그림은 교황 레오 10세(재위 1513~1521)가 시스티나 예배당 장식을 위해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 1483~1520)에게 주문한 태피스트리 디자인, 카툰(cartoon)이다. 메디치 가문 출신의 레오 10세는 율리우스 2세(재위 1503∼1513)를 이어 성 베드로 성당의 재건을 추진하며 로마를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만들었지만, 이를 위해 면죄부를 발행하며 종교개혁을 촉발시킨 부패한 교황이기도 했다.
교황의 공식 관저 안에 위치한 시스티나 예배당은 추기경들이 모여 교황을 선출하는 장소로도 유명하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미켈란젤로의 천지 창조와 <최후의 심판>을 보기 위해 예배당을 찾는다. 양쪽 벽은 르네상스의 대가들이 그린 역대 교황의 초상화와 그 아래 모세와 예수의 생애로 장식되었다. 맨 아래 (특별한 기간에만 설치되는) 태피스트리 연작은 그리스도교 교회의 설립자인 베드로와 바울의 삶을 보여준다.
전통적으로 교황은 최초의 사도인 베드로의 후계자로, 베드로는 첫 번째 교황으로 여겨졌다. 라파엘로의 그림에서도 예수와 함께한 왼쪽(태피스트리로는 오른쪽) 인물들의 후광이 더 분명하고, 특히 그 중심에 베드로는 겸손한 믿음의 제자로 강조되었다. 예수는 이후 그에게 ‘바위’를 뜻하는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었고,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 18)라는 말대로 성 베드로 성당은 가톨릭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천지 창조와 모세, 예수, 베드로와 바울, 교황으로 이어지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장식은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함축하는 동시에 교황의 권위를 드러낸다.
야코포 바사노(Jacopo Bassano, 1517~1592)의 작품은 앞에 라파엘로의 카툰을 바탕으로 작업했음을 알 수 있다. 차이를 알면 각각의 초점이 더 분명해진다. 우선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진홍빛과 주황, 연두 등 쨍한 색채의 옷이다. 베네치아는 안료 무역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이 지역 화가들은 풍부한 색채 표현에 강했다. 바사노의 어부들이 더 서민적인 얼굴을 가진 것도 눈에 띈다. 수수한 노인인 베드로와 야성적인 얼굴의 안드레아에 비해, 예수는 세련되고 위엄 있는 얼굴과 자태를 가졌고 홀로 광채를 발한다. 화가는 예수의 완벽한 상체 근육도 드러내고야 말았다. 이 그림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안드레아의 휘날리는 망토다. 야고보와 요한은 그물을 막 건지고 있어, 삐죽 고개를 내민 몇 마리의 물고기만 보인다. 화가는 놀라운 고기잡이 기적을 묘사하기보다 기적이 일으키는 효과에 집중한 것이다.
16세기 베네치아 근교의 촌구석 출신의 바사노는 중심의 대가들 즉, 티치아노나 베로네제, 틴토레토에 비하면 유명하지 않다. 청년 시절에 베네치아에서 미술을 배운 뒤 평생 고향에서 활동했던 그는 뒤러나 라파엘로 등 대가들의 판화를 열정적으로 연구했다. 그래서 바사노의 성화는 르네상스적이면서도 지방적인 요소(농촌의 풍경과 인물, 동물)가 결합되며 독특한 개성을 띄게 되었다. 이 그림에서 고향의 풍경을 담은 후경의 마을과 미묘한 색채의 변화로 묘사된 푸른 호수 풍경이 생생하다. 라파엘로와 다르게 그는 기적을 목격한 어부들도 후광 없이 평범하게 그려 사실성을 더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어지러울 정도의 강렬한 색채와 극적인 요소로 보는 이에게 전해진다. 중심에서 펄럭이는 망토는 마치 성령의 바람처럼, 계시의 순간을 가시화한다.
프랑스 태생의 제임스 티소(James Tissot, 1836–1902)가 불투명 수채 물감인 과슈로 작업한 삽화다. 전면에는 두 배가 건져 올린 많은 물고기를 어부들이 바삐 배안으로 옮기고 있다. 오른쪽 뱃머리에 앉은 예수는 앞에 납작 엎드린 베드로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을 내린다.
제임스 티소는 19세기말 파리와 영국에서 활동하며 여인과 유흥을 소재로 한 예쁜 그림들을 주로 그렸다. 화려하고 감각적인 그림으로 성공가도를 달렸던 화가는 50세 경인 1885년에 생 쉴피스 성당에서 종교적인 환영을 체험하고, 이후 성서화 작업에 몰두한다. 『예수의 생애』 삽화를 준비하면서 티소는 중동으로 몇 차례 여행을 떠나 그곳의 인물과 의상, 풍경과 건축 등을 기록하고 연구했다. 위의 삽화를 보면 예수와 어부는 중동인이고 의상도 이전 작품들과 다른 분위기다. 십여 년에 걸쳐 화가는 예수의 탄생에서부터 죽음과 부활에 이르는 350점의 삽화를 완성했다. 이 삽화는 여러 도시에서 전시되었고 책도 출판되며 인기를 끌었다. (이후에 작업한 구약 삽화는 80여 점 만을 남기고 완성하지 못했다.) 티소의 삽화를 보면 흥미로운 작품도 있지만 고고학적인 정확성을 추구한다고 해서 명작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성경에서 팩트가 아닌 진실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처럼, 그 안의 의미를 곱씹지 않고 표현한 장면은 단지 삽화에 머물게 된다.
반면 오토 딕스(Otto Dix, 1891~1969)가 석판화로 작업한 『마태오 복음서』(1960)는 투박하고 간소한 표현으로도 긴 여운을 남긴다. 언급한 것처럼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가 호숫가에서 베드로와 안드레아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 19)고 하자, 그들이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전한다. <예수가 베드로를 부르다>에서 맨발의 예수는 손을 들어 그들에게 따라오라 말한다. 그런데 우리를 향한 베드로의 표정이 흥미롭다. 믿음의 확신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갈듯한 얼굴은 아니다. 예수의 말에 내가 지을듯한, 황당함과 의심의 표정에 가깝다. 그런 베드로가 이후 <베드로의 뉘우침>에서 보여준 얼굴은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바위 같은 얼굴에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은 잡힌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한 제자의 슬픔을 진하게 전한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를 따르라’는 엄청난 예수의 요구에 나는 따를 수 없었고, 그때는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 오토 딕스
독일의 화가 오토 딕스는 제1차 세계대전에 자원입대하여 4년간 전쟁의 참혹함을 몸소 겪었다. 이후 전쟁의 참상과 비참한 사회 현실을 가차 없이 담아내며 표현주의적인 양식에 비판과 냉소가 더해진 독특한 언어를 사용했다. 그는 드레스덴 아카데미 교수가 되고 프로이센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며 인정받았지만, 나치의 등장으로 해고되었다. 어둡고 폭력적인 그의 그림들은 퇴폐미술로 낙인찍혔고, 히틀러 치하에서 검열하에 풍경화만 그리다 감옥에 가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딕스는 전쟁의 고통과 종교적인 주제를 주로 다루었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했지만, 서부 전선에서도 성경과 니체의 『즐거운 학문』을 끼고 의지했던 영적인 청년이었다. (다음 글에 딕스의 자화상을 살펴보면서 그를 더 자세히 다뤄보려고 한다.)
딕스가 70세 경인 1960년에 출판된 『마태오 복음서』는 33점의 석판화가 삽입되었다. 이 책은 예수의 탄생이 아닌 인류를 위한 희생양, 예수를 예표한 구약의 <아브라함과 이사악>으로 시작한다. 화가는 끔찍한 전쟁과 모순된 정치 속에서 오랜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특히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먼 나라의 이야기로 여기지 않았다. 딕스에게 복음서의 내용은 그가 “경험했던 세계에 대한 은유이며, 인류의 비참함에 대한 은유”였고, 그가 앞으로 나아가도록, 새로운 것을 도전하도록 이끌었다.
“답변은 성서 안에 있었다기보다, 답변을 찾기 위해 성서를 읽는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했다. 자신이 읽은 것을 일상의 삶에 들여놓음으로써만 제대로 읽은 것이었다. 답변은 읽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었다. 몸과 정신과 영혼으로 느끼는 것이었다.” - 크리스티앙 보벵, 『지극히 낮으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