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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연희 Mar 20. 2024

오토 딕스_세상을 꿰뚫어 보는 눈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독일 화가들은 인간의 가장 어둡고 잔혹한 면모를 그림에 쏟아내며 20세기 초 ‘표현주의’라는 큰 흐름을 형성했다. 대문 그림에서 느꼈겠지만 오토 딕스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그는 정신적 충격으로 금세 전장을 빠져나온 화가들(키르히너, 베크만, 그로스 등)과 다르게 동서부의 최전선에서 4년을 줄곧 참전했다. 이 청년이 전선에서 성경과 함께 신의 죽음을 선언한 니체의 『즐거운 학문』(1882)을 주기적으로 읽었다는 사실이 흥미를 끌었다. 참호 속에서 일기를 쓰고 드로잉으로 전쟁을 기록한 의지 또한 그를 생존케 한 힘으로 여겨졌다. 그가 남긴 160여 점의 자화상은 얼마나 자주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성찰한 화가였는지를 알려준다. 전후 전쟁의 참화와 독일의 비참한 현실을 그렸던 그는 히틀러가 집권하며 탄압을 받다가 오십이 넘어 제2차 세계대전에 징집되어 포로로 잡혀가기도 했다. 영화처럼 극적인 시대를 온몸으로 관통했던 딕스는 말년에 종교화에 몰두하며 현대의 성화를 통해 진실을 전달하고자 했다.





오토 딕스, <자화상>, 1912년, 종이에 유채, 73.7 x 49.5cm, 디트로이트 미술관


오토 딕스(Otto Dix, 1891~1969)는 독일의 게라에서 노동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화가 사촌의 작업실에 드나들며 그림 그리기를 꿈꾸었던 그 1910년 드레스덴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이 시기 풍경화와 초상화를 주로 그렸고, 독일 미술의 아버지 알브레히트 뒤러(1471~1518)와 전시에서 본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처럼 자화상도 자주 시도했다.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1912년 작품에서 딕스는 카네이션 한 송이를 들고 섰다. 전통적으로 카네이션을 든 초상화는 구애나 사랑의 약속을 상징한다. 북유럽 전통에서 신부가 결혼하는 날 카네이션을 몸에 숨기면 신랑이 옷을 뒤져 찾아내는 풍습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자화상의 아버지’로 불리는 알브레히트 뒤러의 자화상(1493, 아래 참고)도 떠올리게 한다. 22살 청년 뒤러는 패셔너블한 차림에 부부의 정절을 상징하는 엉겅퀴를 든 자화상을 약혼자에게 보냈다. 그런데 딕스의 자화상은 20세기 청년답게 강한 개성과 호기를 뽐낸다. 짧은 앞머리와 예민해 보이는 얼굴, 고동색 골덴 남방과 꽃은 든 손이 북유럽의 전통대로 무척 세밀하게 묘사되었다. 쨍한 하늘색 배경은 인물의 존재감과 청량감을 더한다. 무엇보다 청년의 잔뜩 힘을 준 눈길은 보는 이를 단숨에 제압한다. 작고 가는 체구의 딕스는 청년 시절 이처럼 남성적인 매력과 카리스마를 풍기는 자화상을 여럿 남겼다.

 

언젠가 다루겠지만 루브르에 있는 뒤러의 자화상을 보려면,

https://collections.louvre.fr/ark:/53355/cl010065609



오토 딕스, <군인 모습의 자화상>, 1914-5년, 캔버스에 유채, 68 x 53.5cm, 슈투트가르트 시립 미술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많은 청년들처럼 딕스도 멋모르고 자원입대했다. 이때 제작된 <군인 모습의 자화상>은 완전히 다른 얼굴과 분위기다. 민머리의 사내는 고개를 돌려 화가 난 듯 관자를 바라본다. 굵은 골격의 얼굴은 시합 중인 권투 선수 마냥 부풀었다. 뒤쪽에 폭격의 섬광이 눈부시게 빛나고, 그늘진 얼굴에 살기 어린 눈은 섬뜩할 정도다. 공격적인 붓질로 채색된 잿빛과 붉은 색조는 지옥 같은 전장의 분위기를 전한다. 꽃을 든 아름다운 청년은 여기서 궁지에 몰린 동물이 되었다. 어느새 그의 눈이 묻는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인간은 얼마나 비참하고 잔혹해질 수 있는가, 이것은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  


1915년 딕스는 서부 전선에 기관총 부대원으로 보내져 기나긴 참호전을 견뎌냈다. 1917년에는 동부 러시아로, 다음 해는 플랑드르에서 싸웠다. 놀랍게도 딕스는 전장에서 600여 점의 드로잉과 구아슈 수채화를 완성했다. 4년간 다섯 차례 부상을 당했지만 살아남았고, 철십자가 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끔찍한 전쟁이 남긴 상처와 악몽은 이후 화가의 작품에 반영된다.     


“전쟁은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어떤 거대한 것이다. 나는 절대로 이것을 잊지 않았다. 당신이 인간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이런 통제되지 않은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보았어야만 한다.... 나는 삶의 가장 나쁜 면을 직접 경험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전쟁에 참여한 이유이자 내가 군에 자원했던 이유다.”   - 오토 딕스



오토 딕스, 《전쟁》(1924) 중 <돌격대가 가스속을 전진하다>, 19.3 x 28.8cm, 에칭과 아쿼틴트, 드라이포인트/ <죽은 남자>, 29.9 x 25.7cm


1919년 딕스는 드레스덴으로 돌아와 전쟁의 비극과 독일 사회의 타락을 가차 없이 표현하기 시작했다. 특히 장애를 입은 참전 용사들이 사회에서 버림받은 현실에 격분해 그 실상을 자주 다루었다.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가 프랑스 군대의 만행과 광기를 고발한 판화집 전쟁의 참화(1810-20)에 영감을 받아, 전쟁의 참상을 세밀하게 묘사한 50점의 에칭 연작  전쟁(1923-4)도 완성했다. 


가장 유명한 <돌격대가 가스 속을 전진하다>에서 방독면을 쓴 군인들은 독가스 공격 후 적군(우리)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 1차 대전은 탱크와 독가스, 전투기 등의 현대식 무기가 사용되며 대량 살상이 자행되었다. 딕스는 부상당하거나 죽은 군인들의 모습도 적나라하게 살려냈다. 그들의 얼굴과 팔다리는 처참하게 뭉개지고 잘려나가거나 부패되었는데, 이를 위해 딕스는 현장 사진이나 시체보관소에서 연구하기도 했다. 전쟁의 경험과 기억을 끄집어내는 작업 과정은 그에게 트라우마를 떨쳐내기 위한 의식과도 같았다.  



오토 딕스, <이젤이 있는 자화상>, 1926년, 패널에 템페라, 80.5 x 55.5cm, 레오폴드 회쉬 미술관, 독일 뒤렌


1920년대 딕스가 결혼하고 베를린에 정착하며 자기의 언어를 확립한 시기의 자화상은 어느 때보다도 멋지고 날카롭다. 화가는 거울(관자)을 바라보며 작업 중이다. 올백으로 빗어 넘긴 머리에 양복과 리본 넥타이까지, 작업하는 화가라기보다 말끔한 신사에 가깝다. 딕스는 35세 나이에 비해 훨씬 조숙해 보이는 데다 이마엔 전쟁에서의 상처 자국도 남아있다. 옷깃을 매만지는 왼손 모양이 특이한데, 다시 한번 뒤러의 1500년 자화상을 떠올리게 한다. 뒤러는 자신을 예수처럼 묘사하며 신과 같은 창조력을 지닌 예술가로서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드러냈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오른손을 위처럼 강조했다. 뒤러의 눈도 그 강렬함으로 유명하지만, 딕스의 칼처럼 날카로운 눈은 누구도 피하기 어렵다. 자화상에서 반복되는 이 눈은 세상을 꿰뚫어 보며 그림으로 진실을 증언하겠다는 다짐처럼 보인다. 오른쪽 아래 서명에 등장하는 ‘뱀처럼 지혜롭게’.


알브레히트 뒤러의 유명한 1500년 자화상이 궁금하다면, https://brunch.co.kr/@imlostinart/10



오토 딕스, <메트로폴리스>, 1927-8년, 패널에 디스템퍼, 181 x 404cm, 슈투트가르트 미술관


패전 후 설립된 바이마르 공화국은 경제 공황으로 빈민이 급증했고, 부유한 이들의 타락은 극에 달했다. 수많은 전쟁고아와 과부들은 생계를 위해 매춘부로 내몰렸다. <메트로폴리스>는 이런 대도시의 단면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삼면화 왼쪽에는 다리 잘린 군인이 거리의 여인들을 바라본다. 바닥에 군인이 쓰러져 있지만 누구도 아랑곳하지 않고 개만 사납게 짖어댄다. 중앙에 카바레에서는 보석으로 과하게 치장한 여인들이 신사들과 즐긴다. 오른쪽엔 바로크 스타일의 기둥과 함께 매춘부들이 줄지어 서 있다. 개성 강하게 꾸민 이들 가운데 앞의 여인은 옷이 아예 성기 모양을 하고 있어 상품화된 여성을 암시한다. 이들의 차림에 감탄하는 사이, 아래 앉아 구걸하는 상이군인이 눈에 띈다. 두 다리가 잘리고 뭉개진 얼굴을 가린 채 고개 숙인 그는 장면에 비극을 더한다.


1920년대 딕스는 동료 화가 게오르게 그로스(George Grosz, 1893~1959)와 함께 바이마르 공화국의 사회적, 정치적 현실을 숨김없이 철저하게 묘사하며 ‘신즉물주의(New Objectivity)’를 창시했다. 전후 사회의 비극과 타락, 즉 폭력과 죽음, 가난, 매춘과 쾌락 등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집요하게 다루었다. 신즉물주의는 강한 색채와 과장이라는 표현주의적 형식을 보여주지만, 그 내용은 주관적 감정이 아닌 객관적 실재와 대상에 초점을 둔 것에 차이가 있고, 체념과 냉소의 언어가 더해져 더 차갑고 날카롭다. 현실을 객관적으로 기록하면서도 환상적인 표현 방식으로 인해 ‘마술적 리얼리즘(Magic Realism)’으로도 불린다.


“미술가들은 진실을 수정하거나 개선하려고 하면 안 된다. 그저 실체를 보여주어야만 한다.” - 오토 딕스



오토 딕스, <전쟁 제단화>, 1929-32년, 나무 패널에 유채와 템페라, 204 x 468cm, 드레스덴 미술관


전쟁의 비극이 잊히고 전쟁 군인들을 영웅화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딕스는 전쟁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전쟁 제단화>를 제작한다. 왼쪽 패널에서 병사들은 짙은 안개를 헤치며 전장으로 향했지만 전장에서 방독면을 쓴 병사가 바라본 가운데 장면은 폭격과 독가스로 파괴된 몸과 내장, 피가 뒤엉킨 더미다. 그 아래에는 그나마 죽음으로 안식을 얻은 시체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오른쪽 패널에는 불길이 치솟는 폭격 속에서 유령 같은 모습의 병사가 부상당한 동료를 겨우 끌고 나온다. 이 생지옥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병사는 살아남은 딕스 자신이다. 


“이, 쥐, 철조망, 벼룩, 유탄, 폭탄, 구멍, 사체, 피, 포화, 술, 고양이, 독가스, 캐넌포, 똥, 포탄, 박격포, 사격, 칼, 이것이 전쟁! 모두 악마의 짓거리!”  - 오토 딕스



오토 딕스, <붉은 커튼 앞에 팔레트를 든 자화상>, 1942년, 나무 패널에 유채, 100 x 80cm, 슈투트가르트 시립 미술관

이 운동은 오래가지 않았다. 1933년 히틀러를 당수로 한 나치가 집권하면서, 딕스는 ‘퇴폐 예술가’로 낙인찍히고 탄압을 받았다. 패전 후 군사보복을 외치던 우파 나치는 전쟁의 비극과 퇴폐적인 사회를 담아낸 딕스의 그림이 ‘독일 국민의 도덕적 감수성과 사기를 파괴’한다고 보았다. 딕스는 1927년부터 일했던 드레스덴 아카데미 교사직에서 해고되고, 그의 작품은 1937년 ‘퇴폐 미술전’에서 비난받았다. 다음 해 작품 260여 점이 몰수되기도 했다. 2차 대전이 끝나는 1945년까지 퇴폐 예술가들은 아름다운 풍경화를 그리도록 통제받았다. 게다가 딕스는 1939년에 히틀러 암살 계획에 연루했다는 누명까지 쓰고 옥살이를 했다.


2차 대전이 한창인 시절, <붉은 커튼 앞에 팔레트를 든 자화상>에서 딕스는 작업에 몰두한 화가로 자신을 제시했다. 여기저기 물감이 묻은 작업복 차림에 팔레트와 붓을 들고 캔버스를 지긋이 바라보는 듯하다. 뒤쪽에 반쯤 열린 붉은 커튼 사이로 어둡고 연기가 자욱한 풍경이 보인다. 불가능한 세팅의 풍경은 당시의 두 번째의 대전을 암시할 것이다. 원하는 것을 표현할 수 없던 시절, 딕스의 날카로운 눈은 힘을 잃었고, 미간의 주름처럼 시름은 깊어졌다.



오토 딕스, <전쟁 포로 모습의 자화상>, 1947년, 섬유판에 유채, 64 x 60cm, 개인소

고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전쟁 막바지인 1945년 오십이 넘은 화가는 나치 돌격대에 강제 징집되어 다시 전선에서 싸웠다. 딕스는 곧 포로로 잡혔고, 다행히 그를 알아본 프랑스 병사의 지시를 받아 수용소에서 채플 제단화를 그렸다. 곧 전쟁이 끝나 석방된 딕스는 몇 년 후 <전쟁 포로 모습의 자화상>을 그렸다. 아. 몇 년 사이에 그는 절망에 가득 찬 노인이 되었다. 육체적, 정신적 기력이 쇠한 데다 가족과 생이별한 괴로움이 상당했을 것이다. 맨 아래 <가족 초상화>에서 볼 수 있듯이, 딕스에겐 개성 강한 부인과 그를 바보로 만드는 사랑스러운 세 아이가 있었다. 비쩍 마른 얼굴에 깊은 주름과 잿빛 피부, 이제 그 날선 눈빛은 깊은 어둠으로 매워졌다. 뒤쪽에 유령처럼 선 두 포로와 삐쭉빼쭉한 철조망이 비참함을 더한다. 전후 딕스는 이전처럼 세밀하게 묘사하지 않고 거친 붓질과 단순한 형식으로 나아간다.  








오토 딕스, <그리스도>, 1956년, 석판화, 40.5 x 29cm/ <자화상>, 1960년, 목판화, 20.8 x 14.3cm


두 번의 대전을 겪은 후 말년의 딕스는 전쟁이 낳은 고통과 영적인 갈망으로 성화에 몰두한다. 자연스럽게 예수의 수난을 주로 다루었는데, 독특하게 당대의 배경과 인물 속에 예수를 위치시켰다. 어린 시절부터 일상에서 성경의 이야기를 품고 살았던 소년이었지만, 딕스는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의 정신세계를 흠모하게 되면서 교회를 떠나 있었다. 그는 불쌍하고 비극적인 예수의 생애에 공감하면서, 우아하고 말끔한 옛 성화를 속임수라 비난했다. 참혹한 전쟁을 겪은 화가는 예수의 고통과 외로움, 죽음을 사실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유화와 파스텔뿐만 아니라 다양한 판화기법을 시도하며 그 효과를 실험했다. 1960년에는 33점의 석판화로 구성된 『마태오 복음서』가 출판되었다. 위의 <그리스도>처럼 석판화는 부드럽고 감성적인 표현으로 보는 이를 감동시켰다. 1960년의 목판화 자화상은 이와 대조적인 거칠고 날카로운 선들로 묘사되었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그의 얼굴에선 극적인 생을 헤쳐온 70세 화가의 단단함, 진실한 역사의 증언자로서의 집념이 전해진다.




오토 딕스, <가족 초상화>, 1927년, 패널에 유채, 80 x 50cm, 슈테델 미술관, 프랑크푸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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