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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연희 Jun 18. 2023

알브레히트 뒤러의 <큰 잡초 덤블>

: 위대한 들풀의 소우주


온 세상이 초록으로, 이름 모를 꽃들로 채워지는 요즘, 산책은 더욱 즐겁다. 언제부턴가 꽃집의 꽃들보다 여기저기에서 피어난 들풀과 들꽃들이 나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온실 속에서 자란 꽃들이 물론 더 곱고 화려하지만 인간에 의해 모양이나 색이 변형되기도 하고 어디에선가 잠깐 향유되다가 버려지는 생을 떠올리면 씁쓸한 마음도 든다. 반면 어디에서나 자유롭게 피고 지는 들꽃들은 어떤가. 비옥한 흙에서뿐만 아니라 거리의 시멘트, 타일 틈새 어디라도 불평 없이 자리한다. 매서운 겨울의 추위, 봄의 살랑거리는 바람, 여름의 뜨거운 태양과 폭풍우를 맞으며, 자동차의 매연과 쓰레기, 사람들의 발걸음도 견디며 오롯이 자기 얼굴을 피워낸다. 자연의 따듯한 응원과 고된 시험 속에서 들꽃은 더욱 자유롭고 강렬한 생명의 진동을 품는다. 누구를 위해서, 보이기 위해서가 아닌 자기만의 창조를 이루어간다.   



알브레히트 뒤러, <큰 잡초 덤블>, 1503년, 종이에 수채, 펜과 잉크, 40.3 x 31.1cm, 알베르티나 미술관, 비엔나


그런 잡초(각각의 이름을 불러주지 못해 미안)들을 더 가까이, 더 오래 바라보도록 만들어준 그림이 있다. 바로 독일 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큰 잡초 덤불>(1503)이다. 다양한 형태와 미묘하게 다른 초록의 풀들을 바라보자. 우리는 어느새 땅에 풀썩 주저앉아 이 작은 세계를 구석구석 음미하게 된다. 식물학자들의 힘을 좀 빌리면 우리 주변에도 흔한 민들레(dandelion), 왕질경이(greater plantain), 새발풀(cock's foot), 긴 잔디 모양의 겨이삭(creeping bent), 아직 꽃이 피지 않은 데이지(daisy)와 베로니카(germander speedwell) 등이 뒤섞여 있다. 민들레만이 노란 꽃이 지고 홀씨를 펴기 전의 자태를 뽐낸다. 왼편 하단에는 물웅덩이가 보이고 흙에는 풀의 뿌리들까지 드러나있다. 수채화여서인지 초록 풀잎들이 투명하게 빛나고 흙의 축축함마저 느껴진다. 다시 고개를 들어 보면, 풀들은 마치 마천루처럼 거대하게 솟아 있고, 나는 땅을 기어 다니는 곤충이 된 것만 같다. 이 작품의 위대한 점이라면 위에서 본 인간의 시점이 아닌 땅을 기는 곤충의 시점에서, 그것의 소우주를 세밀하게 포착했다는 것이다.


500년 전 수많은 천재들이 활약했던 르네상스 시대에 미술의 주제는 대부분이 신화와 성경, 그리고 막 부상한 상류층의 초상화가 전부였다. 그런데 독특하게 뒤러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작은 잡초의 풍경을 그림의 주제로 삼았다.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식물 연구(study)로도 볼 수 있지만, 임의적이면서도 조화로운 풍경은 시대를 넘어 계속 인용되는 걸작이 되었다.


아마도 뒤러는 산책길에 이 풀들의 색다른 아름다움에 이끌려 땅에 앉았다가, 더 자세히 보려고 마치 개미처럼 엎드려 보았을 것이다. 그렇게 바라본 풍경은 더 이상 보잘것없는 잡초가 아니라 하나의 웅장한 세계로 확장되었다. 그것은 수고해 그릴만큼 아름답고 가치 있는 풍경이었다. 과연 그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담아낸 것일까? 솔직히 길거리나 개천, 철도길에서 만나는 잡초는 이처럼 말끔하고 조화로운 구성과 배치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이 작품은 구성에서 황금비율을 찾을 수 있을 만큼 어느 정도 정돈된 혹은 계산된 풍경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신은 “만물을 척도와 수와 무게에 따라 배열하셨다”는 외경 「지혜서」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뒤러는 평생 신적인 조화와 비율을 찾고자 했다. 그는 낮은 미물에서도 우주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르트만 쉐델의 『뉘른베르크 연대기』(1493)


우리에게 뒤러는 동시대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나 미켈란젤로(1475~1564)만큼 익숙하진 않지만, 북유럽에서는 대중적으로 명성이 더 높았고 미술가들 사이에서도 오랫동안 우상시되던 존재다. 신성로마제국의 중심에 위치한 뉘른베르크(Nürnberg)에서 금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나, 뒤러는 금세공사가 아닌 미술가의 길을 선택했다. 그림이 더 좋았던 소년은 13살 때 벌써 자기 모습을 그린 드로잉을 남겼다. 그 뒤로도 뒤러는 자신을 관찰하고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하며 일련의 자화상을 남겨 ‘자화상의 아버지’로 불린다.


뒤러가 도제로 일했던 미하엘 볼게무트의 공방에서는 유명한 하르트만 쉐델의 『뉘른베르크 연대기』(1493)의 목판화 삽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 책은 성경을 기반으로 세상의 기원과 인간의 역사, 세계의 도시 등을 담아낸 백과사전이다.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는 무척 흥미로운 책으로, 최근에 정성스러운 인쇄와 제본의 번역본이 출판되었다. 이 책의 삽화 작업을 하면서 청년 뒤러는 드넓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은 물론 글과 이미지로 기록하는 습관에 키워나갔을 것이다.


뒤러는 공방에서 도제(apprentice)로 일하다가 1490년대 초반에 라인강 중상류 지방을 여행하며(journeyman) 판화 기술을 발전시켰다. 1494년 뉘른베르크로 돌아와 결혼과 동시에 장인(master)으로 공방을 열었지만, 이번에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난다. 뒤러는 여행 중에 만난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을 종종 수채화로 기록했다. 마치 인상파 화가들처럼 야외에서 그린 숲과 물, 바위, 작은 마을의 풍경은 너무 현대적이어서 처음 봤을 때 무척 놀랐던 기억이 있다. 수채라는 재료의 사용도, 풍경화라는 장르도 한 세기가 지나야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알브레히트 뒤러, <아르코 풍경>, 1495년, 종이에 수채, 22.1 x 22.1cm, 루브르 박물관/ <나무와 웅덩이>, 1497년경, 26.2 x 36.5cm, 영국 박물관

 

당시 국제교역의 중심지이자 르네상스의 중심지였던 베네치아를 여행(1494-5)하면서, 뒤러는 원근법과 해부학, 인체 비례 등 이탈리아의 선진 문화에 큰 자극을 받았다. 뉘른베르크로 돌아온 화가는 그림보다 판화 매체에 더 집중했다. 뒤러의 판화는 성경이나 성인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연애나 목욕탕 등 세속의 장면, 그리고 기괴한 형상이나 상상의 이야기까지 그 주제가 다채롭다. 대량 복제가 가능한 판화는 가격이 저렴해 대중에게 판매할 수 있었다. 즉 주문에 의존하지 않고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미술가 주도의 매체였다. 뒤러의 판화는 세밀하고 생생한 표현 때문에 점차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1500년을 앞두고 재난과 역병이 퍼지는 종말론적인 분위기 속에서,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담아낸 판화집 『묵시록』(1498)은 전 유럽에 뒤러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알브레히트 뒤러, <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 1500년, 나무 패널에 유채, 67.1 x 48.9cm, 알테 피나코테크, 뮌헨

잘 나가는 28살의 화가는 1500년을 기리며 독특한 자화상을 남겼다. 칠흑 같은 배경 속에서 정면을 향한 긴 머리의 남자는 누가 봐도 예수의 성상화를 연상시킨다. 너무나도 강렬한 눈빛은 전시 중에 공격을 당하기도 했는데, 뒤러는 눈높이에 서명과 간단한 설명을 남겼다. 그가 말했듯 미술가에게 ‘가장 고귀한 감각은 시각’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 뉘른베르크의 알브레히트 뒤러는 28세의 나의 초상을 원래 혈색 그대로 그렸다.” A와 D로 만든 그의 모노그램(monogram)은 그의 저작권을 표시하는 상표가 되었다. 마치 예수의 축복하는 손을 연상시키는 그의 돋보이는 손은 실제를 그림으로 실현하는 기술이자 도구로 또한 강조되었다. 한편 관찰에 기반한 정교한 묘사는 여기서도 계속된다. 얼굴의 잡티와 왁스로 정돈된 콧수염, 반짝거리는 긴 곱슬머리와 값비싼 모피 코트는 화가만의 개성과 능력, 부유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뒤러는 특별한 해를 기념하며 이 자화상에 신과 같이 창조적인 능력을 지닌 예술가로서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담았다. 수수께끼 같은 이 자화상은 화가가 살아있는 동안 그의 작업실을 떠난 적이 없었다.




알브레히트 뒤러, <토끼>, 1502년, 종이에 수채와 구아슈, 25 x 22.5cm, 알베르티나 미술관, 비엔나

기념비적인 자화상을 그린 이후, 뒤러는 신이 세상의 온갖 생물들을 창조하듯 자신의 손으로 정성스럽게 동식물 하나하나의 초상을 그려나갔다. 사람처럼 우뚝 선 나무, 야생화와 화려한 꽃들, 용사 같은 자태의 사슴벌레, 귀여운 부엉이와 피리새, 화려한 색채가 펼쳐진 새의 날개까지, 신이 창조한 피조물들을 세밀하게 연구했다. 사실 그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작품은 <큰 잡초 덤블> 전에 그린 <토끼>다. 귀를 쫑긋 세우고 다리를 나란히 해 몸을 둥글게 웅크린 토끼는 마치 포즈를 취한 모델 같다. 알베르티나 미술관에 전시된 이 작은 그림이 살아있는 토끼보다 수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것은 왜일까. 한 올 한 올 풍성한 털을 만져보고 싶을 정도이지만 다가가면 금세 달아날 것처럼 생생하다. 당시 유화나 판화를 위해 동식물을 스케치하며 연구하는 화가들도 있었지만, 이토록 세밀하고 실감 나게 완결된 작품은 찾기 어렵다. 뒤러의 연구는 가장 이상적인 인체의 비례와 조화를 찾기 위한 4년간의 연구로 이어졌고, 그 결실은 판화 <아담과 하와>(1504)에 집약되었다. 


호기심이 왕성했던 뒤러는 평생 네 번의 긴 여행에서 보고 들은 수많은 동물뿐만 아니라 혜성, 폭우 같은 기묘한 자연 현상, 등에 다리가 달린 돼지, 수염 달린 아이 같은 자연의 실수도 기록했다. 또한 황제나 귀족에서부터 유곽의 여인들과 흑인 하인에 이르기까지 정성스럽게 묘사한 그의 드로잉은 신분과 계층을 초월해 인물의 개성과 내면의 분위기, 인간의 존엄을 드러낸다.


알브레히트 뒤러, <사슴벌레>, 1505년/ <롤러카나리아의 날개>, 1512년, 양피지에 수채와 구아슈, 19.6 x 20cm, 알베르티나 미술관, 비엔나


알브레히트 뒤러, <바다 코끼리의 머리>, 1521년, 수채와 잉크, 20.6 x 31.5cm, 영국 박물관, 런던 / <백합>, 1526년


뒤러에게 미술은 자연에 깊이 뿌리박고 있어서 자연을 끌어낼(그릴) 수 있는 자만이 자연을 차지할 수 있다고 여겼다. 동식물과 인간, 환경 등 자연세계에 대한 관심은 동시대의 만능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연상시킨다. 레오나르도가 유기적인 세계의 관계 속에서 대상을 표현했다면, 뒤러는 마치 자연의 백과사전을 편찬하듯 대상 하나하나를 직접 관찰하며 가장 이상적인 초상을 세밀하게 완성했다.


뒤러는 죽음까지도 세계 탐험가이자 연구자답다. 그는 네덜란드 여행(1520-21) 중에 제일란트 해변에 고래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한 겨울에 항해하다가 말라리아로 추정되는 병에 걸려 그 여파로 몸이 약해져 몇 년 후에 사망한다. 단연 뒤러는 치밀하게 자연을 관찰했고 대상을 사랑했으며 그 존재를 살려내는데서 큰 기쁨을 느꼈다. 그리고 그 안에 깃든 창조주의 신성과 위엄까지도 담아냈다.


“사랑과 기쁨이 강요보다 더 나은 선생이다”  - 알브레히트 뒤러




알브레히트 뒤러, <아프리카 남자의 얼굴>, 1508년/ <어머니의 초상>, 1515년, 종이에 목탄, 42.1 x 30.3cm, 베를린 국립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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