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이여, 만세!
구약에 관한 연재를 한 챕터 마치고 나면 그동안 하기 싫어 미뤄두었던 집안일을 한다.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다 보면 이번엔 보물 상자에서 어떤 그림을 꺼내볼까 머리에 이미지가 하나둘 스쳐간다. 이 시리즈는 나에게 숙제 후에 휴식 같은 것이고, 하나의 이미지로 시작해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여정은 왠지 모를 해방감을 준다. 비 온 뒤 찜통더위에 다림질을 하며 온몸에 땀을 흘리고 나니, 무작정 이 그림이 떠올랐다.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1954)의 마지막 작품 <비바 라 비다 Viva la Vida>(1954)다. 에어컨은 켜기 싫고 타는 갈증을 해결하고 싶었던 것일까. 선풍기를 틀고 화면 가득 그림을 띄어 놓고 침을 삼키며 눈으로 수박을 훑어 먹는다.
동그란 지구 같은 수박을 중심으로 다양한 모양으로 잘린 수박들이 둘러싸고 있다. 왼쪽에 반으로 잘린, 우리를 향해 붉은 속살을 드러낸 수박은 마치 이글거리는 태양 같다. 중앙에는 먹기 좋게 잘린 수박이, 오른쪽엔 산골짜기처럼 뾰족뾰족하게 잘린 수박이 눈길을 끈다. 그 뒤로 3/4, 1/4로 잘린 수박과 꼭지를 내민 둥근 수박이 보인다. 흥미롭게도 수박은 실내가 아닌 열린 하늘 아래, 어두운 대지에 놓여있다. 빨강과 초록의 보색 대비와 느슨하면서도 거친 붓질로 묘사된 수박은 강렬한 생명력과 자연의 거친 에너지를 담고 있다. 하늘은 이상하게 왼쪽의 어둑한 하늘과 빛으로 채워진 오른쪽으로 양분되었다.
쨍한 색감이며 개성 강한 수박들이 원무를 추는 듯한 이 그림은, 사실 내 취향과 멀다. 몇 년 전에 자화상을 강의하면서 이 작품을 처음 보았는데, 화가가 고통 속에서 생을 마감하기 며칠 전에 수박에 이 글귀를 기록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Viva la Vida”는 번역에 따라 “삶이여 만세” 혹은 “삶이여 영원하라”를 의미한다. 그녀가 십 대에 겪은 참혹한 교통사고의 여파로 평생 육체적 고통을 겪었고 남편의 잦은 외도로 정신적 괴로움이 더해진 가운데 47살에 세상을 떠난 것을 알기에, 이 글귀가 더 아릿하게 다가왔다.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알았던 프리다는 최후의 작품으로 먹음직스러운 수박 정물화를 남겼고, 거기에 유언과도 같은 말을 써넣었다. 그때도 이렇게 더운 7월이었다.
20세기 멕시코의 화가 프리다 칼로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갈매기처럼 이어진 짙은 눈썹, 여성적이면서도 개성 강한 외모, 멕시코 전통의상 차림의 프리다는 잡지와 sns에서 마치 패션 아이콘으로 기억된다. 전 세계에 프리다 마니아를 탄생시켰고, 서점가를 가면 반 고흐만큼이나 그녀의 극적인 삶과 그림을 다룬 책도 많이 나와 있다. 강렬한 인상 때문인지 동화책에서 프리다를 본 아이들도 쉽게 그녀를 알아본다. 더운 날씨 때문에 갑자기 떠오른 이 그림을 이번 기회에 좀 더 깊게 이해하고 싶어졌다. 프리다의 마지막 작품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짧고 굵은 삶을 훑어봐야 한다.
프리다는 1907년 멕시코 시티 외곽의 코요아칸(Coyoacán)에서 독일인 아버지와 인디언 혈통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유년기 때 걸린 소아마비로 오른쪽 다리가 제대로 자라지 않았지만, 그녀는 총명하고 아름다운 소녀로 성장했다. 프리다는 멕시코 시티에 있는 국립예비학교에 입학한 최초의 여학생들 중 하나였고, 의사가 되기를 꿈꾸었다. 그런데 1925년, 하굣길에 탄 버스가 전차와 충돌하면서 부러진 쇠기둥이 18살 소녀의 몸을 관통하는 끔찍한 사고가 일어났다. 옆구리에서 척추와 자궁을 거쳐 오른쪽 다리까지 프리다의 몸은 그야말로 산산이 부서졌다. 전신에 깁스를 한 채 침대에 누워만 있던 이 시기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부모님이 침대에 설치해 준 거울과 화구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프리다의 첫 자화상(1926)이 탄생했다.
자연스럽게 프리다는 의사가 아닌 화가의 길을 걷게 되었고, 운명처럼 몇 년 후에 멕시코의 유명한 벽화가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와 결혼한다. 거구에 20세 연상인 디에고는 프리다에게 더 끔찍한 사고였다. 멕시코 벽화운동의 주역으로 국내외 다수의 벽화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대가였지만, 화려한 여성 편력으로 유명했던 그는 결혼 후에도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살았다. 1931년에 프리다가 그린 부부초상화를 보면, 디에고는 팔레트와 붓을 든 자신만만한 화가고 프리다는 그의 다소곳하고 예쁜 아내일 뿐이다.
1930년대 몇 번의 임신과 유산을 경험하면서 프리다는 그 고통과 상실감을 그림에 적나라하게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도 디에고의 스캔들이 계속되었고, 급기야는 프리다의 동생과 바람을 피운 사건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술에 의존했고, 보란 듯이 조각가 이사무 노구치, 사진작가 니콜라스 머레이, 러시아의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 등 주변의 남성들과 가까운 관계를 가졌다. 사고의 후유증과 남편의 외도로 육체적, 정신적 건강이 악화되는 가운데, 프리다는 자신을 주제로 작업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자신의 내면과 기억, 여성의 육체와 모성, 섹슈얼리티를 거리낌 없이 묘사하며 정체성을 탐구한 자화상은 그녀의 전작품에서 1/3을 차지한다(150여 점의 중에 55점). 프리다는 디에고처럼 멕시코의 전통과 화풍을 반영하면서도 자기만의 경험과 내면을 강렬하게 표현한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1930년대 말 파리와 뉴욕에서의 전시를 통해 점차 프리다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고, 그림도 하나둘 팔리기 시작한다.
“나는 나 자신을 그린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 자주 혼자이고 또 무엇보다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가 나이기 때문이다.”
자유를 원했던 디에고의 요구로 1939년에 이혼하게 되면서 프리다의 가장 처절하고 강렬한 걸작들이 탄생한다. 디에고와 살던 집을 떠나 친정집 카사 아술(La Casa Azul)에 머무르면서, 프리다는 열대식물과 애완동물이 북적이는 그녀만의 왕국을 만들었다. 이때의 많은 자화상에선 <가시 목걸이를 한 자화상>에서와 같이 동물들이 그녀의 유일한 벗으로 등장한다. 원숭이와 고양이가 함께한 가운데 프리다의 목에는 가시나무 가지가 둘러져있고 그녀의 눈썹을 닮은 죽은 새가 매달려 있다. 죽음과 같은 고통 속에 있지만 프리다는 언젠가 머리 위의 꽃과 나비처럼 부활하길 바란다.
서로에 대한 열정과 교감으로 헤어질 수 없었던 프리다와 디에고는 일 년 만에 재혼한다. 동지애로 결합한 두 사람은 남은 생애 동안 서로 의지하면서 멕시코의 문화 보존과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이상을 추구해 나갔다. 안타깝게도 프리다의 척추병이 재발하면서 그녀는 철로 된 보정기를 차고 한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 해에 그린 <부러진 기둥>에서 척박한 대지에 선 프리다는 알몸에 보정기를 차고 있다. 갈라진 살 틈으로 보이는 척추는 고전 건축의 여기저기 부러진 기둥으로 묘사되었다. 온몸에 박힌 못과 하얀 눈물은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나타낸다. 수술이 계속되면서 프리다는 극심한 고통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거나 모르핀을 맞아 중독되기에 이른다. 육체는 망가져가고 디에고의 스캔들이 계속되자 프리다는 더욱더 그에게 집착하게 되었고,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를 향한 변함없는 사랑을 자화상에 담았다.
“내 인생에서 두 번의 거대한 사고가 있었다. 하나는 버스 충돌 사고, 다른 하나는 디에고다. 둘 중에 디에고가 더욱더 끔찍하다”
1950년대 프리다는 거의 침대에 누워 생활하면서 <비바 라 비다>처럼 작은 크기의 정물화를 주로 그렸다. 그 가운데 <우는 코코넛>을 보면, 눈물을 흘리는 코코넛과 시선을 멀리 피한 코코넛이 프리다와 디에고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과일에 꽂힌 멕시코 국기는 전통문화에 대한 프리다의 자부심과 애국심을 드러낸다. 프리다는 이전에도 정물화를 그리곤 했는데, <지구의 열매>처럼 노골적인 성적 암시나 때론 오감을 자극하는 묘사 때문에 야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반면 말년의 정물화는 보다 형태가 단순하고 표현도 소박해진다. 정물화인데도 그녀의 변화하는 내면과 관심, 욕망을 반영한 것이 흥미롭다.
프리다의 상태가 심상치 않자 주변의 도움으로 1953년 멕시코에서 최초로 개인전이 열렸고, 그녀는 침대에 누운 채로 오프닝에 참석했다. 몇 달 후 합병증으로 오른쪽 다리를 무릎까지 절단했을 때, 그녀는 일기장에 애써 자신을 위로했다. “날 수 있는 날개가 있는데 두 발이 왜 필요하겠어?” 다음 해 프리다는 무뎌진 손으로 최후의 작품 <비바 라 비다>를 그렸다. 7월 6일에 그녀의 47세 마지막 생일을 축하했고, 이때쯤에 수박에 글씨를 써넣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리다는 며칠 후인 13일에 그녀가 태어난 파란 집 카사 아술에서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을 직감했던지 그 전날 디에고에게 결혼 25주년 선물을 미리 주었다고 한다.
멕시코 사람들이 이 수박 그림을 보면, ‘죽은 자들의 날(Día de Muertos)’에 망자를 위해 차린 음식을 떠올릴 것이다. 이 날은 세상을 떠난 가족과 친구들을 기억하고 제를 올리는 멕시코의 국경일(10월 31일~11월 2일)로, 제단을 꽃으로 장식하고 그들이 좋아했던 음식과 과일을 올린다. 어떻게 보면 프리다는 저 세상으로 가는 자신을 위해 이 그림을 그렸다. 자연의 가장 강렬한 보색, 초록과 빨강으로 물든 수박은 청춘처럼 싱그럽고 과즙이 많은 데다 달콤해 한 여름의 갈증을 풀어주는데 최고였기 때문이다. 수박의 씨는 석류처럼 왕성한 생식력을 상징하고, 그녀의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양분된 하늘은 밤과 낮, 즉 시간의 흐름을 암시한다. 결국 각기 다른 모양의 수박은 삶의 다양한 단계와 상태를, 그것들의 원무는 삶과 죽음의 영원한 순환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멕시코에서 죽음은 삶의 일부였고, 영화 <코코>에서 볼 수 있듯이 슬픈 애도보다는 즐기는 축제로 죽은 이들을 맞이했다. 프리다 칼로도 다른 생애로 가는 길에 수박 정물화로 이곳에서의 생생한 삶의 아름다움을 찬미했다. 삶이여, 만세!, 삶이여, 영원하라!라고.
콜드플레이의 팬이라면 ‘비바 라 비다’라는 글귀가 익숙할 것이다. 2008년에 출시된 콜드플레이의 대표곡으로, 실제로 프리다 칼로의 마지막 작품 제목에서 가져와 곡명을 정했다고 한다. 노래는 몰락한 왕이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읊조리는 내용이다. 영원한 권력은 없고 모든 것은 변한다는 메시지로, 2017년 대통령 탄핵을 이뤄냈던 우리나라의 집회나 영상에서 종종 흘러나온 곡이기도 하다. 앨범 커버는 곡의 내용이기도 한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87~1863)의 <7월 8일, 민중을 이끄는 자유>를 사용했다. 7월 혁명을 담은 이 그림은 샤를 10세의 전제에 대항하는 다양한 계급의 인물들과 프랑스 국기를 든 ‘자유의 알레고리’ 여성이 주인공이다. 과연 혁명은 무엇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속에 위험을 무릅쓴 용기가 그 씨앗이 아닐까. 콜드플레이의 보컬 크리스 마틴은 상상하기 어려운 육체적 고통과 파란만장한 삶에도 불구하고 인생 만세를 외치는 프리다의 강인한 정신, 담대함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가끔 여러 ‘만약’을 떠올릴 때가 있다. 프리다가 버스에 같이 탄 첫사랑 남자 친구와 자리를 바꿔 앉았다면... 의사가 된 프리다는 이토록 강렬한 작품들을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또 이런 재난 같은 사고가 나 자신, 혹은 가까운 사람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살이 떨릴 만큼 두려움이 몰려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 내가 반드시 지키고 싶은 능력이라면 프리다처럼 용기 있게 끝까지 자신을 마주하는 것, 그리고 고통의 끝자락에서도 감탄할 수 있는 힘이다.
콜드플레이의 <비바 라 비다>를 듣고 싶다면, 라이브도 좋지만 올드 버전으로,
https://www.youtube.com/watch?v=1kVxpsi1XQ4
27년간 치열하게 소통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함께 투쟁했던 프리다의 시신이 화장터에서 나오자, 디에고는 그녀의 재 한 줌을 삼켰다고 한다. 이후 디에고가 국가에 기부한 그들의 집 카사 아술은 프리다 칼로 박물관이 되었다. 프리다가 세상을 떠난 후 3년 후에 디에고는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영혼과 연결되고 싶었던 것일까. 디에고도 마지막 그림으로 그를 닮은 투박한 수박 그림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