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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연희 Aug 04. 2023

파블로 피카소의 <늙은 기타 연주자>

: 빈곤 속에서 울리는 예술의 힘


청년일 때는 노인이 잘 보이지 않는다. 공대생일 때부터 졸업 후 몇 년을 일하다가 다시 미술사를 공부한다고 젊음의 거리 홍대에서 거의 15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다 보니, 나의 세상은 거의 청춘의 무늬로 채워져 버렸다. 눈은 매일 젊은 아름다움과 시각적 쾌락에 쫓았고, 어리석게도 그땐 청춘이 영원할 줄 알았다. 미술사를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으로 회사를 그만두었을 때, 모은 돈으로 미국에 간 적이 있었다. 할머니가 사셨던 시카고에서 들린 미술관에는 미술사책에서 본 명화들이 많아 눈호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모네와 고흐, 쇠라, 샤갈 등 색채가 풍부한 작품들 사이에서 나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닌 우중충한 기타 치는 노인이었다. 깊고 다채로운 파란 색감도 좋았지만, 눈먼 거리의 노인이 고개를 떨군 채 기타를 치는 모습이 아름다워서 한 동안 그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작가를 확인해 보니 입체파의 창시자로 20세기를 주름잡았던 피카소의 작품이었다.  



파블로 피카소, <늙은 기타 연주자>, 1903-4년, 패널에 유채, 122.9 x 82.6cm, 시카고 미술관


새하얀 머리의 노인이 길모퉁이에 앉아 기타를 연주한다. 오랫동안 잘 먹지 못했는지 몸은 앙상하고 볼은 깊게 파여 있다. 푹 꺼져 있는 눈은 그가 눈먼 맹인임을 나타낸다. 한쪽으로 고개를 떨구고 기타를 연주하느라 그의 쇄골과 각진 어깨가 더 도드라진다. 비참한 거리의 노인으로 보이지만, 연주에 몰입한 그의 모습은 무척 매혹적이다. 어느새 눈은 하이라이트 된 그의 손가락으로 향한다. 아무나 갖지 못한 긴 손가락으로 기타를 잡고 튕기는 자태는 힙한 뮤지션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구멍 난 옷 사이로 드러난 어깨도 마냥 남루해 보이지 않는다. 그는 어떤 음악을 연주하고 있을까. 유튜브에서 스페인 기타 음악을 검색해 틀어본다. 그의 벌린 입 사이에선 힘겨운 숨이 흘러나올까. 아니면 구슬픈 멜로디를 흥얼거리고 있을까. <늙은 기타 연주자>는 피카소가 청년 시절 그렸던 일련의 청색 그림들 가운데 하나다.



파블로 피카소, <기마 투우사>, 1890년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는 생의 대부분을 프랑스에서 활동했지만, 스페인 남부의 말라가 태생이다. 화가이자 미술 교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리며 주변을 더욱 세밀하게 인식했다. 9살 꼬마 피카소의 그림은 아버지와 투우장에 갔을 때 본 기마 투우사의 모습을 담고 있다. 간략한 붓질로 인물의 특징을 잡아낸 첫 유화 작품을 그는 평생 간직했다. 라 코루냐(1891)와 바르셀로나(1895)로 이사해 아버지가 미술을 가르치는 사이, 점차 피카소의 그림 실력이 아버지를 능가하게 된다. 드로잉 속도와 실력이 뛰어났던 피카소는 16살 나이에 수도 마드리드에 있는 왕립 아카데미에도 합격한다. 하지만 지루한 아카데미의 교육은 학교를 떠나게 했고, 대신 그는 프라도 미술관에서 위대한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고 연구했다. 피카소는 얼마 되지 않아 그리운 도시 바르셀로나로 돌아와 다양한 예술가, 문인들과 어울렸다. 19세기말 바르셀로나는 산업화와 도시개발로 창의적인 건물이 들어서며 역동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피카소는 카페에서 전시회를 열거나 미술잡지를 창간하며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더 큰 무대로 나가고 싶었다. 


“나는 열다섯 살에 벨라스케스처럼 그렸다. 덕분에 나는 80년 동안이나 아이처럼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파블로 피카소, <압생트 마시는 여인>, 1901년, 65.8 x 50.8cm, 멜빌홀, 뉴욕/ 73 x 54cm, 에르미타주 미술관, 상트페테르부르크


1900년 가을, 피카소는 화가이자 시인인 친구 카를로스 카사헤마스와 모던 미술의 중심지인 파리로 향한다. 19세기 중후반 근대 도시로 재탄생한 파리는 산업과 예술의 발달로 그야말로 가장 좋은 시절(벨 에포크)을 맞았다. 피카소가 도착했을 때 파리 만국박람회가 한창이었다. 지하철과 백화점이 생겨나고 카바레와 댄스홀에 신사와 숙녀들로 붐볐던 파리는 볼거리와 욕망이 분출하는 도시였다. 프랑스어를 거의 할 줄 몰랐던 피카소는 예술가와 빈민들이 사는 파리 북부 몽마르트르에 자리 잡았다. 물론 미술관과 갤러리를 돌며 과거와 모던 미술을 연구하고 흡수해 나갔다. 무엇보다 피카소에겐 활기찬 거리의 풍경과 다양한 사람들이 더욱 강렬한 영감으로 다가왔다. 그는 화려하고 자유로운 도시 파리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이때 피카소의 그림을 보면 르누아르와 드가, 고흐와 고갱 등 선배 화가들의 소재와 양식이 혼재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피카소는 특히 툴루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 1864~1901)의 작품에 이끌려 밤의 유흥가와 외로운 사람들을 그려나갔다. 위의 두 그림은 압생트를 마시는 여인을 소재로 피카소가 같은 해에 그렸지만 마치 다른 작가의 작품처럼 보인다. 한쪽은 로트렉풍의 밤 분위기와 르느와르의 엉성한 붓질로 심야의 몽롱한 취기를 담아냈다면, 다른 쪽은 고갱의 화려한 색면과 검은 윤곽선으로 여인을 개성 있게 묘사했다. 당대의 유행을 빠르게 포착했던 피카소는 곧 화상의 눈에 띄었고, 정기적으로 그림을 주는 대가로 경제적인 지원을 받게 된다.  



파블로 피카소, <나, 피카소>, 1901년, 패널에 유채, 73.5 x 60.5cm /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81 x 60cm, 피카소 미술관, 파리


파리에 온 다음 해 스무 살의 피카소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자화상을 남겼다. 왼쪽은 한밤중에 작은 불빛에 의지해 작업하는 화가를 보여준다. 작업 중인데 그는 꽤나 멋진 하얀 셔츠에 오렌지색 스카프를 둘렀고, 자신감에 가득 찬 얼굴은 빛을 받아 반짝인다. 왼쪽 상단엔 마치 쿨한 래퍼처럼 “YO, Picasso (나, 피카소)”라는 사인을 남겼다. 아버지와의 사이가 마냥 순탄치 않았던 피카소는 평생 어머니의 성인 피카소로 서명했다. 어둠 속에 강렬한 색의 대비와 거친 붓질의 흔적은 과감하고 열정적인 그의 성격을 드러낸다. 피카소는 유명한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앞두고 있었다. 이 멋진 보헤미안 예술가는 곧 파리의 미술을 정복할 것이다.


그런데 몇 달 후 그린 파란 자화상에서 피카소는 더 이상 호기 있는 청년이 아니다. 창백한 얼굴에 두 눈은 생기를 잃었고 볼을 푹 꺼진 데다 덥수룩한 턱수염이 나 있다. 마치 인생의 고뇌와 고독을 관조하는 중년의 남자 같다. 피카소는 90이 넘는 긴 생애 동안 양식이 변할 때마다 자화상을 남겼는데, 노년의 자화상보다도 생기 없고 나이 들어 보일 정도다. 색도 청색 톤으로 제한했는데, 이후 몇 년간 피카소는 마치 파란 렌즈를 끼고 바라보듯이 세상을 그렸다. 유망한 청년 화가의 시선과 표현이 갑자기 변한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일까.



파블로 피카소, <카사헤마스의 죽음>, 1901년, 캔버스에 유채, 27 x 35cm, 피카소 미술관, 파리

파리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피카소의 친구 카사헤마스는 모델 제르멩과 사랑에 빠졌다. 그는 이전부터 발기불능으로 괴로워했는데, 제르멩이 구애를 받아주지 않자 절망에 빠져 버렸다. 파리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1901년 2월, 카사헤마스는 한 카페에서 파티를 열고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프러포즈를 했다. 그녀가 거절하자 결국 그는 자신에게 방아쇠를 당겼다. 스페인 여행 중이었던 피카소는 그 자리에 없었지만, 타지에서 함께 지낸 친구의 자살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피카소가 친구의 마지막을 담아낸 그림을 보면, 푸른빛으로 변한 그의 얼굴에 총구멍의 흔적이 남아있다. 옆에 유난히 큰 촛불에서는 짧은 붓질로 묘사된 원색의 빛들이 퍼져나간다. 피카소는 친구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은 화가 반 고흐의 화풍으로 이 장면을 그렸다. 몇 개월이 지난 그해 여름, 친구의 죽음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피카소는 청색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위의 그림과 친구의 장례식을 파란 톤으로 그리면서 그는 죽은 친구의 넋을 기렸다. 사교적이고 카리스마 있는 피카소는 깊은 우울증에 빠졌고 향후 몇 년간 화려한 색채를 쓰지 않았다.


“나는 카사헤마스가 죽었다는 사실을 의식했을 때 청색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파블로 피카소, <우울한 여인>, 1902-3년, 캔버스에 유채, 100 x 69.2cm, 디트로이트 미술관, 미시간/ <수프>, 38.5 x 46cm, 온타리오 미술관, 토론토


상실과 고통을 겪어본 사람이 그런 사람의 처지와 아픔을 알아보는 법. 피카소는 위에서 본 것처럼 슬픈 자신을 시작으로 주변의 사람들을 청색으로 표현했다. 특히 거리의 외로운 여인들이 자주 등장한다. <우울한 여인>에서 공들인 머리를 한 여인은 공허한 눈빛으로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하다. 당시 댄서나 세탁부로 일하는 여인들 중에는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몸을 파는 경우가 많았다. 엄마와 아이, 모성을 다룬 그림들도 눈에 띈다. 그 가운데 <수프>에선 엄마가 정성껏 준비한 소박한 음식을 딸에게 건넨다. 배경이 텅 빈 화면은 차갑지만 엄마의 사랑과 온기가 전해지는 따듯한 그림이다.


청색 톤의 그림을 그렸던 피카소의 ‘청색 시대(The Blue Period)’는 4년(1901-4) 간 지속된다. 자연에서 파랑은 하늘과 바다, 시간으로 치면 밤의 색이다. 물론 거기에는 위의 그림에서처럼 수없이 많은 파랑이 존재한다. 이 시기 피카소는 몽마르트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거지와 창녀, 불구자, 알코올 중독자, 가난한 예술가 등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난 하층민을 주로 그렸다. 그들은 피카소처럼 대개 가난하고 고독하거나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이다. 파랑이 전달하는 느낌의 스펙트럼은 꽤 넓지만, 피카소의 그림에서 파랑은 차갑고 냉정한, 외롭고 우울한, 때론 빈곤이나 절망, 노년, 죽음 등과 연관된다. 파리에 와서 선배 화가들을 모방하다가 시작된 청색의 그림들은 피카소의 내면과 고유한 시각이 표현된 최초의 언어였다. 갑자기 어두워진 그림들을 보고 그를 후원했던 화상들이 떠나갔다.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피카소는 이 작업을 몇 년간 지속했다.



파블로 피카소, <늙은 유대인과 소년>, 1903년, 125 x 92cm 푸쉬킨 미술관, 모스크바/ <맹인의 식사>, 95.3 x 94.6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청색 시대에 피카소는 친구집에 얹혀살면서 친구가 자는 밤마다 작업에 몰입했다. 너무 비참한 상태일 때는 바르셀로나의 부모님 집에 가서 작업했지만 파리로 돌아오길 반복했다. 실제로 가장 배고팠던 이 시기에 그는 거지나 빈민의 식사를 소재로 자주 다루었다. <늙은 유대인과 소년>은 굶주린 거리의 사람들을, <맹인의 식사>는 눈먼 청년의 소박한 식사를 보여준다. 베레모를 쓰고 스카프를 두른 단아한 차림의 청년은 가난한 예술가로 보인다. 최근 적외선 촬영에서 이 그림 아래 여성의 웅크린 누드가 발견되었는데, 궁핍했던 이 시기에 피카소는 캔버스를 종종 재활용해 그렸다.


엘 그레코, <성흔을 받는 성 프란체스코>, 1590-95년, 캔버스에 유채, 114 x 104cm, 아일랜드 국립미술관, 더블린

청색 시대의 인물들은 이처럼 길쭉하고 수척한 모습이 특징적인데, 피카소가 스페인 여행 중에 본 16세기의 화가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의 그림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반종교개혁 시기에 열정적인 가톨릭 신앙의 본거지였던 스페인에서 그레코는 매우 특이한 종교화를 남겼다. 어둡고 불안정한 공간에 유동하는 듯한 구름과 비정상적으로 길쭉한 인물은 신성의 영역과 강렬한 영성을 드러낸다. 예컨대 <성흔을 받는 성 프란체스코>에서 묵상 중에 성흔(그리스도가 십자가형을 당할 때 몸에 생긴 상처)을 받았던 성인은 창백한 얼굴과 피골이 상접한 긴 몸을 가졌다. 프란체스코는 13세기에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인간과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 청빈한 삶을 살며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레코가 그린 예수와 제자들, 성인들은 가장 낮고 소박한 자리에서 고통과 핍박을 견뎌낸 인물들이다. 피카소가 어렵고 괴로운 사람들을 그리면서 그레코의 언어를 활용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파블로 피카소, <늙은 기타 연주자>, 1903-4년, 패널에 유채, 122.9 x 82.6cm, 시카고 미술관


다시 <늙은 기타 연주자>로 돌아와 보자. 이 작품은 피카소가 바르셀로나 집에 갔을 때 본 거리의 연주자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페인은 14세기에 아랍에서 소개된 기타와 플라멩코, 집시 문화가 널리 퍼진 곳이다. 아마도 노인은 젊은 시절부터 기타 연주자로 생계를 유지해 왔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앞의 <맹인의 식사>의 청년처럼 눈먼 예술가다. 시각은 화가에게 가장 중요한 감각이기 때문에, 앞을 못 본다는 것은 피카소의 큰 두려움 중에 하나였다. 그것은 세기말에 퍼졌던 매독의 후유증이기도 했다. 어떤 예술가이건 앞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정말 두려운 장벽이지만, 어쩌면 평범한 사람이 감각하지 못하는 것,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가능하게도 한다. 이때 피카소가 눈으로 본 형태와 색채로 인물을 정확하게 묘사하지 않은 것처럼, 어쩌면 내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표현한 것이 더 진실하고 호소력이 있다.  


젊음도 가고 가난에 눈멂까지, 기타 치는 노인의 삶은 실로 비참할 것이다. 그래서 파란 화면은 냉정한 세상 속에서 노인의 빈곤과 고독, 고통을 강조한다. 그런데 화면의 중심에 그가 연주하는 기타는 유일하게 보색인 황톳빛을 띤다. 기타는 노인의 생계를 유지하게 하는 도구이자 눈먼 그의 동반자이고 아름다운 멜로디로 위로해 주는 친구다. 그의 음악은 또한 차가운 세상에 온기를 전한다. 이런 면에서 이 그림은 예술가의 고독과 고통,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난 예술의 힘도 이야기한다. 피카소의 오랜 친구이자 시인 사바르테스에 의하면, “피카소는 예술이 슬픔과 고통에서 태어나는 것이라 믿고 있었다.” 이 노인의 연주처럼 피카소의 청색 그림들도 빈곤과 고통 속에서 태어나 어떤 이의 마음속에서 공명을 일으킨다. 어쩌면 그때 내 마음도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우중충한 블루였기에 연주하는 노인의 모습에서 깊은 아름다움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피카소의 청색시대는 1904년 한 여인과 사랑에 빠지면서 끝이 난다. 여인의 쾌활함과 사랑으로 밝은 렌즈를 끼게 된 피카소는 이제 세상의 다른 사람들을 장밋빛으로 그리기 시작한다.



정확한 색의 도판을 찾기 어려워 위의 어두운 버전과 밝은 버전 두 개를 올렸다. 아래 소장 미술관이 제공한 영상이 가장 원작에 가까워 보인다.

https://www.youtube.com/watch?v=SsRldh2cgVY



피카소에게 엄청난 영향을 받았던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1937~) 또한 이 작품에 영감을 받아 파란 기타가 여기저기에 등장하는 20점의 판화로 구성된 아트북 『The Blue Guitar』(1977)를 제작했다. 아래 링크를 통해 전 작품을 볼 수 있다.

 

데이비드 호크니, 『The Blue Guitar』중, 에칭과 아쿼틴트, 35.6 x 42.5cm

https://issuu.com/powershift/docs/hockney_blue_guitar_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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