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친 파도 속으로, 원시의 자연으로
떠나는 여름을 붙잡고 싶었던 것일까. 올해도 휴가다운 휴가를 떠나지 못한 아쉬움 때문일까. 지난주 일상의 조각들이 고갱에게로, 결국 그의 <파도 속에서>로 나를 이끌었다. 고갱이 아내와 친구 화가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읽으면서 가족을 저버릴 만큼 그림에 모든 것을 걸었던 그의 열정과 집요한 끈기에 놀랐다. 고갱이 프랑스와 남태평양의 섬들을 방랑하며 담아낸 열대의 풍경들 속에서도 한참을 헤매었다. 어린 시절을 페루에서 보낸 경험은 그의 삶과 작품에 큰 방향을 제시했는데, 우연히 여행 유투버 원지의 페루 여행도 보게 되었다. 지역 축제에 가서는 훌라춤을 추고 인공의 파도를 타는 사람들을 멀찍이서 바라보며 열대의 음악을 들었다. 너무 더웠던 이번 여름이 지겨웠는데, 막상 찬바람이 부니 열대의 자연으로 떠나고 싶었다.
청명한 에메랄드빛 바다에 몸을 맡긴 한 여인이 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여인은 두 팔과 고개를 들고 살포시 눈을 감은 채 온몸으로 파도를 만난다. 고갱은 뒤쪽에서 굽어보는 시선으로 다가가, 부서지는 하얀 파도 속의 여인을 묘사했다. 사선으로 기운 몸의 일부가 잘린 과감한 구도다. 그녀의 오렌지색 머리는 바다를 더욱 선명한 초록으로 만든다. 수평선과 하늘이 보이지 않아 이 바다를 조망할 수는 없지만, 강렬한 색면의 바다에 몸을 던진 여인은 보는 이를 파도 속으로 끌어들인다. 태초의 모습 그대로, 남들의 시선 따윈 신경 쓰지 않고, 바다에 대한 두려움도 잊고, 찰싹거리는 파도를 느끼며 자연과 하나가 된다.
<파도 속에서>는 뒤늦게 화가가 된 고갱이 파리를 떠나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 지역에서 지냈던 시기에 제작한 것이다. 고갱은 자연의 빛나는 순간을 포착하려 했던 인상파의 영향에서 벗어나 1888년경부터 경험과 상상을 종합한 상징주의 언어를 확립해 나갔다. 40살인 1889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파리 만국박람회 때 카페 볼피니에서 고갱의 주요 작품들과 함께 전시되며 상징주의의 시작을 알렸다. 원시를 향한 참을 수 없는 갈망으로 고갱은 모든 것을 정리하고 2년 후 남태평양의 타히티로 떠난다. 이후 12년간 폴리네시아의 섬들에서 탄생한 걸작들은 원시와 문명, 실재와 상상의 충돌을 보여준다. 화려한 열대의 풍경과 초상은 이국에 대한 화가의 주관적인 환상은 물론 시대와 인생의 질문들도 품고 있다.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의 유명세에 가려져 있지만, 미술사와 후대 화가들에게 끼친 영향은 더욱 지대하다. 또한 그의 삶은 『달과 6펜스』(1919)라는 소설을 탄생시켰을 만큼 극적인 모험으로 가득 차 있다. 고갱은 프랑스가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에 파리에서 태어났다. 신문 기자였던 아버지는 고갱이 한 살 때 파리를 떠나 가족과 페루로 향하던 도중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남미 페루 리마에서 어린 시절(1850-4)을 보낸 고갱은 나중에 자신을 잉카의 후예로 여길 만큼 이곳의 삶과 문화를 동경했다. 1854년에 가족이 프랑스로 돌아왔지만 형편은 여전히 어려웠다. 17살의 청년 고갱은 선원이 되어 배를 타고 7년간 남미와 지중해, 인도 등을 여행했는데, 이 경험 또한 그의 성격과 세계관에 큰 바탕이 된다. 어머니의 사망(1871)으로 그는 선원 생활을 그만두고 지인의 소개로 파리의 증권거래소에서 일했다. 그리고 덴마크 여성과 결혼해 다섯 아이를 낳으며 십여 년을 윤택한 중산층으로 살았다.
브로커로 일하면서 고갱은 그림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마네와 세잔 등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수집했고, 주말에는 화실에서 그림을 배웠다.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하면서 인상주의 전시회에 그림을 출품하기도 했다. 그림에 대한 열정은 더욱 커져갔고 주식시장의 붕괴로 일자리를 잃게 되자 고갱은 1883년 35살에 돌연 전업화가의 길을 선택한다. 그에게 “미친 짓을 할 줄 모르는 청년은 이미 늙은이일 뿐“이었다. 가족을 제대로 부양할 수 없게 되자 아내는 아이들과 덴마크로 떠났고, 고갱은 쫓아가 어떻게든 가정과 작업 둘 다 잡으려 했다. 하지만 결국 가족을 저버리고 파리로 돌아와 작업에 집중한다. 당시 고갱의 <이젤 앞의 자화상>은 다락방에서 작업에 열중한 진지한 화가로 자신을 제시한다.
“저는 용기도 돈도 모두 떨어졌습니다... 다락방으로 올라가 목에 밧줄을 매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날마다 엄습해 옵니다. 제 발목을 잡는 건 오직 그림뿐입니다 “
- 1885년 5월 고갱이 피사로에게 보낸 편지
파리에서 배를 곯고 벽지를 붙이는 알바를 하면서 비참하게 작업하던 고갱은 1886년 6월 브르타뉴의 퐁타방으로 떠난다. 프랑스 북서부에 위치한 퐁타방은 고유한 전통이 잘 보존된 데다가 물가가 저렴해 이미 예술가촌이 조성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고갱은 “원시와 야생이 살아있는 시골을 사랑”했다. 고갱의 <브르타뉴 여인들의 춤>에서 볼 수 있듯이, 하얀 머리쓰개와 전통 의상 차림의 여인들은 화가들의 훌륭한 모델이 되어주었다. 춤추는 여인들은 단순하면서도 장식적인 형상과 색채로 묘사되어 음악적인 리듬감을 전달한다. 이때 고갱은 어린 시절에 페루에서 보았던 토속적인 도자기 작업도 시도한다.
원시의 삶과 미술에 대한 갈망으로 다음 해 고갱은 카리브해로 떠난다. 파나마와 마르티니크섬에서 질병으로 된통 고생했지만, 이국의 낙원 같은 풍경과 원주민을 묘사한 그림들은 곧 파리에서 주목을 받았다. 고갱은 위의 <망고 따기>에서처럼 원주민의 삶과 우아한 몸놀림, 빛바랜 원색의 옷에 매료되었다. 고흐의 동생이자 미술중개상인 테오는 이 작품을 포함해 몇 점의 그림과 도자기를 구입했다. 이를 계기로 고갱은 고흐 형제와 가까워졌고, 테오의 간절한 제안으로 1888년 고흐와 함께 남프랑스의 아를에서 함께 작업한다. 두 화가는 미술에 대한 견해와 성격 차이로 자주 충돌했지만, 이를 계기로 각자의 언어를 확립해 나갔다. 알려진 바와 같이 그들의 동거는 결국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르는 사건으로 9주 만에 끝나게 된다.
아를 시기 전후로 1888-9년 브르타뉴에 머물렀던 동안은 고갱의 상징주의(혹은 종합주의라고도 불리는)가 구체화된 중요한 시기다. 특히 고흐의 소개로 만나게 된 에밀 베르나르(Émile Bernard, 1868~1941)와 교류하면서, 자연을 본 데로 재현하려는 미술의 오랜 전통을 넘어서 주관적인 경험, 상상과 사고를 종합해 표현하는 ‘종합주의’의 언어를 정립했다. 고갱은 점차 단순화된 형태와 굵은 윤곽선, 선명하고 임의적인 색채로 표현했는데,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이는 일본의 채색 목판화 우키요에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영성과 개념을 담아낸 스테인드글라스처럼 형태를 검은 윤곽선으로 분할하고 색면으로 채우는 기법(클루아조니즘, cloisonnism)과도 유사하다. 최초의 상징주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고갱의 <설교 후의 환영>(1888)은 실제 브르타뉴 여인들과 이들이 설교 후 보게 되는 환영이 화면에 공존한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아래 글 참고)
https://brunch.co.kr/@9c43e67b437d4a5/22
“자연에 너무 매달리지 말게. 예술은 일종의 추상이야. 자연 앞에서 꿈을 꾸면서 추상적 형상을 끌어내야 하는 거야.” - 고갱이 친구 슈페네커에게 보낸 편지(1888년 8월 14일, 퐁타방에서)
여기서는 비슷한 맥락으로 그린 <황색의 그리스도>를 살펴보자. 브르타뉴의 풍경 속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상이 우뚝 서있다. 주변에는 <설교 후의 환영>처럼 브르타뉴의 여인들이 앉아 묵상하고 있는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그들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고갱은 인근 성당에 있는 채색 나무 십자가상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단순화된 예수의 몸과 풍경을 불타는 듯 강렬한 노랑과 주황으로 채색했다. 그 옆에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에서 고갱은 자기 작품, 황색 그리스도와 얼굴 토기 사이에 위치해 있다. 토기는 같은 해에 고갱이 빚은 <자화상컵>으로, 담배를 문 고갱의 거칠고 투박한 얼굴이 묘사되었다. 고갱이 제작한 독특한 얼굴 토기는 어머니가 수집했던 페루의 도자기와 유사한데, 유년기의 기억과 원시적 갈망을 드러내는 모티프로 그의 그림에도 종종 등장한다. 십자가상과 토기 사이의 고갱은 단호한 눈빛으로 관자를 바라본다.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여러 차례 언급한 것처럼, 우리에게 자기는 ‘예술을 위한 순교자’이자 ‘야만인’ 고갱이라고 말한다. 영적인 것을 추구하면서도 미개인에 가까운 자기의 이중적인 본성을 드러낸 것이다.
당대의 많은 화가들처럼 고갱도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았다. 우키요에는 일본 에도 시대(17~19세기) 대중 사이에서 유행하던 채색 목판화로, 주로 여인과 배우, 명소의 풍경과 서민의 풍속 등을 담고 있다. 유럽으로 수출하는 공예품의 포장지로 전해졌는데, 간결한 형상과 밝고 선명한 색채, 실험적인 시점과 구도로 이목을 끌며 19세기 유럽에서 일본 문화 붐(자포니즘, Japonisme)을 이끌었다. 호쿠사이의 <가나가와의 거대한 파도>는 멀리 후지산을 배경으로 거대한 파도가 긴 배를 집어삼키려는 순간을 보여준다. 꼬물거리는 선과 파란 채색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은 판화는 특히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었다. 고흐가 모사하기도 했던 히로시게의 벚꽃 풍경은 마치 사진처럼 일부만을 포착한 대담한 구성과 화려한 색채의 대비를 보여준다. 고갱은 고흐처럼 우키요에를 모사하기보다 여러 모티프(특히 씨름하는 사람)를 자기식으로 표현했고, 대담한 색채와 구성도 실험해 나갔다.
고갱이 퐁타방에 머물던 시기에 그린 <파도>로 가보자. 이 작품은 현지인 친구와 가던 르 풀뒤 해안가의 풍경을 독특하게 위에서 본 시점으로 담았다. 몇 개의 돌섬이 있는 해안가로 하얀 파도가 밀려든다. 거센 파도에 놀라 도망하는 두 여인은 개미처럼 작게 묘사되었다. 하얗게 부서진 바닷물에는 하늘과 초록, 노랑과 검정의 붓질이 유동한다. 강렬한 주황색의 모래는 묘한 불안감을 더한다. 무엇보다 높은 곳에서 바라본 바다는 현기증을 일으키며 보는 이를 움츠러들게 한다. 수평선이 있는 인상주의의 평온한 바다 풍경화와는 큰 차이가 있다. 화가는 높은 곳에서 바라본 파도 풍경에 떨리는 경험과 불안의 감정을 녹여낸 것이다.
고갱의 <파도 속에서>를 포함한 새로운 작품들은 1889년 개최된 파리만국박람회 때 카페 볼피니에서 열린 <인상주의와 종합주의> 전시에 소개된다. 고갱은 상징주의 미술의 리더로 자리매김했고, 젊은 추종자들을 낳았다. 만국박람회를 기념해 에펠탑이 세워지고 기계관과 민속관 등의 전시가 6개월간 계속되었는데, 고갱은 특히 아시아와 남태평양의 이국적인 민속과 풍물에 흠뻑 빠져들었다. 거주하던 퐁타방으로 돌아갔지만 번잡하게 느껴져 그 해 10월 고갱은 더욱 한적한 바닷가 르 풀뒤로 이주했다. 바로 위의 <파도>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이 시기에 편지로 소통하던 고흐가 자살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더욱 강렬한 원시 세계를 갈망하던 고갱은 결국 열대의 작업장을 마련하기 위해 작품을 처분하고 여행 자금을 마련했다.
떠나기 전에 고갱이 제작한 목각 부조 <신비에 빠지리라>는 고갱이 보다 단순한 삶을 찾아 열대를 향해 출발할 수 있기를 바라며 (소개하지 못하지만) <사랑하라 그러면 행복해지리라>와 함께 제작된 것이다. 바로 전해에 그린 <파도 속에서>의 여인이 중심에 등장한다. 하지만 부조의 여인은 남태평양의 원주민처럼 어두운 피부에 선이 굵은 얼굴을 가졌다. 그녀의 표정은 신비에 빠진 듯 모호하다. 주변에는 열대의 꽃과 풀들, 바다의 해초 같은 것들이 부유한다. 왼쪽에는 파란 머리의 노파가 마치 손으로 밀어 여인을 나아가게 하는 것 같다. 바닷속의 여인은 달님처럼 하늘에 떠 있는 여인의 얼굴을 바라본다. 낙원과도 같은 자연 속에서, 자연의 인도와 영감으로 “신비에 빠지리라”라는 고갱의 다짐이 엿보인다. 남쪽 바다에서 지내는 동안 그가 성취하고자 했던 원시적이고 독창적인 미술에 대한 그의 갈망을 담아낸 것이다. 흥미롭게도 신비와 영감의 근원은 모두 여성으로 표현되었다.
"나는 보기 위해 눈을 감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파도 속에서>는 단순히 바다에서 파도를 만끽하는 알몸의 여인을 묘사한 것이 아니다. 19세기 산업화가 본격화되면서 사회에 만연한 탐욕과 부패, 빈곤으로 썩어가는 서양을 뒤로하고 소박한 원시와 야생의 세계로 향하는 고갱의 갈망을 은유한 것이다. 여인은 문명 세계인 우리 쪽을 등지고 바다를 흠뻑 마주한다. 바닷물은 어느 순간 빼곡한 풀과 숲으로도 보이는데, 파도치는 바다는 강렬한 원시의 자연을 상징한다. 고갱이 종종 포인트로 사용한 주황색은 그에게 화가의 영혼을 달구는 용광로 불꽃의 색이자 어머니 지구의 뜨거운 피인 용암의 색이기도 했다. 고갱에게 이르러 색채는 더욱 풍부한 의미와 힘을 갖는 언어가 되었고, 이후 나비파와 야수파, 추상미술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이런 다짐대로 마침내 1891년 2월 고갱은 머나먼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으로 떠났다. 그가 도착한 곳은 물론 태초의 에덴동산은 아니었다. 문명의 때로 물들어가는 그곳에서 제국주의 시대 서양 남성의 눈으로 그린 고갱의 그림들도 아래 고갱이 말한 데로 순수한 시선으로만 바라보기는 어렵다.
"나는 평화롭게 살기 위해, 문명의 껍질을 벗겨내기 위해 떠나려는 것입니다. 나는 그저 소박한, 아주 소박한 예술을 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염되지 않는 자연에서 나룰 새롭게 바꾸고 오직 야성적인 것만을 보고 원주민들이 사는 대로 살면서, 마음에 떠오른 것을 마치 어린아이처럼 전달하겠다는 관심사 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원시적인 표현수단으로밖에는 전달되지 못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올바르고 참된 수단입니다." - 1891년 <에콜 드 파리>지와의 회견에서 고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