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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연희 Oct 10. 2023

조르주 쇠라의 콩테 드로잉

: 너희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아주 가끔 떠오르는 어린 시절은 흐르는 영상이 아닌 몇 개의 장면이다. 해 질 녘 엄마가 소리쳐 부를 때까지 뛰놀던 아이였지만, 그 장면들에서 나는 혼자고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한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아마도 할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시작된 의문이었던 것 같다. 갓난아기의 나를 봐주셨던 할아버지는 미국으로 이민 가셨다가 고운 얼굴에 턱시도 차림으로 관에 누워 돌아오셨다. 육체의 탄생과 죽음이 존재의 끝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습지만 어린 나는 궁금했고, 끝없는 우주의 사진을 바라보는 것을 즐겼다.


살면서 어떤 대답도 그 의문을 속 시원히 풀어주지 못했다. 그런데 며칠 전에 성경을 들춰보다가 우연히 본 한 문구가 머리에 종을 울렸다.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창 3, 19) 아는 문장이었지만 어느 때보다 과학적이고 명징하게 다가왔다. 곱씹어 볼수록 존재를 하찮고 집착을 무의미하게도, 생을 위대하고 소중하게도 바라보게 하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청년시절 매년 보았던 영화 <비포 선라이즈>(1995)에서 한 집시가 비슷한 말을 했던 것이 기억났다. 자연스럽게 영화에 살짝 나오는 조르주 쇠라의 드로잉도 떠올랐다. 먼지 같은 우리네 존재를 이처럼 완벽하게 표현한 이미지가 있을까 감탄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물/캐릭터의 변화와 삶을 고스란히 담아내곤 했던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감각에 다시 한번 놀랐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한 장면 / 조르주 쇠라, <철길>, 1881-2년, 종이에 콩테 크레용


국적도 목적지도 달랐던 셀린과 제시는 우연히 기차 안에서 만나 대화를 이어가다 비엔나에서 함께 내려 하루라는 시간을 함께 보낸다. 전차에서의 진실게임, 레코드 가게의 비좁은 청각실에서 추억의 음악을 듣고, 셀린이 가본 적이 있는 묘지에 들렀다가 놀이공원 회전 관람차 안에서 첫 키스를 하기까지... 삶과 죽음, 종교와 신, 꿈과 사랑에 대한 대화를 이어가며 두 사람의 거리는 점차 좁혀진다.


저녁에 노천카페에서 점을 봐준 집시는 헤어질 때 이런 인사말을 남겼다. “잊지 말아요. 수억 년 전 별이 폭발해 세상의 모든 걸 만들었어요. 당신도 만물처럼 우주의 먼지(stardust)로 이루어진 걸 잊지 말아요.” 한밤중에 비엔나의 거리를 걷다가 이들이 우연히 발견한 것은 조르주 쇠라의 드로잉 전시회 포스터였다. 셀린은 언젠가 미술관에서 포스터에 있는 <철길>을 45분이나 바라보았던 경험을 회상하며 속삭인다. “사람들이 배경에 녹아들어 가는 방식이 좋아. 이것 봐, 환경이 사람들보다 더 강해 보여. 쇠라가 그린 인간의 형체는 언제나 그렇게 덧없어(transitory)...” 아무도 없는 고요한 밤거리와 몽환적인 쇠라의 드로잉이 겹쳐진 이 장면은 영화를 볼 때마다 더욱 강한 인상을 남겼다.  


조르주 쇠라, <자수 혹은 화가의 어머니>, 1882-3년, 종이에 콩테 크레용, 31.2 x 24.1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 1859-1891)는 (저 아래) 유명한 대작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의 화가로 잘 알려져 있다. 가난 속에서 분투하던 화가들과 다르게 그는 파리의 부유한 중산층 출신이었고, 아마추어 화가 삼촌의 영향과 부모의 후원 속에서 화가가 되었다. 쇠라는 독특하게 지적이고 과학적인 관점에서 그림을 연구하고 작업했다. ‘나는 말이 거의 없다’라는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내성적인 성격에 늘 단정한 차림으로 규칙적인 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1878년 국립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한 쇠라는 고전 조각이나 모델을 정확히 모사하는 아카데미 교육에 곧 흥미를 잃고, 박물관과 도서관을 돌아다녔다. 옛 대가들의 작품을 직접 보고 분석했고, 특히 고대 이집트와 앗시리아, 그리스관을 자주 들락거렸다. 그는 특히 당시 활발하게 연구된 조형 이론, 광학과 색채학 이론서를 탐독했다. 다음 해 일 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파리의 노동자 구역에 작업실을 마련해 자신만의 양식을 구축해 나갔다.


조르주 쇠라, <아만 장의 초상>, 1883년, 종이에 콩테 크레용, 62.2 x 47.5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쇠라는 미술의 기본은 드로잉이라는 신고전주의 대가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1780~1867)의 영향을 받아 드로잉 작업에 몰두했다. 더 이상 화실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 인상주의 화가들처럼 현대의 풍경과 사람들을 그렸다. 도시의 여러 유형적인 인물들과 외곽의 농부와 노동자까지, 쇠라는 초기에 연필이나 펜으로 빠른 선을 사용해 스케치했다. 곧 그의 드로잉에 변화가 나타난다. 위의 <철길>처럼 도시나 외곽의 텅 빈 공간이나 고독한 인물을 차분하고 입체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1883년 프랑스 살롱에 전시되기도 했던 어머니와 절친의 초상화를 살펴보자. 어머니는 바느질에, 작업실을 함께 썼던 화가 아만 장은 붓질에 완전히 몰두해 있다. 마치 한 땀 한 땀의 수를 놓고, 한 획 한 획의 붓질을 덧대는 지속된 ‘시간’을 담아낸 듯 보인다. 어둠이 깔린 실내에는 고요와 평온만이 가득하다. 그런데 쇠라의 드로잉은 선으로 형상을 묘사한 보통의 드로잉과 무척 다르다. 오히려 흑백 회화나 뿌연 초기 영화에 가깝다. 쇠라는 렘브란트와 고야, 특히 밀레의 판화를 연구하며, 명암으로 양감을 구축하고 미묘한 빛을 포착하는데 능숙해졌다. 특히 친구 아만 장의 초상화에서 가장 어두운 형상의 가장자리에 밝은 빛을 배치해 명암의 극적인 대비를 시도했다. 인물 주변에 생성된 부드러운 후광은 신비롭고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이런 독특한 드로잉은 변화된 매체가 큰 몫을 했다. 쇠라는 회화 같은 표현을 위해 콩테 크레용(Conté crayon)과 프랑스제 핸드메이드 미샬렛 종이(Michallet paper)를 선택했다. 울퉁불퉁한 이 종이에 무르면서 농도가 진한 콩테 크레용은 다양한 톤을 구사할 수 있었다. 미세한 음각으로 인해 반짝임이 표현되었고, 선이 흐려지고 명암으로 양감이 구축되며 형상이 단순화되었다. 쇠라는 주로 어두운 배경을 선택했는데, 이는 세부가 사라지는 해 질 녘에 그리기를 제안한 당대의 화가 토마 쿠튀르(Thomas Couture)의 영향이기도 하다. 쇠라는 실내 가스등의 미묘한 빛은 물론 황혼과 한밤의 빛 아래서 살며시 드러낸 추상화된 형상을 표현했다. 흩어질듯하면서도 영원히 정지된 듯한 장면은 보는 이를 따듯하고 평온하게 감싸 안는다.   


조르주 쇠라, <길 위에서>, 1881-2년, 종이에 콩테 크레용, 23.6 x 31.2cm, 오르세 미술관 / <달빛 아래 공장들>, 1882-3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쇠라는 색채에 대한 연구에도 몰입했다. 아래와 같은 조형 이론과 색채학 이론서에서* 그는 선과 색채가 여러 정서와 상징을 표현한다는 것, 색채는 주변색에 따라 다르게 보이고 보색 대비를 통해 색이 더 뚜렷하게 보이는 것, 물감을 섞으면 색이 탁해지지만 광선의 혼합은 명도를 높인다는 것 등에 주목했다. 1881년에는 최고의 색채화가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의 작품을 분석하고 긴 글을 남기기도 했다.


* 프랑스 화학자 외젠 슈브뢸(Michel Eugène Chevreul)의『색채 대비의 법칙』(1839)은 보색과 반사작용에 대해, 프랑스 미학자 샤를 블랑(Charles Blanc)의『조형 예술의 문법』(1867)는 삼원색과 이를 기초로 한 색상환, 보색 등의 개념을 논했다. 빛의 혼합과 물감의 혼합을 다룬 미국인 물리학자 오그던 루드(Ogden Rood)의『현대 색채론』(1879)과 음악과 같은 미술의 조화를 논한 프랑스 미학자 다비드 주터(David Sutter)의 『비전의 현상』(1880) 등도 쇠라에게 영향을 끼쳤다.


“몇몇 사람들은 내 그림에서 시를 보지만, 나는 과학만이 보인다.”  - 조르주 쇠라



조르주 쇠라, <아스니에르에서 물놀이하는 사람들>, 1884년, 201 x 300cm/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1886년, 207 x 308cm, 시카고 미술관


쇠라는 체계적으로 색을 분해하고 병치하는 실험을 하면서 최초의 대작 <아스니에르에서의 물놀이>(1884)를 완성했다. 1884년 살롱전에 낙선된 이 작품은 독립 전(앙데팡당전)에 전시되어 폴 시냑(Paul Signac, 1863~1935)이 쇠라의 뒤를 따르게 되었고, 비평가 펠릭스 페네옹은 과학적인 인상주의라 치켜세우며 신인상주의(Neo-Impressionism)라 명명했다. 쇠라는 본능적이고 직감적으로 빛을 포착하는 인상주의를 이론과 과학에 기반해 재정립하고자 했다. 즉 색을 섞지 않고 원색의 점들을 병렬 배치함으로써 이차적인 색과 형상이 보는 이의 망막을 통해 완성되도록 한 것이다. 쇠라는 이 기법을 색채 광선주의(Chromo-luminarism)라 칭했지만, 보통은 점묘법(Pointillism) 혹은 분할주의(Divisionism)로 불린다. 이어 그린 대작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1886)는 점묘를 캔버스 전면에 사용한 최초의 작품으로 신인상주의의 선언서와도 같았다. 흥미롭게도 이 작품은 1886년 마지막 인상주의 전시회의 주인공이 되었다.


“나가서 다시 빛에 취해보자, 그것에는 위안을 주는 힘이 있다.”  - 조르주 쇠라


쇠라의 두 대표작은 파리 북서부 외곽에 위치한 강변에서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포착한 것이다. 둘 다 2, 3m에 달하는 큰 캔버스에 순수한 색점/붓질로 완성된 풍경은 눈부시면서도 신비롭다. 아스니에르 장면은 여름날 강변에서 물놀이하는 노동자들을 보여주는데, 멀리 보이는 공장 지대는 이들의 신분과 노동으로부터의 휴식임을 암시한다. 이후 쇠라는 아스니에르 맞은편에 위치한 그랑자트 섬의 풍경을 완성했다. 일요일 오후, 우아한 차림의 시민들이 섬에서 센강의 풍경과 햇살을 만끽한다. 자세히 보면 중앙에 하얀 원피스 차림의 아이를 중심으로 여러 계층과 직업의 남녀노소가 치밀하게 배치되었다. 단순화된 인물들은 표정을 알아보기 어렵고 그들 간에 어떤 교류도 느껴지지 않는다. 두 작품은 마치 그림 속 인물들처럼 보는 이의 움직임을 고정시키는 묘한 마력이 있다.



조르주 쇠라, <아스니에르에서 물놀이하는 사람들>을 위한 드로잉, 1883-4년, 종이에 콩테 크레용


화려한 두 작품, 무수한 색점으로 이미지가 구축되는 신인상주의를 말할 때 모든 관심이 색채에 집중되지만, 쇠라 나름의 고전주의적인 형식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위의 두 대작을 준비하면서 쇠라는 현장의 햇살 아래서 간략한 유화 스케치로 색채를 기록하고 작업실에 돌아와 모델을 두고 정교한 드로잉을 한 후, 이를 조합하여 작품을 완성했다. 쇠라는 작업실과 현장을 오가며 아스니에르는 20여 점, 그랑자트 섬은 60여 점의 유화 스케치와 드로잉을 남겼다. 퍼즐 조각과도 같은 이 습작들이 모여 2년여 년 만에 두 대작으로 탄생된 것이다.

 


조르주 쇠라,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를 위한 드로잉들, 1884-6년, 종이에 콩테 크레용


위의 드로잉들을 보면, 찰나의 인상이 아닌 세심하게 명암으로 구축된 형상임을 알 수 있다. 선으로 명확하게 묘사된 고전 회화와 다르게, 인물의 세부와 개별성은 사라지고 단순화되었다. 큰 움직임이나 인간적인 감정 표현도 찾아볼 수 없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고요하고 차분한 소년들, 무심하게 관조하는 우아한 차림의 신사 숙녀들, 강아지와 애완동물까지도 19세기말 그 시간 속에 얼어붙은 듯 보이고, 흐름을 멈춘 강물과 보트도 그 지점에 영원히 머물러 있을 것만 같다.


쇠라의 작품 전반에 나타나는 측면상(profile)과 기하학적인 경직성은 영원불멸을 추구했던 이집트 미술에 대한 그의 관심을 드러낸다. 또한 고전 회화에서 사용되는 삼각형 구도나 황금분할의 구성은 이미지에 조화와 안정감을 더해준다. 쇠라의 야심도 “현대의 인물들이 파르테논 신전의 프리즈 조각처럼 가장 본질적인 개성 속에서 움직이게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즉 과거의 위대한 고전과 견줄만한 양식으로 도시의 근대인을 장엄하게 기록한 것이다.   



조르주 쇠라, <에덴 콩세르>, 1886-67년, 종이에 콩테, 23 x 30cm, 반고흐 미술관/ <유러피언 콩세르>, 1886-88년, 31.1 x 23.8cm, MoMA


이어 쇠라는 도시의 유흥과 밤문화로 시선을 옮겼다. 작업 후 저녁에 쇠라는 친구 아만 장과 카페와 공연장, 카바레와 서커스장 등에서 바라본 세상을 기록했다. 외로운 도시의 사람들이 반짝이는 빛과 재미, 익명의 타인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에덴 콩세르>는 가난한 시민들이 하루의 피로를 달랬던 술집의 콘서트를 보여준다. 빛을 받은 가수는 목청껏 노래하고 하단에는 검은 윤곽의 뮤지션이 음악을 연주한다. 고요한 쇠라의 작품에선 도통 소리를 들을 수 없지만 반짝이는 가스등은 리드미컬하게 묘사되었다. 보다 격식 있는 공연장을 담아낸 <유러피안 콩세르>는 무대 위의 가수보다 관객이 주인공이다. 객석에 커플과 높이 솟은 머리를 한 여인들은 살짝 건드리면 흩어져버릴 듯한 형상이다.



조르주 쇠라, <콩코드 광장, 겨울>, 1882-3년, 종이에 콩테 크레용, 23.2 x 30.8cm, 구겐하임 미술관/ <하얀 돛>, 1890년, 25 x 33cm


안타깝게도 쇠라는 1891년 디프테리아로 31살에 때 이른 죽음을 맞기까지 대작 6점, 작은 크기의 유화 60여 점만을 남겼다. 물론 시간을 요하는 작업방식 때문일 것이다. 반면 10여 년 동안 그는 500여 점의 드로잉을 그렸다. 쇠라의 드로잉은 대형 유화를 위한 밑그림이기도 했지만 그 자체로 완결성을 지닌 작품이다. 외젠 아제(Eugène Atget, 1857~1927)가 산업화와 도시화로 사라져 가는 파리의 옛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했듯이, 쇠라의 독특한 시선과 표현을 통해 19세기말 파리의 사람들과 풍경은 화석처럼 남게 되었다. 도시의 텅 빈 광장과 거리, 말과 마차, 센강의 바지선뿐만 아니라 외곽의 한적한 농촌 마을과 공장 지대를 볼 수 있다. 쇠라가 도시의 거리에서 본 유모와 노점상, 세탁부와 구두닦이, 음악가와 서커스 단원은 물론 외곽의 일하는 농부와 노동자들도 만날 수 있다. 흔히 파리의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전에 없던 풍요와 평온의 시기를 벨 에포크라 부르지만, 쇠라가 바라본 세상은 마냥 밝고 견고하지만은 않았다. 쇠라가 담아낸 근대인들은 개성도 감정도 사라져 있고, 고독 속에서 침잠하거나 군중들 가운데서도 소외되어 있다.



조르주 쇠라, <피에로와 콜럼바인>, 1886-88년경, 종이에 콩테 크레용, 24.8 x 31.2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쇠라를 추종했던 화가 폴 시냑은 그의 콩테 드로잉을 “실존하는 화가의 가장 아름다운 드로잉”이라 평가했다. 언젠가 나만의 방이 생긴다면 걸어놓고 싶은 그림이기도 하다. 세월이 흐를수록 인간은 한 치 앞도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동시에 다양한 창조를 통해 불멸을 꿈꾸고 영원을 갈망하는 존재다. 쇠라의 드로잉은 그런 진실을 담아낸 빛나는 증언이다. 또한 존재의 생성과 현재, 그리고 결국 사라져 버릴 이후까지도 품고 있다. 그래서 더욱더 <피에로와 콜럼바인>의 광대들처럼 덩실거리며 살고 싶다. 비록 피에로의 슬픈 얼굴이 찾아올지라도.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창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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