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망으로 빛나는 한 여름밤의 풍경
결국 펜을 든 것, 아니 컴퓨터 앞에 앉게 된 것은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기 위한 것이었다. 과거의 나에게, 붙잡고 싶은 추억에게, 자꾸 질문하고 의지하게 만드는 신에게, 급하게 떠나신 아버지에게, 나와는 너무 다른 어머니에게, 한때 사랑했던 사람에게, 나를 밝게 만들어준 친구들과 남편에게, 그리고 누구보다 두 딸에게. 글을 쓰는 것은 그리운 사람들에게 가닿기 위한 나의 몸짓이었고, 나만의 목소리와 리듬으로 나의 노래를 부르겠다는 다짐이었으며, 본능적으로 자식을 낳듯 나의 유산을 남기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그래서 한 번도 열어본 적이 없는 보물 상자를 연다. 그 안에는 20년 전부터 책과 인터넷, 미술관에서 우연히 만난 뜻밖의 걸작들이 들어있다. 궁금하다. 왜 그때 나의 눈을 반짝거리게, 가슴 설레게 하고 질문하게 했는지. 계절의 변화와 일상 속에서 떠오른 한 점의 그림을 깊이 만난다. 먼지 쌓인 상자에서 보물을 꺼내 닦고 입체적으로 살펴보면서, 그림 안팎의 이야기와 나의 느낌을 정리하는 여정의 기록인 셈이다. 신기하게도 그 그림들은 오늘의 나를 존재케 한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빛나는 말들을 들려주었다.
처음으로 나온 그림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별이 빛나는 밤>이다. 나는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불안했던 질풍노도의 청년 시절, 나도 누구나처럼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의 <별이 빛나는 밤>을 사랑했다. 평온한 시골 풍경 속에서 하늘로 솟구쳐 오른 사이프러스 나무와 내 마음처럼 휘몰아치는 밤하늘에서 묵묵히 빛나는 별빛과 달빛이 왠지 모르게 큰 위로와 희망을 주곤 했다. 20여 년이 흘러 뭉크를 자세히 살펴보다가 만난 동명의 작품은 또 다른 매력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같은 해에 고통의 아이콘인 <절규>를 그렸던 뭉크가 이렇게나 고요하고 신비로운 한 밤의 풍경을 남겼다니!
초록-파랑-보랏빛으로 물든 밤하늘과 바다를 바라보자. 가장 사랑하는 색들이 녹아 있는 미묘한 색채의 스펙트럼은 나를 저 무한한 우주와 깊은 바닷속 심연으로 이끈다. 빛나는 작은 별들은 밤하늘에 투명한 빛을 선사하고, 간혹 바다와 언덕에 빛줄기를 남긴다. 맑은 색채가 주는 느낌이 아무래도 여름밤 같다. 이곳은 뭉크가 1880년대부터 여름을 보냈던 노르웨이 오슬로 남쪽의 오스고쉬트란드(Åsgårdstrand)의 해변이라고 한다. 상단의 파란 풍경과 대조적으로 검붉은 색이 더해진 하단의 뭉글뭉글한 땅은 어둠이 지배한 공간이다. 그런데 사선으로 하얀 울타리가 처져 있고 그 안에 흐릿한 삼각형의 그림자가 눈에 띈다. 뭉크의 그림을 많이 본 사람이라면 이 형상이 포옹하는 연인임을 직감할 것이다.
뭉크는 몇 번의 비극적인 연애를 하면서 불안과 고통의 관계인 연인의 포옹, 키스를 자주 그렸다. <별이 빛나는 밤>을 그렸을 때 서른 살 청년이었던 뭉크는 20대 초반에 만난 유부녀 밀리 탈로와의 불같은 첫사랑의 여파와 함께 베를린에서 만난 자유분방한 다그니 율에게 빠져 있었다. 순정적이었던 뭉크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과 욕망으로 정신적 고통을 겪었고, 좀 부끄러울 수도 있는 연인 사이의 질투나 이별의 고통도 그림으로 표현하곤 했다.
이 시기에 그린 <창가에서의 키스>는 늦은 밤 집안에서 열정적인 키스를 하는 연인을 보여준다. 유부녀와 밀회를 나누었던 뭉크의 기억이 반영되었는지 격정적이면서도 불안한 분위기다. <사랑과 고통>에서 이제 여성은 남자의 피를 빨아먹는 뱀파이어로 등장한다.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은 남성을 옥죄고 벽에 그림자는 악령처럼 커플을 감싼다. 이 시기의 작품 <칼 요한 거리의 저녁>(1892), <병실에서의 죽음>과 <절규>(1893) 등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어둡고 불안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다시 뭉크의 <별이 빛나는 밤>으로 돌아가 보니 신비로운 한 여름밤의 꿈같은 풍경만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대지의 붉은 색감과 날이 선 붓질, 울타리에 어른거리는 남녀의 그림자 때문인지 사랑으로 인한 화가의 고통과 갈망, 쓸쓸한 외로움이 동시에 느껴진다. 뭉크는 별이 빛나는 한밤의 해변 풍경이 불러일으켰던 그때의 감정을 포착했던 것이다.
"나는 보는 것이 아니라 본 것을 그린다" - 에드바르 뭉크
뭉크와 고흐가 같은 제목의 그림을 그린 것은 우연일까? 연도로 보아 뭉크가 고흐의 작품에 영향을 받은 것일까? 뭉크와 고흐는 젊은 시절 유사한 경험과 환경 속에서 작업했고, 둘 다 자신의 감정을 강렬한 색채와 붓질로 담아낸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여겨진다. 뭉크 보다 10년 먼저 네덜란드의 준데르트에서 태어난 고흐는 사산된 형의 이름으로 살면서 목사 아버지와 종종 부딪혔다. 노르웨이 뢰텐 출신의 뭉크는 유년 시절 엄마와 누이가 폐결핵으로 사망했고, 이로 인해 신앙에 집착한 아버지가 엄격한 생활을 강요해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선천적으로 둘 다 정신적으로 쇠약했고, 1880년대에 화가로서의 작업을 시작했다. 물론 고흐는 화상, 돌봄 교사, 전도사 등을 전전하다 어렵게 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에 비하면 수월하게 아카데미 교육을 받은 뭉크 또한 계속되는 가족의 질병과 죽음,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통을 받았다. 둘 다 비슷한 시기(1885,6년)에 영감을 찾아 파리로 이주했고 인상주의자들이 몰두했던 빛의 효과와 밝은 색채에 영향을 받았다.
예민하고 격정적인 성격으로 파리의 미술계에서도 아웃사이더였던 고흐는 결국 1888년에 2월에 프랑스 남부의 아를로 내려갔다. 화가들의 공동체를 꿈꾸며 설렘으로 고갱을 기다리던 시기에 해바라기 연작(8월)과 <밤의 카페>(9월), <아를의 침실>(10월) 등 생애 가장 찬란한 그림들을 남겼다.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이 시기에 고흐가 그린 <별이 빛나는 론강의 밤>(1888년 9월)은 아를의 노란 집 근처에서 있는 론강둑의 밤풍경을 묘사한 것이다. 깊은 밤하늘에 폭죽처럼 빛나는 작은 별들과 수평의 강둑에 설치된 가스등 불빛이 강물 위에서 어른거린다. 전경에 팔짱을 끼고 산책하는 소박한 연인은 이 장면에 낭만과 온기를 더한다. 이때쯤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고흐가 '밤 풍경이나 밤이 주는 느낌, 혹은 밤 그 자체를 그 자리에서 그리는 일'에 매료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몇 달 후에 그린 유명한 <별이 빛나는 밤>(1889년 6월)은 이전의 평화롭고 낭만적인 밤풍경과 완전히 다른 느낌을 전달한다. 이 작품은 아를에서 고갱과 함께 작업하다 불화로 고갱이 떠나려 하자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른 사건(12월) 이후, 신경증이 악화되어 생 레미에 있는 정신요양원에서 그린 것이다. 평화로운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좌측에 사이프러스 나무는 불길처럼 하늘로 치솟아 오른다. 이와 함께 밤하늘에 소용돌이치는 대기/구름 때문에 보는 이의 마음도 하릴없이 동요된다. 그 와중에도 꿋꿋이 빛을 발하고 있는 그믐달과 별들은 동요하는 마음을 감싸 안으며 꿈꾸게 한다. 고흐에게 별은 죽음으로써 갈 수 있는 영생의 세계이자 동시에 희망을 의미했다. 사이프러스 나무는 지중해 지역 묘지에서 흔히 볼 수 있고, 전통적으로 슬픔과 불멸을 상징한다. 전면에 치솟은 이 나무는 그와 별을 이어주는 사다리처럼 보인다.
사실 고흐가 머물렀던 요양원 2층 방 창문에서 바라본 풍경은 이와 같지 않다고 한다. 한 때 머물며 농부와 빈민들을 그렸던 기억 속의 누에넨 집들과 교회가 삽입되었고,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처럼 놀라운 균형미’와 품위로 고흐를 사로잡은 사이프러스 나무는 크게 확대되었다. 무엇보다 밤하늘에는 걷잡을 수 없는 그의 심경이 담긴 모든 붓질의 흔적이 남아있다. 정신요양원에서 잠 못 드는 밤 고흐는 쇠창살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에 그의 사무치는 감정과 열망, 기억과 그리움을 담아냈다. 갇힌 곳에서 벗어나 살아있는 풍경과 사람들을 그리고 싶었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처럼 아직 불이 켜져 있는 집안의 온기를 느끼며 어울려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의 마음은 거침없이 솟아오른 사이프러스 나무와 휘몰아치는 밤하늘처럼 주체할 수가 없었다. 고흐는 생레미의 정신요양원에서 종종 무서운 발작을 일으키며 물감을 삼키기도 했다. 그래서 외출도 못하고 종종 작업도 금지 당해 불안한 가운데 그곳에서 거의 1년을 머무른다. 이 시기에 그린 자화상과 사이프러스 그림들에서 진동하는 고흐만의 붓질은 더욱 강렬한 생명력을 갖게 된다.
“희망은 별에 있어. 나는 그것을 진실로 믿는단다. 하지만 지구도 행성 아니겠니. 지구 역시 별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 1888년 7월 15일에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
동생 테오는 고흐가 정신요양원에서 그린 그림들을 받아 보고는 강렬한 색채의 힘과 생명체 안에 내재하는 생명의 진동을 느낄 수 있다고 고흐를 격려했다. 요양원에서의 삶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고흐는 1890년 5월, 그곳에서 나와 파리 근교 오베르쉬르아즈에 정착해 작업한다. 그리고 모두가 알고 있듯이 몇 달 만에 권총자살로 37년의 생을 마감한다. 고흐의 그림이 미술계에서 조금씩 인정을 받으며 알려지기 시작했던 때라 되돌릴 수 없는 죽음이 더욱 안타깝다.
이후 국가장학금으로 파리에 온 뭉크는 테오의 갤러리에서 고흐의 작품들을 접한 것으로 보인다. 뭉크는 사이프러스 나무뿐만 아니라 고흐의 마지막을 상상해 그리기도 했다. 눈이 지워진 알몸의 쓰러지는 남자의 가슴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린다. 뒤쪽에 해바라기는 (한 눈으로) 그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같은 해 그린 뭉크의 <지옥에서의 자화상>은 그의 상황이 고흐 못지않게 고통 속에 있다고 말한다. 지옥불 앞에서 알몸으로 서 있는 뭉크의 얼굴은 불에 타녹아내린듯하고 목을 가로지르는 상처까지 있지만, 그는 당당하게 서서 관객을 직시하며 견뎌낸다. 뭉크는 자신도 그렇지만 고흐처럼 자연/현장에서 바로 작업하면서 강렬한 감정을 담아내는 것이 신경계에 엄청난 부담을 준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그리고 고흐처럼 생이 끝날 때까지 불길이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붓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기를 소망했다. 그리고 뭉크는 60대에 다시 몇 점의 <별이 빛나는 밤>을 그렸다.
2015년 반고흐 미술관에서 열린 <뭉크 : 반 고흐> 전시 소개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vMAbWnZGtBg
고흐가 존경하고 흠모했던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 1814~1875)도 <별이 빛나는 밤>을 그렸던 것은 우연일까. 물론 고흐가 이 작품을 직접 보았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밀레의 작품을 여럿 모사했기 때문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청년 시절을 파리에서 작업했던 밀레는 가난 속에서 첫 번째 아내와 사별했고, 콜레라와 1848년 혁명으로 불안정했던 도시를 떠나 퐁텐블로숲가의 바르비종으로 이주(1849)했다. 1830년대부터 화가들이 이곳에 모여 풍경화를 그리며 바르비종파를 이루었는데, 밀레는 이들과 다르게 풍경보다는 인물에 집중했다. 그는 이곳에서 농민의 삶을 담아낸 대표작 <씨 뿌리는 사람>(1850), <이삭 줍는 사람들>(1857), <만종>(1859) 등을 남긴다. 노르망디의 지역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밀레는 농민의 삶에 공감하며 노동의 고됨과 아름다움을 큰 캔버스에 영웅적으로 묘사했다.
밀레의 <별이 빛나는 밤>은 그가 바르비종에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렸다가 15년 후에 리터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밀레의 보기 드문 풍경화로 화면은 하늘과 땅으로 이분되었다. 어두운 땅에는 농부의 발걸음이 지나간 흙길과 저 멀리 지평선에 수레가 보인다. 칠흑 같은 하늘에는 다채롭게 빛을 발하는 별들이 반짝인다. 스프레이를 뿌린 듯 몽롱한 밤하늘에 떨어지는 유성 때문인지, 갑자기 대학교 엠티에서 본 고요하고 낭만적인 시골 밤하늘이 떠오른다. 밀레는 바르비종에서 별을 보는 것을 매우 즐겼고, 실제로 관찰해서 그렸기 때문에 그림에서 별자리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지평선 근처의 노란빛은 이때가 해가 떠오르기 직전임을 알려준다. 이 그림을 보면 도시의 위험과 혼란을 피해 온 자연에서 밀레가 얼마나 평온과 안식을 느꼈는지 감지할 수 있다. 이제 좀 안정된 나에게도 밀레의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밤하늘이 가장 편안하고 아름답게 다가온다. 그가 형제에게 보낸 편지에 쓴 글을 나도 되뇐다.
“얼마나 밤이 아름다운지 네가 안다면, 밤의 고요와 장관은 너무 놀라워서 실제로 압도되곤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