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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연희 May 14. 2024

테오도르 루소의 나무

: 생동하는 숲의 위대한 주인공

 

풍경화는 19세기 프랑스에서 바르비종파, 인상파로 이어지며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전성기를 맞았다. 그 시작을 알렸던 루소는 밀레에 비해 덜 알려져 있지만 최근 대형 전시를 통해 재평가되고 있다. 자연을 동경한 이 도시인은 결국 숲으로 이주해 평생 야생의 자연을 연구하고 나무들의 초상을 남겼다. 그의 청원으로 파괴되어 가는 숲에 세계 최초의 자연보존구역이 지정되기도 했다. 다양한 생명이 공존하는 숲은 루소의 뮤즈이자 작업실이었고 안식처였다.  


테오도르 루소, <퐁텐블로 숲의 한 그루 나무>, 1840년대, 캔버스로 덧댄 종이에 유채, 40.4 x 54.2cm, 빅토리아 알버트 미술관, 런던


묵직한 한 그루의 나무가 작은 화면을 가득 채웠다. 잔뜩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구불구불 뻗어나간 가지와 풍성한 잎을 가진 나무는 강렬한 생명력을 분출한다. 우람하고 힘찬 모습의 오크 나무는 전통적으로 육체적, 도덕적 힘을 상징한다. 살롱전에 연이어 낙방한 30대 루소가 퐁텐블로 숲에서 그린 이 나무는 뚝심 있는 그의 모습을 닮았다. 주류를 따라가지 않고 변방에서 자연에 대한 열정을 키워나간 화가 주변으로 동료들이 모여들었고, 그의 넉넉한 그늘 아래서 인상주의도 탄생하게 된다.





테오도르 루소(Théodore Rousseau, 1812~1867)는 1812년 파리에서 태어나 풍경화가인 백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소년 시절 루소는 아버지의 고향인 프랑슈콩테에 일 년간 머무르며 근교 쥐라 산맥의 숲에 매료되었고, 파리로 돌아오며 풍경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당시 아카데미에서 풍경화는 역사화나 초상화에 비해 저급한 장르로 여겨졌다. 화가들은 17세기 프랑스의 대가 니콜라 푸생(1594~1665)이나 클로드 로랭(1600~1682)을 따라 신화나 성경의 이야기가 삽입된 이상적 풍경화를 재생산하고 있었다. 루소도 아카데미 화가들의 화실에서 그런 ‘역사적 풍경화’를 배웠지만, 있는 그대로의 자연에 주목한 작품에 이끌렸다. 루브르 미술관에서 17세기 네덜란드의 사실적인 풍경화를 연구했고, 때마침 살롱에 소개된 영국의 존 컨스터블(1776~1836)의 작품에 영감을 받았다. 루소는 신화나 성경의 배경이 아닌 살아 숨 쉬는 자연 그 자체를 그리겠다는 열망을 키워갔다.  



테오도르 루소, <퐁텐블로의 나무와 바위 연구>, 1829년, 캔버스에 유채, 53.5 x 70.3cm, 스트라스부르 미술관


아카데미 화가들이 고전 문화를 살피기 위해 이탈리아로 떠났다면, 청년 루소는 프랑스 전역을 여행하며 자연 풍경과 현상을 연구했다. 17살 루소가 퐁텐블로 숲에서 그린 나무와 이끼 낀 바위는 마치 현장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생생하다. 당시 화가들도 야외로 나가 자연을 연구했지만, 그것은 다른 작품의 부분으로 사용되는 스케치에 불과했다. 하지만 루소는 컨스터블이 그랬듯이 자연 자체를 주인공으로 삼아 스케치와 완성작의 차이를 최소화했다. 현장에서 시작한 그림(혹은 스케치)은 물론 작업실에서 정교하게 마무리되었다.    


루소는 자연의 세부를 연구하면서도 평화로운 농촌과 광대한 산맥, 숲과 골짜기 등의 드넓은 풍경을 그렸다. 특히 빛과 대기, 날씨의 변화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의 묘사를 발전시켰다. 다른 바르비종 화가들에 비해 특히 루소는 작품의 스펙트럼이 넓다. 원근의 시점은 물론 붓질과 채색 방식을 다채롭게 시도하며 풍경화의 언어를 확장했다.



테오도르 루소, <꼴 드 라 포실르에서 바라본 몽블랑, 폭풍 효과>, 1834년, 캔버스에 유채, 146.5 x 242cm, 글리톱테크 미술관, 코펜하겐


1834년의 대작은 쥐라 산맥에서 바라본 몽블랑의 풍경이다.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과 폭풍으로 인해 전경은 형체가 불분명하고, 멀리 몽블랑 산맥만이 빛을 받아 반짝인다. 어두운 색채와 자유분방한 붓질로 묘사된 광대한 풍경은 거의 추상화처럼 보일 정도다. 루소는 풍경의 한가운데 관자를 위치시켜 자연의 거대함과 거친 에너지를 경험케 한다.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생명력을 담아낸 이 대작은 말년까지 루소의 작업실에 남아 있었다.


이 그림은 폭풍우를 그렸던 영국의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1775~1851) 광활한 풍경을 담아낸 독일의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1774~1840)의 낭만주의 풍경화를 떠오르게 한다. 낭만주의는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치며 과학과 이성의 모순이 드러난 18세기 후반에 문학에서 시작되었다. 미술에서의 낭만주의는 아카데미가 추구하는 신고전주의와 다르게 개인의 경험과 감정, 표현방식을 강조했고, 특히 자연은 내면을 반영하는 거울로 표현되었다. 프랑스에서 낭만주의는 1820년대 극적인 주제와 구도, 자유분방한 색채와 붓질로 표현한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에 의해 분출된다. 루소는 실경을 충실하게 묘사하면서 낭만주의라는 당대의 흐름에 영향을 받았다.


테오도르 루소, <생클루의 오래된 공원>, 1831-2년, 캔버스에 유채, 66.6 x 82.5cm, 캐나다 국립 미술관, 오타와


루소는 투박하고 거친 자연 그대로를 담아내는 화풍을 정립해 나갔고, 1830년대 전반기에 그의 작품은 관전인 살롱에 전시되었다. 그런데 역사적 풍경화와는 다른 독특한 구성과 자유분방한 채색에 보수적인 아카데미 심사위원들은 점차 반기를 들었고, 1836년부터 매년 루소의 작품에 퇴짜를 놓았다. 결국 ‘낙선 대가’로 불렸던 루소는 1842년부터 살롱전에 작품을 출품하지 않는다. 그는 이곳저곳으로 떠나 자연을 연구하고 풍경화 작업을 이어갔다.




테오도르 루소, <밤나무 거리>, 1837-50년, 캔버스에 유채, 79 x 144cm, 루브르 미술관, 파리


방데 지방의 작은 성으로 향하는 길을 묘사한 <밤나무 거리>를 보자. 줄지어선 나무의 몸통과 물결치듯 뻗은 가지, 하늘을 뒤덮은 무성한 잎이 깊은 인상을 남긴다. 멀리 손톱만큼 작은 말 탄 사람 때문에 가로수길은 더 크고 풍성해 보인다. 시원한 그늘 아래서 하단에 스며든 햇살의 온기도 전해진다. 루소는 현장에서 장면을 그리고 종종 몇 년 혹은 (이 작품처럼) 몇십 년에 걸쳐 작업실에서 작품을 수정하며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녹여냈다. 자연의 활력과 풍부함을 찬양하는 이 작품은 살롱전에서 거부되었지만 이후 시에서 사들였다. 전시도 판매도 어려웠던 이때, 루소의 풍경화에서 진정성을 발견한 비평가와 컬렉터가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한다.


“정성을 다해 관찰한다면 느낄 수 있으며, 결국 숙명처럼 우리를 감싸고 있는 현실세계를 화폭에 담을 수 있을 것이다.”  - 테오도르 루소


테오도르 루소, <저녁 (교구 사제)>, 1842-3년, 캔버스에 유채, 42.2 x 64.5cm, 톨레도 미술관, 스페인


<저녁>은 색채의 대비가 돋보이는 가을 풍경화다. 전경엔 벌써 어둠이 내려앉았고, 청명한 하늘을 배경으로 중경에 붉게 물든 자작나무들이 햇살에 반짝인다. 열지어선 자작나무는 그 모양새와 색채가 다채롭다. 하얀 나무 몸통들 사이로 말을 타고 가는 사제의 뒷모습이 보인다. 계절과 하루의 황혼기, 자연은 마지막 빛을 발하는데 혼연의 힘을 다한다.


테오도르 루소, <릴라덩 숲의 거리>, 1846-9년, 캔버스에 유채, 101 x 81.8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루소가 릴라덩(L'Isle-Adam)에 머물며 그린 수직의 풍경화는 양쪽에 늘어선 나무들 때문에  ‘초록 거리’로도 불린다. 전경에 어두운 숲과 쨍한 빛이 깃든 원경이 대조를 이루며 꿈결처럼 아련한 인상으로 다가온다. 중경에는 쉬고 있는 양치기 소녀와 소들이 보인다. 루소가 묘사한 숲은 다양한 생명이 공존하는 터전이자 생동하는 힘과 조화로운 에너지로 가득한 공간이다. 거기에서 인간은 거대한 자연의 품에 안긴 미세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테오도르 루소, <퐁텐블로 숲의 가을>, 1846년, 캔버스에 유채, 65.4 x 54.9cm, 미네아폴리스 미술관

여러 지역을 방랑하던 루소는 1847년 파리에서 50km에 위치한 퐁텐블로 숲 어귀 바르비종에 정착한다. 중세말부터 왕족과 귀족들의 사냥터였던 퐁텐블로는 원시의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루소는 아침부터 황혼까지 숲 속을 거닐며 구석구석에서 영감을 받았다. <퐁텐블로 숲의 가을>은 ‘나무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화가의 모습을 담아낸 것처럼 보인다.


루소를 따라 동료 화가 카미유 코로(1796~1875), 쥘 뒤프레(1811~1889), 장 프랑수와 밀레(1814~1875) 등의 화가들과 사진가들이 모여들었다. ‘바르비종파’라 불린 백여 명이 넘는 예술가들의 물결은 당시 지속된 정치적 갈등, 산업화와 전염병으로 혼잡한 도시를 벗어나 자연의 품에 안기려는 열망도 반영한다. 화가들은 숲에서 변화무쌍한 자연의 생동감과 정취를 담아냈고, 각자의 관심과 개성에 따라 조금씩 다른 풍경화를 발전시켰다. 


“나는 나무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갑자기 그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과 다른 모양들, 빛에 반응하는 놀라운 방식에서 숲의 언어를 배웠다... 그들은 말할 수 없었지만, 나는 나무의 몸짓을 읽고 그들이 느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 테오도르 루소



테오도르 루소, <숲의 가장자리, 일몰>, 1845-6년, 캔버스에 유채, 41.2 x 62.8cm, LACMA, LA


루소는 <숲의 가장자리, 일몰>처럼 황폐해져 가는 숲의 모습도 종종 다루었다. 잘린 나무토막들이 나뒹구는 벌판에 홀로 선 나무가 일몰을 배경으로 애잔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1848년 2월 혁명으로 아카데미에 보수적인 분위기가 완화되자 루소는 13년 만에 살롱에 전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이 작품으로 그는 최고의 컬러리스트라는 찬사를 받으며 낭만주의 화가들과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테오도르 루소, <쇼쎄섬의 쓰러진 나무들 (영아 학살)>, 1847년, 캔버스에 유채, 95 x 146.5cm, 메스닥 컬렉션, 헤이그


자연 파괴의 현장을 목격한 루소의 비판은 한 층 더 강해진다. 미완성으로 남겨진 <쇼쎄섬의 쓰러진 나무들>에서 벌목꾼들은 나무를 자르거나 밧줄을 매달아 쓰러뜨리고 있다. 점으로 뭉뚱그린 인물과 대조적으로 나무는 옅은 갈색과 초록색조로 세밀하고 정성스럽게 묘사되었다. 루소와 밀레의 전기를 쓴 알프레드 상시에에 따르면, 루소는 종종 마주하고 그린 나무들이 베어지는 것을 보고 친구가 처형당하는 것처럼 괴로워했다고 한다. 결국 루소는 이를 ‘영아 학살’에 비유하며 그림으로 범죄를 고발한 것이다.


19세기 초 산업화로 인한 대량 벌목과 관광 루트 개발로 숲이 점차 파괴되어 갔다. 하이킹의 창시자인 클로드 프랑수아 드네쿠르가 퐁텐블로 숲에 길과 표지를 만들고 안내서를 발행한 데다 파리에서 오는 열차가 개통(1849)되면서 숲의 풍경이 점차 변화되었다. 결국 1852년 루소는 화가들을 대표해 숲생태계의 연약함을 강조하며 보존을 청원하는 편지를 정부에 보냈다. 다음 해 세계 최초의 자연보전구역이 지정되었고, 이후 ‘예술적 보전구역(artistic reserves)’으로 불리게 되었다.  



테오도르 루소, <강풍경>, 1845-50년, 목판에 유채, 41.6 x 63.2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연못>, 1855년, 31.4 x 50cm, 빅토리아 알버트 미술관


공식적으로 인정받으며 다작하던 1850년대 루소는 평온하고 서정적인 작은 풍경화도 그렸다. 위의 두 작품은 낮은 지평선과 하늘의 구름, 물가의 나무들까지 비슷한 구성을 보여준다. 인간도 한 점의 붓질로 풍경에 스며들어 있다. 보다 정교한 묘사와 완결된 구성을 보여주는 이 그림들은 화가가 흠모했던 17세기 네덜란드 풍경화와 유사하다. 루소는 루브르 미술관에서 야코프 반 로이스달(1628/29~1682)과 얀 반 호엔(1596-1656) 등의 작품을 연구했을 뿐만 아니라 17세기 네덜란드 풍경 판화를 다수 소유하고 있었다. 유사한 작품이 많아 화가가 작업실에서 변주하며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테오도르 루소, <옛 바브로의 위대한 오크 나무들>, 1864년, 캔버스에 유채, 90.2 x 106.8cm, 휴스턴 미술관


루소는 1852년 프랑스 최고 훈장 레지옹 도뇌르를 받고 1855년 만국박람회에서 금메달 수상하는 등 성공가도를 달렸으나 말년인 1860년대 재정난과 아내의 정신 이상, 고질적인 불면증으로 고통을 겪었다. 그 와중에도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친구 밀레의 그림을 몰래 사주며 생이 끝날 때까지 바르비종에서 우정을 나눈 것으로 유명하다.


<옛 바브로의 위대한 오크 나무들>에서 전면을 차지한 거대한 나무들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퐁텐블로 숲에서 오크 나무가 밀집한 바브로(Bas-Bréau) 지역은 루소의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스케치처럼 거칠고 느슨하게 채색된 나무들에서 살랑이는 바람과 햇살이 느껴진다. 오른쪽에 나무를 바라보는 개미처럼 작은 사람이 보인다. 그의 등장으로 세월의 깊이가 더해진 나무들의 생명력이 더욱 위대하게 다가온다. 루소의 풍경화에서 개별적인 특성을 드러내는 나무들은 숲의 주인공이다. 숲이 어머니의 품처럼 인간을 포용해 준다면, 직립한 채 움직이는 나무는 우리 마음에 더 쉽게 감응과 사유를 일으킨다. 


“모든 시간들과 모든 계절에, 퐁텐블로는 항상 인간의 영혼을 꿰뚫고 생생한 시를 불러일으키는 인상들을 선사한다.” - 비평가 테오필 토레(1847)



테오도르 루소, <해 질 녘 겨울의 숲>, 1846-67년, 캔버스에 유채, 162.6 x 260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루소의 작품 가운데 가장 큰 <해 질 녘 겨울의 숲>은 30대에 그리기 시작해 동료들의 설득에 말년까지 수정하다가 미완성으로 남았다. 루소는 겨울에 퐁텐블로의 무성한 바브로에서 본 일몰의 효과를 재현하고자 했다. 작은 못과 바위 주변으로 잎을 떨군 나무의 가지들이 복잡하게 엃혀있다. 지평선을 넘어가는 마지막 햇살이 깊은 숲을 어스름하게 비춘다. 여기서도 보일 듯 말 듯 구부정한 두 인물이 등장한다. 깊은 숲 속에서 어둠까지 다가올 때의 두려움, 빠져나가기 어려운, 출구 없는 답답한 감정도 느껴진다. (참고로 이 때는 살롱전에 계속 거부당하다 출품도 그만두고 묵묵히 10년째 작업하던 시기다.)


미술사에서 루소는 19세기 중반 아카데미 전통 속에서 풍경화의 위상을 높이고 그림을 통해 자연에 대한 시선을 변화시키며 인상주의를 향한 길을 개척한 중요한 화가다. 루소는 자연의 풍요로움뿐만 아니라 혹독함에서부터 신비로움, 비애감과 경외를 일으키는 모습까지, 자연의 다양한 얼굴을 담아냈다. 그는 자연을 단순히 그림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았고, 생태계의 유기적인 관계에서 존중과 애정의 시선으로 마주했다. 그가 특별히 사랑한 나무의 생명력과 삶을 그려내면서 그것이 진정 자라날 수 있기를 응원한 것이다.





현재 프티 팔레에서 <테오도르 루소, 숲의 목소리> 대형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JOth87XBtM&list=PLx14vzJo-KnzBjiJgdfsvGxiYBrFo-C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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