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거인의 말들
하마는 독일에서 지내고 있는 작가이다. 먼 거리에서 그의 글을 애정하고 있던 날들이었다. 하마가 올해 여름 쯤 한국에 들어와서 초가을까지 지낼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이어서 24년 9월 26일에 그의 저서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의 출간 3주년 기념 북토크가 남산의 한 책방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신청하였다. 하마를 실제로 만나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나서 귀여운 캐리커쳐 키링을 제작하는 설님께 하마의 키링을 주문제작을 부탁드렸다. 그날 밤 나는 키링과 미괴오똑 책을 들고 책방에 갔다. 맨 앞자리 사수하기 성공. 일 등으로 사인받기 성공. 이것들이 날 기분 좋게 하였는데, 그 이상의 것들이 남았다.
미괴오똑은 여성 우울증을 중심으로(그러나 이것은 책의 부제일 뿐이지, 책을 통틀어서 '우울증'이라는 단어는 사용되지 않는다) 여성 정신질환자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하마가 재구성하여 만든 책이다. 북토크가 시작되고 알게 된 것인데, 사실 그 자리는 하마가 책에 등장하는 인터뷰이들의 그 이후의 이야기를 그들의 목소리로 듣고 싶어서 마련된 자리였다. 그중 죽은 사람도 죽지 않은 사람도 있는데, 죽지 않은 사람들이 눈앞에 앉아 있는 것은 다행이었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현장은 일반적인 북토크와 꽤 다른 모습이었다. 독자들은 하마에게 혹은 인터뷰이에게 질문하거나 전하고 싶은 말을 했고, 그 공간이 자유로운 대화의 장이 되었던 점에서 나는 편안함을 느꼈다. 하마는 작가님이라기보다는 (무척 아름다운..) 작은 거인으로 한 자리를 함께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마의 발언들에 나는 깊이 공감하였고 위로를 받고, 무엇보다도 개큰 용기를 얻었다. 그것들을 공유하고 싶다. 가장 먼저 오늘 소개하고 싶은 것은 하마의 균열 이론이다.
균열 이론
세상은 '정상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균열이 존재한다.
소수의 사람들은 그 균열을 본다.
균열을 목격한 사람들과 함께해야 한다.
나는 균열을 보았고, 그 자리에 있는 여자들도 그랬다. 딥페이크 시위의 맨 앞줄에 앉아 외치던 여자, 느지막히 등장해 뒷줄에 앉아 분개하며 외치던 여자, 그리고 목소리와 눈빛이 물리적으로 흔들리던 딥페이크 피해 당사자 고등학생. 여성주의 운동을 하다가 독립출판물을 낸 여자, 페미당당의 일원이었던 여자, 남성 인간을 대면하는 것이 버거워 방 안에 숨었던 여자.
나는 균열을 보았고, 추석 연휴에 참석했던 비건 포트럭 파티에 있던 사람들 또한 그랬다. 환경 운동가이자 관련 연구를 하는 박사과정생 여자, 여성학을 공부하는 여자, 반려견과 함께 즐겁게 비건 삶을 살아가는 여자, 큰 소리로 환경 문제를 문제삼는 벨기에 남자, 글루텐에 알러지 반응이 있는 여자를 위해 글루텐-프리 비건 쿠키를 따로 준비해준 제로 웨이스트샵 직원, 한복을 즐겨입고 플로깅을 즐겨하는 여자, 다가오는 봄에 결혼 예정인 두 여자.
나는 앞으로도 균열의 목격자들과 함께할 것이다. 그것은 나의 삶을 지속 가능하게 하고 무력감을 덜어준다. 사랑해요 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