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내가 화를 내는 사람이었고, 남편은 허허 웃으면서 '그럴 수도 있지'를 달고 사는 느긋한 사람이었다. 타고난 성격 탓인가 했는데 프랑스에 온 뒤로는 바뀌었다. 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어떤 개똥 같은 상황을 맞닥뜨려도 '프랑스니까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받아들이는 편이고 남편에게는 모든 것이 그의 말을 빌리자면 '용서할 수 없는' 것들이다.
계좌이체에 며칠이 걸리는 것도(레볼루트의 발견으로 이제 바로바로 가능). 은행 멋대로 정해버린 한 달 결제한도도(계좌에 돈이 있어도 그 이상 결제가 안 되는 이상한 곳), 마트가 일요일 오후에는 문을 닫는 것도 (그나마 일요일 오전이라도 열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음), 초고속 인터넷이 '곧' 깔린다고 했지만 1년 반정도 걸린 것도 (이건 솔직히 좀 화났다), 6시에 회식한다고 해놓고 7시에 꾸역꾸역 나타나는 동료들도, 리드타임이 빠듯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틈날 때마다 '이거 내 일 아닌데(R&R 맞음)', '이거 하는 거 맞냐(진행하는 거 맞음)'며 발목을 잡는 동료들도, 2024년 프랑스어 교육 계획이 잡혀 있었는데 9월이 되어서야 수업을 시작한다는 것도, 정말 말하자면 끝도 없고 예전 같으면 하나하나 다 폭발했을 법한 이야기지만 크게 화가 나지 않았다.
남편도 며칠 전 산책하는 길에 나보고 '요즘 엄청 너그러워졌네요' 라며 내가 변해서 놀랐단다. 자기는 프랑스의 느려터진 생활에 내가 적응을 못할 줄 알았는데 정작 적응을 못한 건 본인이었다며.
'아 맞네. 예전에는 마트 계산대에 줄이 빨리 줄어들지 않는 이런 사소한 것조차도 다 짜증 나는 포인트였는데, 나 왜 이렇게 된 거지?' 예전에는 모든 시간이 아까웠는데 시골에 2년 살다 보니 마인드 자체가 좀 바뀐 것도 있는 것 같다. 딱히 바쁜 일도 없고 급할 것도 없다.
계산대에서 직원과 수다를 떠는 손님들을 보면 남편은 엄청 답답해 하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 현실을 일깨워 준다.
"대화가 하고 싶으신가 보지. 우리 뭐 바빠? 집에 가면 할 일 있어?"
"없지"
"근데 왜 화내?"
"화 안 냈는데"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짜증내지 말라고 나를 진정시키던 것은 남편이었는데 이렇게 역할이 바뀌다니.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온다.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가면 또 바뀔 듯. 원래 (말이 통하는)내 나라에서 생기는 답답한 일은 참을 수 없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