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살던 동네에 잠시 볼 일보러 갔다가 그 동네의 유일한 서점에 들렀다. 동네 서점이라 작아도 신간과 구간, 어린이들 책이 적절하게 조화된 곳이라 항상 사람이 있는 편이다. 한국엔 작은 동네 서점이 이제 잘 없지만, 프랑스는 동네마다 개성 있는 작은 서점들이 제법 많다. 서점마다 큐레이션도 달라서 구경하다가 한 권, 두 권 사다 보니 제법 많은 책이 모였다. (그걸 다 읽는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불어 원서 책은 아직 진입 장벽이 좀..)
마침 프랑스어 선생님이 원서로 책을 좀 읽어보라며 Le Petit Prince (어린 왕자)를 추천해 주셨는데 서점을 보자마자 그 책 생각이 나서 들어갔다. 아무리 작아도 설마 어린 왕자는 있겠지!
있었다. 직원이 여러 버전으로 나와 있는데 어떤 걸 하겠냐며 책을 보여줬는데, 생텍쥐페리의 그림이 들어있는 오리지널 버전을 선택했다. 대형 서점처럼 어느 책이 어디에 꽂혀 있는지 전산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책의 위치를 바로 찾아낸 그녀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남편과 내가 연애하던 시절 그가 나에게 처음으로 사준 선물도 어린 왕자(한글버전)였다.
책을 집어서 나오는 길에 문구 코너에서 엄청 마음에 드는 노트를 발견했는데 11유로! 책이 7.5유로인데 노트가 11유로..? 뭔가 배보다 배꼽이 더 큰 느낌이지만 예쁜 노트가 있으면 필사를 하고 싶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노트도 집었다. 그런데 계산할 때 보니까 총 24유로.. 네??? 11이 아니라 17이었던 것이다.. 프랑스에선 1과 7을 비슷하게 쓰는데 7은 중간에 선을 그어 구분 짓는다. 공책주제에 17유로나 할 것이라고 상상도 못 했기 때문에 내 뇌가 17을 11로 인식한 것 같다. 책값 싸다고 좋아했는데 이게 무슨 일이람.
책이 마진이 얼마 안 남으니 이런 문구류로 매출을 올리는 건가? 좀 비싸게 주고 사긴 했지만 예뻐서 공부하고 싶은 의욕을 불러일으키긴 한다. 이 거 다 쓰면 또 다른 거 사야지. 비싼 가격에 맞게 나름 192 페이지나 들어있는 두꺼운 공책이다.
이번 주 내내 시어머니가 우리 집에 놀러 와 계셨는데 내가 어린 왕자를 읽는 것을 보고 굉장히 좋아하셨다. 정말 좋아하는 이야기라며. 책값이 싸서 놀랐다고 하니 프랑스는 도서 정가제가 있어서 그렇다고 하셨다. 이런 페이퍼백은 대체로 가격이 정해져 있어서 누구나 부담 없이 책을 사서 읽을 수 있다고.
그리고 프랑스는 반 아마존 법으로 도서 할인이나 무료배송이 규제되어 있어서 거대자본으로부터 동네의 작은 서점도 지켜준다. 그러다 보니 창작자들이 다양한 주제로(베스트셀러라고 할인하는 법도 없다) 꾸준히 출판을 하고(신간의 가격이 후려쳐지지 않으니), 파리 같은 대도시에 사는 사람도, 나같이 시골에 사는 사람도 같은 가격으로 책을 볼 수 있다. 수 십 년 전 프랑스에서 도서 정가제가 폐지되었을 때 대형서점의 할인행사로 출판 생태계가 망가져서 1981년 랑 법(la loi Lang)이 제정되며 도서정가제를 재도입한 지 40년쯤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도서정가제로 말이 많은데 어쨌든 가격이 잘 정착되어서 동네의 취향 좋은 작은 서점들과 좋은 창작자들, 그리고 출판사 모두가 손해보지 않고 꾸준히 좋은 책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요즘 한국 책 값이 어지간하면 1만 5천 원을 훌쩍 넘던데 계속 이렇게 오르다간 서점보다 도서관으로 가야 할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