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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얀 Dec 20. 2021

기록의 가치

기록에 대한 성긴 생각들

  


 기록의 힘은 정말 대단해서 남겨두기만 하면 꽤 많은 감각들을 되살릴 수 있다. 단 한 줄의 문장도 꼴에 기록이라고, 그날 공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재수학원에 다니며 얼마나 괴로웠는지 던지듯 적어둔 한 줄을 읽으면 그때 무얼 먹었는지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물어보지 않은 것들까지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 끌려 나온다. 냄새나 온도, 촉감이나 쾌감 혹은 불쾌감까지. 괴로운 기억들은 좀 묵혀뒀다가 다시 꺼낼 필요가 있는데 그때 기록이 참 유용하게 작용한다는 생각도 든다.






 기록은 드는 품이 매우 적은데 비해 막상 기록 자체를 시작하기까지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대개는 귀찮아서인데, 한 문장 적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 그 주변에 무한에 가까운 외연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의미는 단어로 표현하는 순간 그 의미를 잃어버리고 특정 단어로 전락해버린다. 진정으로 하고픈 말을 언어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열손실처럼 소실되는 의미로 인한 격차가 견딜 수 없어 기록을 시작할 수 없을 때도 많다. 의미적 완벽주의라고 할까. 이 많은 것들을 어떻게 온전히, 최소한의 손실로 기록할 수 있는지, 생각하다 보면 아찔해지고 이내 귀찮아져버린다.

 글을 쓰는 일, 기록을 남기는 일은 언제나 적확한 단어로 의미와 언어 사이의 간극을 좁혀나가는 일이다. 불가능하지만 가능하다고 믿으면서.



 빈 공간에 단어를 써놓는 것의 의미는 생각보다 크다. ‘친구’라고 쓰면 나는 그 단어 속으로 들어가버리고 싶다. ‘무지개’라고 쓰면 그 단어를 보고 싶다. 그런 단어들은 아주 많다. 흑조, 4월의 눈, 호랑가시나무, 러시아식 꿀 커피. 나는 그 단어들을 여행의 단어들이라고 불렀다. 내 몸이 아니라 내 마음을 움직이는 단어들이었다. 각각의 단어들에는 사연이 있다. 그러나 내가 왼편에 얼마나 멋진 문장들을 옮겨 썼든 나의 삶은 오른쪽 페이지에 아직 완전히 쓰이지 않은 채로 있었다. 그 엉성한 생각들은 좀 더 정교해지고 정확해지다가 언젠가는 현실이 되어야 했다. 나는 점점 더 쓰이지 않은 페이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데 익숙해졌다. 나는 과거보다는 미래를 생각하고 싶었다. 내 메모장의 여백이 현실보다 더 중요한 현실 같았다. 먼 훗날 나는 보르헤스가 이것을 아주 멋진 문장으로 표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단어를 읽지만 그 단어를 살아낸다.

아무튼 메모 p.38
(인용 제공 : 구기자)





 

 현대인의 기록은 언어보다는 사진으로 많이 대체되었다. 어제 뭘 먹었는지도 갤러리를 봐야 떠오를 지경이다.

 영상의 시대에 언어적 기록은 어떤 쓸모가 있을까. 길가다 스마트폰으로 하늘을 찍을 때,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선명하게 남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어쩐지 두려워지기까지 한다. 무엇이든 생생하게 기록할 수 있는 시대에 기록으로써의 글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 생각해본다.

 언어로 하는 기록은 행위이기 전에 재구성의 과정이다. 있었던 사실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언어는 그 어떤 매개보다 훨씬 더 많은 부산물을 생성해내는데, 그 덕에 글은 몇 키로바이트 밖에 되지 않는 용량으로 우리에게 풍족함을 선사한다.






훗날 기록을 들춰보면 적혀있지 않은 것까지 밀도가 빽빽이 채워져 있다.

기록은 기억의 책갈피이자 아리아드네의 실.






 언어적 기록으로 남기지 못하는 것이 존재할지 생각해봤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엔 사람의 목소리가 그러하다. 그가 나에게 어떤 음성으로 다정하게 말을 걸었는지 기억해내고 싶은데 도저히 할 수가 없다. 어느 날 길가다 그가 통화하는 소리를 들으면, 나는 분명 그 음성이 들리는 쪽을 돌아보겠지. 다시 한번 만나서 나의 이름을 불러주면 불현듯 그의 목소리는 기록은 아니지만 기억의 책갈피가 되어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개인을 구별할 수 있는 속성은 아무리 언어로 적어도 휘발해버린다. 이것이 우리가 애를 쓰고 탄생과 죽음을 기념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함께 나눈 생의 파편을 겨우 몇 조각이라도 붙잡아 둘 수 있기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의 기록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서로의 기록이 되어 개인의 역사를 구축해준다. 복잡하게 얽힌 와중에 끊임없이 스파크가 일어나는 신경망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공동체'라는 희망적인 단어도 읊조려본다.





 기록은 시간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가만히 앉아서 초침이 흐르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조차 가늠할 수 없었던 시간의 존재를, 그 위엄을, 불가항력, 혹은 경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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